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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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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요리는 방법일 뿐"... 신동민 셰프를 바꾼 그 사고 이후

2026.04.06 17:36

[생존하셨습니다②] "전국 돌며 농민 만나 재료 공부"... 그가 직원에게 '한자 이름' 강조하는 이유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순위를 남깁니다. 출연자의 이미지도 남깁니다. 그 이미지는 때로 한 사람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노출 시간이 짧은 탈락자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방송에서 다하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습니다. 제작진과 심사위원의 의견도 기다립니다. <편집자말>

* 신동민 셰프 인터뷰 '안성재의 올드하다 심사평, 방송 못 나간 요리과학자의 이 말'에서 이어집니다.

 국가무형유산 백산 김정옥 선생을 오랜 시간 설득해 협업하게 된 신동민 셰프는 "다완잔으로 종종 잔멍을 때린다"며 웃어 보였다. 잔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이유다.
ⓒ 정채빈

"가쓰오부시는 85도, 다시마는 60도 정도의 물에서 가장 깊은 맛을 낸다. (중략) 설탕은 살을 찌우고, 소금은 맥을 뛰게 하며, 신맛은 뼈를 튼튼하게, 쓴맛은 기를 북돋운다."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신동민 셰프가 종종 강조하는 말이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시즌2에서 그가 선보인 '–196도 사과' 디저트는 말대로 그의 작은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방송에선 액화질소 분자요리라는 특정 기술만 부각됐지만 그게 그를 온전히 설명하진 못한다.

서울 신사동의 디저트 카페 당옥에서 3월 26일 오후에 만난 신동민 셰프는 분자요리의 본질을 "재료 본연의 맛을 내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당옥 외에 그가 운영하는 식당인 멘야미코(삼성동)에서도 일본 가정식이 주메뉴다. 이제 그는 분자요리를 기술적 볼거리로 소비하지 않는다. "쿠킹(cooking) 자체가 어쩌면 분자요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는 게 지금 그의 지론이었다.

인생 분기점 됐던 불의의 사고

분자요리는 1980년대 후반 학술적 개념이 만들어졌고, 이후 스페인 셰프들을 중심으로 대중화 됐다. 2007년 보도된 <한겨레> 기사를 보면 당시에도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양면적이었다. 새로운 요리의 탄생이라는 것과 이탈리아나 프랑스 요리를 따라잡기 위해 스페인 정부가 고안해 낸 고육지책이라는 것이다. 일본 유명 레스토랑 류긴에서 분자요리를 접하고, 2006년 12월경 서울 청담동에 슈밍화라는 레스토랑을 오픈, 국내 분자요리 초창기를 이끈 신동민 셰프의 인터뷰도 해당 기사에 짧게 담겨 있었다. 액화질소를 활용한 아이스크림, 솜사탕처럼 만들어 낸 물수건, 우엉을 활용한 와인 코르크 등. 신나게 설명하던 당시 신동민 셰프의 앳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런 그에게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은 교통사고였다.

"그때까진 상위 1%의 고객을 중심으로 일했다. 어느 순간 그게 재미없더라. 남은 제 인생을 돈 많은 분들을 위해 요리하는 데 쓸 자신이 없었다. 당시 코스를 열두 가지 요리로 구성했는데 그걸 매월 새롭게 변경하며 일했거든. 새벽 3시, 4시경 귀가하기 일쑤였다. 집에 못 들어가고 차 안에서 자다가 출근한 적도 많았다. 사촌 형이 깨우러 와서 제발 들어가서 자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 어느 날 시속 70km로 달리다 사고가 나서 입원했는데 병원에서 나도 모르게 뭔가 미소가 나오더라. 이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말이다. 그때가 2007년 11월 14일 새벽 4시였다. 서른 살이었으니 정말 어린 나이였지.

온몸이 굳었고, 몇 달을 고생했다. 지금도 후유증으로 고생 중이긴 하다. 2008년에 슈밍화를 폐업하고 다시 일본에 건너가 치료받으면서 재료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소금, 간장, 된장부터 팠다. 그러다 각종 약선(약재 조리 음식)들도 들여다봤고, 한국의 흑초도 찾아내게 됐다. 당시에 방송 출연 제의가 많았는데 다 거절했다. 대신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농민분을 만났다. 그때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흑백요리사>에 가져간 사과도 10년여 알고 지낸 농부가 재배한 것이었다. 그는 "한번 맺은 인연을 오래 가져간다. 기본 10년, 15년 이상인데, 한창 일할 땐 서른일곱 군데와 재료별로 거래하곤 했다"며 "나중엔 세금 계산서 정리하기가 정말 힘들어지더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때 쌓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종종 단골손님들에게 음식을 해드리곤 한다. 그분들의 건강 상태를 봐가며 쓴맛과 신맛, 단맛을 조절해 제공했다. 기운이 없다고 하면 쓴맛을 강조한 음식을 드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한번 파면 끝까지 해보는 그의 성정은 칼럼 연재에도 적용됐다. 신동민 셰프는 2015년 10월부터 한 경제지에 '신동민의 푸드 오디세이'라는 꼭지를 도맡았다. 격주로 1개씩 보내야 했던 칼럼은 음식의 기원과 역사, 레시피 소개는 물론이고 직접 요리한 결과물까지 사진으로 눌러 담은 것이었다. "한 100개 정도 썼을 텐데 원고료를 모아 바이크를 하나 산다는 걸 동기 삼아 했던 기억이 있다"며 그가 웃었다.

체육교사 꿈꿨던 예비 셰프

 26일 서울 신사동의 디저트 카페 당옥에서 만난 신동민 셰프.
ⓒ 정채빈

본격 셰프의 길을 걷기 전까지 그는 체육교사 지망생이었다. 어린 나이에 접했던 합기도가 적성에 맞아 운동을 오래 했다. 그러면서도 줄곧 고사리손으로 뭔가 해 먹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삼 형제라 주방에 재료가 남아나질 않았다"며 그는 "너무 많이 먹어서 부모님이 부엌을 걸어 잠그고 다니시기도 했다. 국자나 냄비 태워 먹는 건 기본이었다"고 당시를 전했다.

"교사가 안 되면 그 외에 해볼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당시 부모님이 건축일을 하셨는데 아버지 권유로 대학에 들어가 실내디자인을 전공했다. 손으로 뭔가 하는 걸 좋아했기에 적성에 맞았다. 제가 뭘 해도 대충하는 성격이 아니다. 당시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는데 그걸 빌미로 부모님께 요리 학원에 가겠다고 했다. 친구네 놀러갈 때마다 제가 두루치기도 하고, 여러 요리를 하는 게 너무 즐거웠거든.

그러다 제 요리를 드신 친구 아버님이 뉴욕에 지인이 있다며 일식 자격증을 따면 뉴욕에 일을 소개해준다고 하셔서 본격 공부하기 시작했다. 부모님도 제가 장학금을 받아 오니 기특해하며 지원해 주셨다. 그렇게 고향 포항을 떠나 서울로 왔고, 강남의 한 일식당에서 뚝배기를 닦으며 일을 배웠다. 그러다 '왜 굳이 뉴욕이야? 일본에 직접 가서 배우면 되지'라는 생각에 모은 돈을 쏟아부어 떠나게 됐다."

그때가 한일 월드컵으로 뜨거웠던 2002년이었다. 아침엔 일본어 수업을 듣고 저녁엔 식당일을 했다. 틈틈이 자신이 만든 요리를 셰프들에게 건넸고, 그렇게 인정받아 남들보다 빠르게 자릴 잡았다고 한다. 도쿄 조리사전문학교 졸업 후 영국 런던에서 공부를 이어갔고, 2006년 초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정식 셰프로 일본 롯폰기의 유명 식당 류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연히 류긴의 음식을 먹고 큰 충격에 빠졌다. 보통 먹게 되면 재료가 느껴지잖나. 근데 그 음식은 제가 알던 육수보다 훨씬 진했고, 모든 맛이 머리로는 이해가 안될 정도였다. 도파민이 터졌지. 그 자리에서 셰프님을 뵈려고 4시간을 기다렸고, 일하고 싶다고 청했다. 돈은 안 받아도 좋으니 막내와 똑같은 과정부터 거치겠다 말씀드렸지."

마침표 철학

 신동민 셰프가 일본의 한 제조회사와 협력해 개발한 핀셋 세트.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조리도구로 칼과 핀셋, 그리고 다완을 꼽기도 했다.
ⓒ 정채빈

이 모든 과정을 거친 뒤 한국에 차리게 된 슈밍화, 그리고 교통사고 후 회복기를 거치고 2011년에 연 슈밍화미코까지. 신동민 셰프는 "제가 무엇을 하든 재미가 중요했다"고 강조했다. 슈밍화미코를 10년간 운영하며 고객들에게 꽤 인정받다가 멈춘 이유도 같은 이유였다. 현재 그는 디저트 카페와 일식당 일을 제외하고 남은 시간을 대부분 요리용품 개발과 바이오 소재 사업에 쏟아붓고 있었다.

"주변에선 왜 10년 운영한 곳을 닫느냐며 안타까워했다. 오히려 좀 더 빨리 내려놓을 걸 싶더라. 제가 지금 일본의 장인 기업들과 함께 칼과 핀셋을 개발 중이고, 국가 무형문화재 백산 김정옥 선생님의 다완(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사발)을 두고 협업 중이다. 이게 지금의 즐거움이다. 분자요리가 제겐 맛있는 요리를 위한 하나의 방법인 것처럼, 칼과 핀셋, 다완 사업 또한 본질적으론 맛있음을 위한 것이다. 업장의 조명, 분위기, 식기 하나하나가 모두 맛을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한 쓰임새니까 말이다.

디저트와 음료 또한 요리사의 관점으로 개발한 것이다. 빙수는 덮밥을 떠올리며 맨 아래 재료까지 다 생각하며 만들었다. 또 우마이 커피는 커피에 가쓰오부시 육수를 배합한 건데 적절하게 섞으면 감칠맛이 커피에서 나오거든. 그렇다고 커피에서 고소한 맛이 나면 안 된다. 직원들을 반복해서 교육하며 일종의 커피차를 만들어 냈다고 보시면 된다. 요즘 워낙 커피를 잘 내리는 곳이 많으니 진한 커피는 거기서 드시고, 특별한 커피를 원하면 여길 오시면 된다(웃음)."

현재 손을 뻗치고 있는 사업을 열거하면서도 신동민 셰프는 "마침표를 찍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다가 마는 게 아니라 확신이 들고 해볼 수 있다는 판단이 서면 결과물을 낸다는 식이다. 성공이냐 실패냐는 그에겐 두 번째 문제였다. 간장 공부를 한 이후 출시한 '신간장'도 업장에서만 사용하던 걸 고객들이 시판해달라는 요청으로 낸 결과물이었다. 심지어 카페와 식당에 걸린 일부 그림과 액자, 로고 디자인 등은 그가 과거 실내디자인 전공을 살려 직접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제가 공부하고 배운 걸 다 써먹고 있다(웃음). 열심히 해놓으니 버릴 게 없더라. 제 직원들에게도 쉼표를 찍지 말고 마침표를 찍는 식으로 일하라고 한다. 글을 쓸 때 문장으로 써내야 완성이 되는데 쉼표만 찍으면 문장이 안 되잖나. 파스타만 10년 넘게 만들었다는 직원에게 어떤 파스타를 가장 잘하는지 물었는데, 자신 있는 게 없다고 한 일이 있었다. 충격이었다. 그게 다 쉼표만 찍어서다.

또 전 기본적으로 직원들에게 한자로 이름 쓰는 걸 강조한다. 젓가락질을 제대로 못 하면 불러서 가르친다. 요즘 이런 식으로 교육하는 업장이 없다고 하더라. 보면 젊은 친구들의 절반 이상이 한자로 이름을 못 쓴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데 뭔 요리를 할까 싶은 거다. 요즘 이렇게 가르치는 업장이 없다고들 하더라. 너무 꼰대 같나? 근데 요즘은 또 오히려 꼰대가 없어서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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