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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산업의 멈춘 표준 [임창기의 피지컬 AI와 패스너]

2026.04.06 13:58

임창기 볼츠원 대표
활기를 잃은 뿌리산업과 그 표준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AI 이미지.
대한민국 제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산업은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반을 이루는 뿌리산업의 현실은 전혀 다르다. 주조, 금형, 열처리, 표면처리, 그리고 패스너와 같은 기초 제조 영역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무너지고 있다.

겉은 세계 최고, 속은 붕괴 직전. 이것이 현재 한국 제조업의 실상이다.

뿌리산업은 산업의 ‘기초 체력’이다. 아무리 설계가 뛰어나고 시스템이 정교해도, 그것을 구현하는 기초 공정이 무너지면 산업 전체는 유지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역은 오랫동안 저부가가치 산업으로 취급되며 정책과 투자에서 후순위로 밀려왔다.

그 결과는 이미 현장에서 드러나고 있다. 지방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뿌리기업들의 폐업은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숙련 기술 인력은 고령화로 빠르게 이탈하고 있다. 신규 인력 유입은 거의 끊긴 상태다. 한때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되었던 가공 노하우와 공정 기술은 더 이상 전수되지 못하고 단절되고 있다. 기업들은 버티고 있지만, 산업은 서서히 기반을 잃고 있다.

패스너 산업은 이 현실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다. 볼트 하나는 작지만, 모든 산업에 쓰인다. 자동차, 조선, 방산, 반도체 장비까지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중요한 부품조차 국내에서는 여전히 가격 중심의 납품 구조에 묶여 있고, 기술 혁신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체결 방식의 표준 자체가 수십 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현장에서는 이미 그 한계가 반복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동일한 체결 공정에서도 작업자 숙련도에 따라 품질 편차가 발생하고, 자동화 설비에서는 미세한 슬립과 정렬 오차로 인해 공정이 자주 멈춘다. 체결 불량은 곧 재작업과 검사 비용 증가로 이어지고, 이는 생산성 저하와 직결된다. 문제를 알면서도 구조를 바꾸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뿌리산업에는 ‘표준을 바꾸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구조에서는 개별 기업이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개발해도 산업 전체를 바꿀 수 없다. 표준이 그대로인 한, 새로운 기술은 적용될 수 없고 결국 시장에서 배제된다. 즉, 기술 문제가 아니라 구조 문제다. 이 구조는 시장뿐 아니라 정부가 적극 나서서 바꿔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해외는 이미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은 국가적으로 기술 표준을 산업 전략과 직접 연결한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곧바로 프레임워크와 기준을 만들고, 이를 시장에 사실상의 표준으로 정착시킨다. 유럽은 산업 연합과 표준기관을 통해 기술과 규격을 동시에 설계하며, 중국은 국가 주도로 표준을 수출 전략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공통적으로 표준을 ‘기술의 결과’가 아니라 ‘산업 지배 수단’으로 보고 있다.

미국 메릴랜드 게이더스버그에 있는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 캠퍼스 정문 안내판. (사진=NIST 홈페이지)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산업통상자원부와 국가기술표준원의 역할이 제한적이다. 국제 기준을 따라가고 기존 표준을 정리하는 수준에 머문다. 산업을 바꾸는 ‘공격적 표준 전략’은 사실상 부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사이 뿌리산업은 계속 무너지고 있다. 현장에서는 사람이 사라지고, 기업은 기술을 유지하지 못하고, 산업은 점점 더 해외에 의존한다. 지금과 같은 흐름이 계속된다면, 특정 공정이나 부품에서 국내 공급이 끊기는 상황도 충분히 현실화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제조업 전체가 외부 공급망에 종속되는 구조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한 산업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문제다.

표준을 만들지 못하는 국가는 결국 기술을 만들어도 시장을 지배할 수 없다. 지금 한국이 정확히 그 경계에 서 있다. 이제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첫째, 뿌리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재정의해야 한다. 단순 보호 대상이 아니라, 표준을 통해 산업을 주도할 수 있는 핵심 영역으로 인식해야 한다.

둘째, 정부가 직접 기술 표준을 설계하고 적용해야 한다. 특히 패스너와 같은 기초 부품은 공공 프로젝트와 대기업 생산 라인에 우선 적용하여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기술 개발과 표준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기술이 완성된 이후 표준을 논의하는 방식으로는 절대 경쟁할 수 없다.

이 변화는 쉽지 않다. 기존 산업 구조와 이해관계가 강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뿌리산업의 붕괴를 막을 수 없다.

인공지능(AI)과 로봇, 자동화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그 기반이 되는 기초 제조가 무너지면 모든 경쟁력은 허상이 된다. 아무리 설계가 좋아도, 그것을 구현할 산업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

결국 선택의 문제다. 무너지는 뿌리산업을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표준을 통해 다시 세울 것인가. 볼트 하나, 공정 하나, 표준 하나가 산업 전체를 바꾼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 개발이 아니라, 그 기술을 산업의 규칙으로 만드는 결단이다. 지금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핵심 부품 하나조차 자력으로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지금 멈춰 있는 것은 산업의 일부가 아니다. 대한민국 제조업의 뿌리다.

임창기의 피지컬 AI와 패스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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