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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작게 만들기’에서 ‘더 잘 엮기’로… 반도체 이젠 ‘아키텍처 싸움’

2026.04.06 00:32

HBM4부터 메모리에 로직 추가
아키텍처 전문가 세계 10명 남짓… 향후 10년이 인재 확보 골든타임
최재혁 서울대 전기공학 교수팀… 반도체 설계 대회 아태 지역 1위
“한국, 논문 등 질적으로 안 밀려”
올 2월 열린 국제고체회로학회(ISSCC)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1위 논문을 수상한 최재혁(왼쪽)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팀. 최재혁 교수 제공
올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반도체 설계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국제고체회로학회(ISSCC)에서 최재혁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가 이끈 연구팀의 논문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1위를 차지했다.

ISSCC는 세계 기업 및 학계 연구자 3000명 이상이 참석하는 반도체 설계 분야 최고 무대다. 한국이 반도체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약점으로 지적받던 설계에서 고대역폭메모리(HBM) 전력 소모를 10분의 1로 줄인 한국 연구가 아태지역 1위에 오른 것이다.

올해 ISSCC에 채택된 약 250편의 논문 중 절반이 넘는 165편이 아시아 지역에서 나왔다. 아태 지역 1위 논문의 지도교수인 최 교수는 “10년 전만 해도 미국이 양과 질에서 모두 앞섰는데, 지금은 중국이 96편으로 가장 많고 한국도 46편이 채택되는 등 아시아가 주도한다”며 “한국이 질적으로도 전혀 밀리지 않음을 보였다”고 전했다.

● K반도체, ‘도시 설계’ 같은 ‘아키텍처’가 열쇠

한국 논문이 아태지역 최고상을 받은 배경에는 인공지능(AI)이 있다. 김정호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는 “AI 에이전트가 주목받으면서 추론 과정에서 훨씬 많은 데이터가 필요해졌고 메모리가 다른 요소보다 더 중요해졌다”고 설명했다. 지난 수십 년간 연산을 담당하는 시스템 반도체가 주인공이었고 메모리 반도체는 조연이었다면, AI가 각광받으면서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또 다른 변화도 있다. 반도체가 점점 ‘극미세화’하며 기존의 공식이 무너지고 있다. 그간 반도체 발전은 집적회로의 트랜지스터 수가 약 2년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을 따라왔다. 1970년대 10마이크로미터(μm·100만분의 1m)였던 반도체 회로 선폭이 50여 년 흐른 지금 3나노미터(nm·10억분의 1m) 수준까지 작아졌다. 반도체가 극한의 세계에 들어서며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난제가 나타났다. 유회준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는 “반도체 회로 선폭이 2nm 이하가 되면 전자가 양자역학적으로 투과해 버리는 터널링 현상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이유로 향후 반도체 패권의 핵심이 ‘미세화’에서 ‘아키텍처’로 이동할 것이라 전망했다. 김 교수는 “아키텍처란 도시 계획처럼 건물 기둥을 어떻게 지을지부터 도시 자체를 어떤 철학으로 설계할지를 그리는 큰 그림까지 포함한다”며 “엔비디아가 아성을 쌓은 이유는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메모리, 주변 인프라까지 한 번에 연결하는 기술이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개별 칩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젠 그 칩들을 연결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메모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반도체 산업의 네 번째 ‘슈퍼 사이클’ 다음을 한국이 잘 준비하려면 메모리 반도체를 앞세워 ‘잘 만드는 나라’에서 ‘잘 그리는 나라’로의 변혁을 꾀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 의견이다.

● 세계 10명 남짓 아키텍처 인력… 인재 양성 시급

2026년 중반 출시 예정인 HBM4부터는 메모리 하단에 로직 공정이 도입되며 시스템 반도체와 메모리 반도체가 ‘한 몸’이 될 예정이다. 서로 다른 메모리를 연결하는 아키텍처가 중요해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최 교수는 “과거엔 ‘누가 더 작게 만드는지’가 승부였다면, 이제는 ‘누가 메모리와 로직을 하나로 더 잘 엮느냐’가 승부처”라고 했다.

문제는 인재다. 이미 글로벌 빅테크들은 한국 인재 확보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2월 17일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X(옛 트위터)에 태극기 이모티콘을 올리며 한국 반도체 인재들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반도체 지형이 흔들리는 지금이 향후 패권을 결정할 것이란 분석에서다.

국내에서도 ‘골든 타임’을 잡기 위한 인재 양성 전략이 추진 중이다. 현재 한국은 기업 계약학과와 국가적 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인력 확보에 나서고 있다. 전문가들은 양적 확대를 넘어선 ‘질적 전문성’ 확보가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지금까지 한국은 상대적으로 제조와 공정 쪽에 특화된 인력 양성에 집중해 왔다.

정홍식 울산과학기술원(UNIST) 반도체소재·부품대학원 교수는 “팹리스(설계 전문)와 후공정 등 한국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분야의 전문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해야 한다”며 “설계부터 공정까지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질적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향후 10년의 주도권을 결정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차세대 반도체 패권은 제조 규모라는 외형적 성장이 아닌, 전체 시스템의 흐름을 조율하고 설계하는 ‘소프트 파워’에서 결정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잘 그리는’ 나라로 거듭날 수 있을지가 향후 10년 한국 반도체의 운명을 가를 것으로 내다봤다. 김 교수는 “세계에서도 아직 아키텍처 전문가는 10명 남짓”이라며 “한국도 10년 뒤엔 전문가를 배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가 HBM을 통해 한배를 탄 지금, 우리가 강점을 지닌 메모리를 기반으로 만들어 나가면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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