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츠' 시대의 연애, 로테이션 소개팅[2030세상/김지영]
2026.04.05 23:10
“나 로테이션 소개팅 나가 보려고.” 친구 S가 말했다. “말 그대로 한 곳에서 여러 명을 돌아가면서 만나는 거야.” 재미있는 일회성 행사 정도겠거니 생각했는데, 검색해 보고 깜짝 놀랐다. 이미 많은 관련 전문 업체가 있었고, 로테이션 소개팅은 단순 유행이 아닌 산업화돼 있었다. 마치 메뉴판처럼 지역별 일정이 빼곡했고, 나이대별 조 편성과 키 제한, ‘비만, 탈모 참가 불가’라는 노골적인 문구가 눈에 띄었다.
“좋은 경험이었어. 끝나고 나서는 꽤 허무했지만.” 며칠 뒤 S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후기들을 종합하면 이러했다. 서울 도심의 한 카페, 12 대 12의 대진표가 짜인다. 번호표를 단 남녀가 마주 앉아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누고, 10분 뒤 타이머가 울리면 남성들이 다음 테이블로 옮긴다. 마지막에 마음에 들었던 상대의 번호를 제출하고 상대도 나를 선택하면 성공. 흥미로운 점은 사전에 나이, 직업, MBTI, 종교, 정치 성향 등이 빼곡히 적힌 인적 사항을 교환한다는 것이다.
연애가 고비용 프로젝트가 된 현실에서 이렇게 효율성을 극대화한 시스템은 분명한 장점이 있다. 반나절은 투자해야 하는 기존 소개팅과 달리 짧은 시간에 다수를 만날 수 있고, 주선자의 눈치를 볼 필요도, 거절의 민망함도 없다. 주최 측이 신원을 검증하기 때문에 데이팅 애플리케이션(앱)은 불안하고, 지인 찬스는 바닥났고, 결혼정보회사는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꽤나 매력적인 선택지가 된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면 기묘한 지점이 있다. 대다수의 취미는 운동으로 수렴하고, 인생 영화는 약속이라도 한 듯 ‘어바웃 타임’이며, 정치와 종교는 중도와 무교라는 안전지대에 머문다.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오답’이 되지 않기 위해 참가자들은 스스로 기획한 ‘소개팅용 아바타’를 앞세운다. “셀프 아바타 소개팅이랄까. 본인이 기획하고 본인이 연기하는 10분짜리 1인극 같은 거. 연기에 실패해도 상관없어. 주선자가 없으니까. 해명할 필요도 다시 만날 일도 없어.”
과거의 인연이 장편소설이었다면, 로테이션 소개팅은 ‘쇼츠’의 연속이다. 끊임없이 스크롤을 내리는 행위가 연애의 장으로 옮겨온 것이다. 한 사람의 서사를 파악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결국 대화의 주제로는 직업, 거주지, MBTI 같은 규격화된 데이터만 겉돌고, 판단의 잣대는 외모라는 가장 원초적인 정보로 회귀한다. ‘더 괜찮은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은 마주 앉은 이에게 온전히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복사, 붙여넣기’ 같은 자기소개의 반복 끝에 남는 것은 공허한 피로감뿐이다. 마치 의미 없는 ‘쇼츠’에 몇 시간을 흘려보냈을 때처럼.
“그런데 다신 안 가겠다는 건 아니야.” S는 덧붙였다. “1000명 중 한 명에게 일어나는 기적이라면 그게 내가 될 수도 있잖아?” 어쩌면 연애란 언제나 그런 확률 위에 서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단지 방식이 바뀌었을 뿐.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도 진실한 나를 드러내는 용기와 그것을 알아보는 현명함이다. 그것들이 서로 맞닿는다면,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는 아닐지라도 기꺼이 운명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의 건투를 빈다.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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