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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여전히 즐거움을 추구하는 두 여자를 보라

2026.04.01 23:33

90대 조각가 김윤신과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신나니까 하는 것”
40대에 은퇴하려는 시대에 나이 든 현역의 얼굴, 신화적으로 보여



일러스트=이철원

4세기 무렵, 중국 동진(東晉) 때의 일이다. 법현이라는 승려는 장안을 떠나 멀고 먼 나라로 간다. 당시 그의 나이는 60대. 4세기 무렵의 60대이니 지금의 80대와 비슷할 것이다. 노구의 그는 어디로 가려는가? 인도다. 육십 평생을 정진했지만 여전히 헤매던 그는 불교의 기본을 알기 위해 떠났다. 돈황을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고, 7000m에 육박하는 산들이 이어지는 카라코람산맥을 넘고, 인더스강을 따라 내려오며 그 길을 간다. 이렇게만 써도 장대하지만 분명 호랑이와 늑대 같은 맹수도 만났을 것이고, 눈보라와 작열하는 태양과도 사투를 벌였을 것이다.

얼마 전에 1935년생 조각가 김윤신 회고전을 보다가 법현을 떠올렸다. 김윤신이 49세 나이에 안정된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아르헨티나로 떠났다는 이야기에서였다. 1984년의 일이다.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 40대 후반의 여성이 교수직도 때려치우며 그런 ‘짓’을 감행할 수 있었다는 게 신선했다. 그는 어디로 갔는가? 아르헨티나다. 나무가 좋아서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작품으로 쓸 만한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무더운 여름이 끝나면 얼마 안 가 긴긴 겨울이 시작되는 한국은 나무가 울창하게 자랄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게다가 오랜 벌목과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에서 조각을 위한 나무를 구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웠다. 한국과 달리 내내 따뜻한 남미의 나무는 어찌나 굵고 튼튼한지 놀랐다며 영상 속의 김윤신은 말하고 있었다. 법현이 진리를 찾아 인도로 갔듯이 김윤신은 나무를 찾아 아르헨티나로 갔던 것이다.

남서울미술관 2층 전시장에 놓인 신작 앞에서 김윤신 조각가가 다리를 뻗은채 앉아있다. /전기병 기자

내가 놀란 것은 다음이었다. 나무가 너무 커서 어떻게 다룰까 하다 전기톱을 들게 되었다고 말할 때. 마땅히 작업실이 없어서 길거리에 나무를 내놓고 전기톱으로 잘랐다고 말할 때. 동양 여자가 전기톱을 들고 거대한 나무를 자르고 있으니 지나가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신기하게 봤다고 말할 때. 든든한 ‘밥심’으로 해야 하는데 밀가루 얇은 반죽 같은 거(‘또르띠야’로 추정) 먹어서 힘들었다고 말할 때. 작업의 곤란함에 대해 말하는 매순간에 그는 웃고 있었다. 70년 동안 작업을 해온 91세 조각가의 얼굴에는 근엄함 대신 즐거움이 있었다. 나무를 자르는 일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의 그 즐거워하는 얼굴이라니. 내가 최근에 본 가장 눈부신 장면 중 하나였다.

그리고 하나 더. 역시 얼마 전에 본 1928년생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의 전시회 이야기를 하고 싶다. 거의 100세에 가까운 그의 80년 패션 인생을 정리하는 자리였다. 17세 결혼, 19세에 이혼했다. 1940년대, 이혼한 여자에게 한국이란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혹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이름을 노라로 바꿨다. 입센의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처럼 그도 ‘집’을 뛰쳐나온 여자였기 때문이다. 1947년, 폭격기를 개조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갔다. 1949년, 돌아온 한국은 GNP가 50달러대인 최빈국이었다. 옷을 만들려고 해도 옷감이 없어 이불감이나 한복감으로 옷을 만든다. 그렇게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연다.

2026년 2월 20일 서울 청담동 노라노빌딩. 디자이너 노라노가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김지호 기자

영상 속 노라노도 즐거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결과는 아무래도 좋아요. 잘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할 수 없어요. 신나니까 하는 거죠. 한마디로 우린 ‘해피 고잉’이에요.” 노라노가 80년 동안 옷을 만들 수 있었던 저력 또한 바로 즐길 수 있어서가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김윤신처럼 노라노도 자신의 일을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하고 있었다. 은퇴 자금을 확보해 40대 파이어족을 꿈꾸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이 시대에 여전히 즐거움을 좇고 있는 나이 든 현역의 얼굴은 신화적으로까지 보였다.

그리고 다시 법현에 대해 생각했다. 법현은 중국에서 출발한 지 6년 만에 마침내 굽타 왕조가 통치하던 인도에 도착한다. 인도 전역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면서 경전을 베껴 적으며 ‘기본’을 배우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니 14년이 흘러 있었다. 60대였던 그가 70대가 된 것이다. 같이 떠난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목숨을 잃어 돌아올 때는 법현 혼자였다. 나는 법현의 그 14년이 얼마나 고됐을지 종종 생각했었는데, 김윤신과 노라노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법현 역시 충분히 즐겼을 거라고 말이다. 마음속 불꽃을 꺼트리지 않으며 순간순간을 충일히 지내다 보니 14년이 되었을 거라고.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는 공자님 말씀이 정말 맞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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