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신진우]“주유소 가기 두려워”…기름값 폭등에 성난 美 민심
2026.03.30 23:07
이란戰 후 휘발유값 한 달 새 30%↑
물류비 상승, 전반적 인플레로 전이
“외식·여행 줄여” 다른 소비 영향도
트럼프 각종 대응책에도 “한계 뚜렷”
11월 美 중간선거 앞 최대 위험 부상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사는 스킨스 씨는 26일(현지 시간) 자신의 동네 주유소 주유기 화면을 바라보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보통 36∼37달러 정도면 가득 채울 수 있었는데 요즘은 45달러를 넘어도 연료탱크가 차질 않는다며 “불과 몇 주 만에 같은 양을 넣는 데 10달러 이상 더 내는 게 말이 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바로 옆 주유기 앞에서 차의 주유구를 열던 애덤 씨도 거들었다. 그는 출퇴근에만 하루 평균 1시간 20분가량 운전을 한다면서 “주유소 오는 게 겁난다”고 말했다. 또 “이 좋은 봄날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야외에 놀러 갈 때도 기름값이 신경 쓰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지난 대선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찍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에게 너무 화가 난다. 이건 내가 기대한 방향이 아니다”라고 쏘아붙였다.
지난달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폭격하며 시작된 중동 전쟁의 여파로 국제 유가가 폭등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 전역에서 껑충 뛴 기름값은 가계 경제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최근 미국 내 휘발유 가격은 갤런(약 3.79L)당 평균 4달러에 달해 전쟁 전보다 30% 넘게 치솟았다. 한 달 새 1달러 이상 급등한 것이다. 지역에 따라 4달러를 넘은 곳도 적지 않고, 캘리포니아주 등에선 이미 5∼6달러대가 일반화됐다. 경유 가격 역시 기록적인 폭등세다. 갤런당 5달러를 훌쩍 넘는 등 전년보다 50% 이상 상승해 물류비 전반을 끌어올리고 있다.
●“학부모들, 기름값 얘기만… 몇 주 더 이어지면 불만 폭발할 것”
휘발유값 상승은 단순한 교통비 부담을 넘어 소비 전반을 빠르게 위축시키고 있다. 이달 여론조사회사 입소스와 로이터통신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인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생활비 부담 증가를 체감하고 있다. 또 약 20%는 이를 “심각한 수준”이라고 답했다. 응답자의 대다수는 향후 추가 상승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국토가 넓고 대중교통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미국에서는 국민 대부분이 자동차를 사용한다. 휘발유 가격 동향은 민생 경제의 가늠자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기름값 폭등에 따른 고통은 현장 곳곳에서 확인된다. 배달 일을 하고 있다는 30대 남성은 “기름값이 오르니 수입에서 빠지는 연료비도 상당하다”며 “더 오래 일해도 손에 들어오는 수입이 줄었다”고 토로했다.
아이들 등하교와 출퇴근을 위해 자가용을 사용하는 시민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메릴랜드주에 사는 전업주부인 수전 씨는 “요즘 학부모들을 만나면 기름값 얘기는 꼭 나온다”며 “이 상황이 몇 주만 더 이어져도 아이들 통학을 위해 적잖은 시간을 차에서 보내는 학부모들의 불만이 폭발할 것”이라고 했다.
자영업자들의 고통도 상당하다. 특히 식당 등 외식업 종사자들은 기름값 상승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식자재를 들여오는 운송비와 배달 비용이 동시에 오르면서 원가 부담이 크게 늘어서다. 버지니아주 애넌데일의 한 식당 운영자는 “고기나 채소를 납품받는 가격 자체가 이미 올라 있는데, 배송비까지 붙어 부담이 이중으로 커졌다”고 호소했다.
물류비 상승은 경제 전반에 대한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전이되고 있다.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도 최근 기자회견에서 “경유 등의 가격 인상은 많은 품목의 비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면서 에너지 가격이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이 실질적이고 중대하다고 우려했다.
기름값 상승은 가계의 다른 소비 패턴에까지 영향을 주는 모습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가계들이 최근 외식, 여행, 의류 등 소비를 줄이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전했다. 일부 가계는 식료품 구매를 할 때 할인 매장이나 저가 브랜드를 집중적으로 이용한다. 기름값 상승이 이미 ‘2차 소비 위축’까지 유발하고 있다는 의미다. 미 주요 매체들에 따르면, 시민들이 차를 덜 타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빈도도 늘었다. 지인들과의 약속을 줄이거나 교외 나들이 계획을 취소하는 시민들도 많아지고 있다. 기름값이 시민들의 생활 반경까지 줄인 셈이다.
●갤런당 8달러 넘는 주유소도… “폭리 취해” 분노 확산
일부 지역에서는 가격 급등이 ‘폭리’ 논란으로 번져 시민들의 불만을 더욱 키우고 있다. 물가가 높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등에선 갤런당 8달러가 넘는 주유소를 찾는 게 어렵지 않다. 특히 다른 주유소보다 더 비싸게 기름값을 받는 곳으로 시민들의 분노가 몰린다.
주유소의 높은 가격은 시민들의 불만을 사고 있지만, 사실 법적으로 문제 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기업은 높은 가격을 책정하거나 가격을 크게 올릴 수 있으며, 연방·주·지방 차원의 비상사태가 선포된 상황에서 이익을 취한 게 아니라면 가격 폭리 위반으로 간주하긴 어렵다. 또 주유소의 기름값은 교통량, 임대료, 공급처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비슷한 지역에 있는 주유소라도 가격이 다를 수 있다.
일각에선 주유소 운영자들이 높은 가격으로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것 아니냐는 인식이 있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휘발유 판매에 따른 수익률은 그리 크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이를테면 캘리포니아주에선 갤런당 약 0.9달러를 각종 세금으로 부과하는데, 그 밖에 원유 생산업체에 줘야 하는 비용이나 정제·유통·마케팅 비용 등을 고려하면 남는 게 그리 많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갑자기 기름값에 대한 미국 내 소비자 불만이 급증한 건, 결국엔 전반적인 기름값 상승이 특정 주유소를 향한 ‘분노’로 표출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전쟁 여파로 유가가 빠르게 오르면서 가계 부담이 커지자 소비자들은 이전보다 더 “누군가 과도한 이익을 취하고 있다”는 인식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의미다. 소비자들의 불만이 증폭되자 미국의 일부 주 정부는 가격 조작 여부 조사에 착수하는 등 나름의 대응에 나서고 있지만 시민들의 불만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다.
●폭등한 기름값, 흔들리는 표심
트럼프 행정부는 ‘기름값 여론’이 심상치 않은 상황으로 움직이자 나름 각종 대응책을 내놓고 있다. 우선 전략비축유(SPR) 방출 카드를 꺼내 들어 유가 상승을 억제하겠다는 신호를 보냈고, 중동 산유국들에 대한 증산 압박에 나섰다. 또 이란과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제재를 일시 해제하는 방안도 내놓았다. 미 환경보호청(EPA)이 에탄올 15%가 혼합된 ‘E15’ 휘발유의 여름철 판매 제한을 해제하는 등 환경 규제도 일부 완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대응책이 일부 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1970년대 1, 2차 석유 파동에 버금가는 충격파까지 거론되는 현 상황에선 단기적인 대응 방안만으론 한계가 뚜렷하단 지적이다.
이번 기름값 급등은 미국 내에서 적지 않은 정치적 파장도 낳고 있다. 에너지 가격은 유권자들이 바로 느끼는 ‘체감 물가’인 만큼 민심의 향방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꼽힌다. 트럼프 행정부의 ‘경제 성적표’는 특히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표심에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기름값 불만’이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정치 리스크 중 하나로 굳어지고 있단 분석까지 나온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미국과 이란이 내일 당장 싸움을 멈추는 데 합의해도 시장이 어느 정도 정상 궤도에 오르기까지 4개월이 더 걸릴 것”이라고 진단했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유가가 단기간에 안정되지 않는다면 소비 위축과 경기 둔화가 동시에 나타나는 ‘이중 압박’이 현실화될 수 있다”면서 “결국 이번 기름값 급등 사태는 단순한 에너지 가격 문제를 넘어 미국 경제 전반과 정치 지형까지 뒤흔드는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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