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숙련공 되려면 55년? 건설 숙련인력 가로막는 기능등급제[손끝기술의 위기]②
2026.03.29 07:00
'특급' 기준 경력 21년서 15년 낮췄지만
기준일수 일괄 적용에 효과 상쇄
기상청 자료로 '탁상 기준' 세워놓고
건설근로자공제회, 자료 숨기기 급급정부가 건설 현장 내 숙련 인력 처우 개선을 위해 내년부터 적용하는 새로운 '건설근로자 기능등급제'가 시행 전부터 역풍을 맞고 있다. 미장, 도장, 석공 등 건설현장 내 인력들은 1년 경력을 인정받기 위해 직종마다 적용되는 연간 근무 일수를 채워야 하는데, 내년부터 일괄 적용되면서 장기 근속한 숙련공조차 최고 등급인 '특급'을 받기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건설 기능등급제는 이 환산 경력연수를 토대로 현장 노동자를 초급·중급·고급·특급 4단계로 분류한다. '특급'은 15년 이상 총 환산 경력연수를 채워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일부 직종은 새로 바뀌는 기능등급제 기준으로 최대 55년을 일해야 해당 자격을 부여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숙련된 기능인에게 성장 경로를 열어 청년 유입까지 이끌겠다는 정부 구상이 시작 전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평가다.
29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국토부는 지난 1월 개정·시행한 '건설근로자의 기능등급 구분·관리 등에 관한 기준' 고시에서 '총 환산 경력연수'를 산정할 때 적용하는 기준일수를 186일로 통일했다. 기존에는 '직종별 연평균 신고일수'를 적용했지만 개정 고시에는 모든 직종 공통으로 '연간 작업 가능일수'를 넣은 것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고시상 '연간 작업 가능일수'는 186일"이라며 "쉽게 말해 자격증 등 별도 가산점이 없다면 신고일수 186일이 쌓여야 1년 경력으로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국토부가 고시를 바꾼 배경은 '특급'에 해당하는 건설인력 비중이 지나치게 커졌기 때문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경력 9년 이상 '고급'과 '특급' 비중이 전체 건설 인력의 절반에 육박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기능인을 등급별로 공사 규모에 따라 의무 배치하고, 공공부문 공사 입찰 시 사전자격심사(PQ) 점수 및 전문건설업체 설립 요건에 고용 실적을 반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정부가 연간 작업 일수를 일괄 적용하면서 이번엔 아예 '특급'을 받기가 어려운 구조가 됐다. 본지가 2000~2020년 퇴직공제·고용보험 직종별 신고일수 자료를 토대로 단순 계산(자격·교육·포상 점수 제외)한 결과 기능등급제 시행 49개 직종 가운데 6개는 누적 신고일수가 가장 많은 사례를 가정해도 특급 도달은 어려웠다.
플랜트보온 부문은 이 기간 근로 최대신고일수가 1053일이었다. 연평균 50일간 작업했다고 하면 55.6년을 일해야 '특급'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새로운 기능등급제를 적용하면 보일러는 28년, 철거와 벌목은 각각 24년과 23년을 일해야 최고등급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국토부는 "개편 전에도 특급 배출이 없는 직종이 있었다"고 했지만, 개정 전 기준으로 경력 데이터를 산정하면 모든 직종에서 특급 인원이 배출됐다. 실제 등급확인증 발급 현황으로 보면 일부 직종에서 발급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6개 직종뿐 아니라 대부분 근로자 환산경력도 삭감된다. 예를 들어 미장공이 20년간 평균 신고일수 878일을 쌓았다면 기존 기준(직종 연간 평균 81.1일)으로는 경력이 10.8년이지만 새 기준(분모 186일)으로는 4.7년만 경력으로 인정받게 된다. 정부는 특급 기준 경력연수를 21년에서 15년으로 낮추는 완화책을 이번 고시 개정에 함께 반영했지만, 분모가 186일로 일괄 상향되면서 연한 단축 효과를 상쇄하고도 남는 승급 제약이 생긴 것이다.
기상청 데이터로 만든 '일할 수 있는 날'
아시아경제가 입수한 건설근로자공제회 발주 연구용역 보고서를 보면 정부가 기준으로 세운 186일은 연구를 주관한 성균관대 산학협력단이 기상청 자료를 토대로 산출했다. 1년 365일에서 휴무일 120일과 기상 악화로 인한 작업 불능일 84일을 뺀 뒤 겹치는 25일을 더해 만들었다. 한마디로 평일 가운데 날씨 좋은 날이 연간 186일이라는 얘기다.
연구진은 기존 직종별 연평균 신고일수의 평균이 '71일'에 불과해 경력이 과다 산출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71일은 60개 직종의 연평균 신고일수를 단순 합산해 평균한 값이다. 연구진은 용역 중 건설근로자 609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근로일수가 184일로 집계돼 186일에 무게를 실었다.
2021년 제도 첫 시행에 앞서 3년간 설계 작업에 참여했던 심규범 건설고용컨설팅 대표는 "애초 기능등급제는 직종별 여건을 반영해 각 직종 안에서 상대평가 하도록 설계됐는데, '작업 가능일수'라는 허수를 만들어 모든 직종에 획일적으로 적용해버렸다"며 "상위 등급 배출을 인위적으로 막아버린 셈"이라고 지적했다. 직종별 연평균 신고일수는 철거(31.2일)에서 견출(115.6일)까지 최대 3.7배 차이가 난다.
"청년 인력 진입 막는다" 우려 목소리
현장에선 숙련인력의 과도한 경력을 줄이는 방향에는 공감하면서도 신규 인력 유입을 막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건설현장에 노령화가 진행 중인데, 청년층 유인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경기 수원시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30대 작업자는 "젊은 사람들은 직업을 선택할 때 관련 정보 검색부터 한다"며 "힘들게 일해도 경력 인정이 어렵고 성장 전망도 불분명한데, 이걸 보고 건설현장에 오겠나"고 반문했다.
전문가들은 신고일수를 일괄 적용하지 않고도 숙련인력 과다배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심규범 대표는 "직종별로 적용된 경력 기준을 최신 수치에 맞춰 주기적으로 갱신하는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도 개편 전에도 최고 등급인 '특급' 배출이 없는 직종(플랜트 분야)이 일부 존재했다는 정부 측 주장에 대해서는 "플랜트 관련 직종은 민간공사 쪼개기 발주 관행 탓에 퇴직공제 자체(공공 1억원·민간 50억원 이상만 의무가입)에서 누락되는 인력이 많아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인원 부족 문제와 186일 일괄 적용의 구조적 결함은 별개"라고 했다.
건축일반시공기능장인 김용학 한국기능장연합회 이사장은 "기존엔 역량이 부족한 인력도 기간만 채우면 쉽게 특급을 받을 수 있어 시장 신뢰를 잃었다"며 "통합 186일보다 더 나은 대안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선 제도를 시행하며 보완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국토부도 일부 직종에서 특급 승급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당사자의 이의제기가 접수될 경우 기능등급운영위원회에서 사후 조정을 거칠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열어뒀다"고 밝혔다.
건설근로자공제회는 뒤늦게 일부 직종에서 상위 등급 배출이 제한되는 부작용을 인정해 7000만원 규모의 후속 연구용역을 최근 다시 발주했다. 공제회 관계자는 "우려 사항을 인지하고 있으며 이를 보완할 연구용역을 추진 중"이라고 했다.
본지는 공제회에 186일 기준 적용 시 직종별 등급 분포 시뮬레이션 결과를 거듭 요청했으나 임원 보고 절차 등을 이유로 공개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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