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가·고환율·고물가' 중동發 퍼펙트 스톰, 우리 일상을 덮치다
2026.03.28 08:00
요소수 대란에 장바구니 물가 '초비상'…가계·기업 옥죄는 연쇄 충격
정부 25조 추경으로 진화 시도…"에너지·원자재 조달 구조 전환 시급"
점심시간 식당 메뉴판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환율이 올라 수입 식자재 가격이 뛰면서 밥값이 무섭게 오르는 이른바 '런치플레이션'(점심+물가 상승)을 겪고 있다. 퇴근 후에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물가는 오르는데 경기는 나빠지는 '스태그플레이션'을 막으려고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린 탓에 매달 갚아야 하는 주택담보대출 이자와 원금이 200만원을 훌쩍 넘었다. 설상가상으로 액화천연가스(LNG) 수입 가격이 뛰며 전기요금도 20% 가까이 올랐다. 월급은 제자리인데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사실상 매월 적자가 불가피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무력 충돌로 평범했던 가장의 일상은 전시(戰時) 상태로 내몰렸다.
이 우울한 이야기는 산업연구원(KIET) 등 여러 기관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구성한 호르무즈해협 봉쇄 장기화에 따른 충격 시나리오다. 글로벌 에너지의 대동맥인 호르무즈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중동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먹구름이 짙어지고 있다. 원유와 LNG 같은 기본 에너지 가격이 폭등하고, 반도체와 플라스틱 등을 만드는 핵심 원자재 공급까지 끊길 조짐이다. 국책연구기관들은 이 사태가 길어지면 국내 공장들의 생산비가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름값, 환율, 물가가 한꺼번에 치솟는 경제위기, 이른바 '퍼펙트 스톰'이 눈앞에 다가왔다.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이…"
사건의 발단은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가 2월28일(현지시간) 무선통신으로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려는 모든 선박에 통행금지를 경고하면서 시작됐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에 대규모 공습을 단행한 지 몇 시간 만에 나온 보복 조치였다. 당장 전 세계 에너지 시장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호르무즈해협이 막히며 세계 원유와 LNG 물동량의 약 20%가 오갈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해협 봉쇄 전날인 2월27일 종가 기준 배럴당 71.81달러이던 두바이유는 3월9일(107.55달러) 배럴당 100달러 선을 돌파했고, 봉쇄 4주 차인 3월20일에는 배럴당 134.07달러까지 급증했다. 국제유가의 주요 지표인 브렌트유도 2월27일 배럴당 72.87달러에서 3월20일 106.41달러로 상승했고, 같은 기간 서부텍사스유(WTI)도 67.02달러에서 98.23달러로 올랐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이 상황을 가리켜 "수십 년 만에 가장 심각한 석유 수급 불안 사태"라고 규정했다.
해외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곧바로 충격에 빠졌다. 한국에너지경제연구원 자료를 보면 국내에 수입되는 원유의 60% 이상이 이 해협을 통과한다.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정부는 3월13일 정유사가 주유소에 넘기는 가격 상한선을 정하는 석유 최고가격제를 30년 만에 부활시켰고, 3월24일에는 공공 부문 승용차 5부제를 시행하기로 했다.
도시가스와 전기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한 LNG 수급에도 비상이 걸렸다. 한국은 LNG 수입 물량의 약 30%를 중동에 기대고 있는데, 해협이 막히면서 가격이 두 배로 뛰었다. 아시아 지역 LNG 가격 기준인 JKM(한국·일본 마커) 지수는 2월27일 10.725달러에서 3월20일 21.705달러로 폭등했다. LNG가 국내 전기 생산의 약 30%를 차지하는 만큼, 앞으로 전기요금이 더 오를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플라스틱과 섬유를 만드는 기본 재료라 '산업의 쌀'로 불리는 나프타 공급망도 마비됐다. 국내에서 쓰는 나프타의 약 50%는 수입산이고 그중 절반이 중동에서 온다. 산업통상부 자료에 따르면, 3월20일 기준 나프타 가격은 올 초보다 99%, 한 달 전보다 65.9%나 올랐다. 업계에서는 현재 국내에 남은 나프타 재고가 겨우 2~3주 분량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나프타가 부족해지면 당장 페인트나 플라스틱 용품 등 생활물가가 오르게 된다. 실제로 노루페인트와 KCC 등은 3월23일부터 페인트 가격을 최대 55% 올리기로 했다. 페인트의 핵심 재료가 나프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불안해진 일부 소비자는 가격 상승에 대비해 위생백과 분리수거 봉투, 종량제 쓰레기봉투, 일회용 랩 등 나프타가 원재료인 생활필수품 사재기에도 나서고 있다.
화물차나 디젤차 운전자들에게 필수인 요소수 가격도 급등했다. 중동에서의 요소 수입이 막히면서 10리터당 1만원 안팎이던 가격이 최근 2만원대로 뛰었다. 하루에 요소수를 20리터가량 쓰는 25톤 대형화물차 기사들은 한 달에 40만원 넘는 추가 비용을 떠안게 됐다. 시장에서는 2021년 요소수 부족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이에 정부는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대기업들에 요소 비축 물량 개방을 요청한 상태다.
기름값이 오르니 우리 돈의 가치도 뚝뚝 떨어지고 있다. 2월27일 1466.50원이던 원-달러 환율은 3월25일 기준 1504.50원까지 오르며 과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름값과 환율이 함께 오르면 결국 모든 물가가 덩달아 뛸 것이라고 경고한다. 물가가 계속 오르면 한국은행은 이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1970년대 오일쇼크 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금리를 20%대까지 올리는 충격 요법을 썼다.
안 그래도 기름값과 물가가 비싼데 대출 이자까지 오르면 서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진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가계와 기업이 진 빚은 각각 1978조원과 2026조원에 달한다. 금리가 단 0.25%포인트만 올라도 온 국민과 기업이 내야 할 이자가 1년에 수조원씩 늘어나게 되는 상황이다.
'산업의 쌀' 반도체에 필수인 가스까지 뚝
서민들이 겪는 타격이 이제 막 시작되는 단계라면, 산업 현장의 기업들은 이미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당장 정유 업계가 직격탄을 맞았다. SK이노베이션, 에쓰오일(S-Oil), GS칼텍스, HD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 4사는 원유 수급 불안정과 해상 물류비 상승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위험해진 호르무즈해협을 오가는 배들의 운임과 보험료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정유사들은 중동을 피해 다른 곳에서 기름을 사오려고 애쓰고 있지만, 이에 따른 선박 비용이 천문학적이라 팔아도 남는 게 없는 상황이다.
바다와 하늘로 물건을 실어나르는 물류사들도 괴롭다. HMM 같은 주요 해운사들은 위험한 호르무즈해협을 피해 아프리카 희망봉을 빙 돌아오는 먼 길을 택하고 있다. 운항 일수가 늘어나니 연료비는 더 들고 물건을 나르는 횟수는 뚝 떨어졌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등 항공사들도 연료비 인상으로 고통을 받을 뿐 아니라 중동 하늘길을 우회하느라 유류비 부담이 커지고 있다. 물류가 제때 움직이지 못하면서 자동차나 가전제품을 수출하는 기업들은 납기 지연에 따른 벌금을 물어야 할 처지다.
여파는 한국을 먹여살리는 반도체 산업에까지 미치고 있다. 반도체를 만들 때 꼭 필요한 가스인 헬륨 수급에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난해 기준 전체 헬륨 수입 물량의 약 64.7%를 호르무즈해협을 거쳐 카타르에서 들여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은 미국과 호주 등으로 헬륨 조달처를 긴급 다변화하고 재고 비축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나프타를 주원료로 쓰는 석유화학 기업들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한화솔루션, LG화학, 롯데케미칼, 여천NCC 같은 기업들은 최근 고객들에게 원료 부족으로 물건을 못 만들어줄 수도 있다고 미리 알렸다. 이들 공장은 현재 기계를 멈추지 않을 정도인 50~70% 수준으로만 겨우 돌아가고 있다. 앞으로 나프타 재고가 아예 바닥나면 공장 문을 닫아야 하는 셧다운이 불가피하다.
"유가 150~180달러 수준까지 오를 수도"
해협 봉쇄가 장기화할 경우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산업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미국-이란 충돌과 호르무즈 리스크: 공급망 시나리오 분석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해협 차단이 3개월 이상 이어지면 유가는 150~180달러 수준으로 뛰고, LNG 가격도 최대 200% 폭등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렇게 되면 공장을 돌리고 전기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80% 가까이 뛴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전체 산업의 평균 생산비는 9.4%, 제조업은 11.8%나 오르게 된다. 기업이 부담하는 비용 증가는 결국 소비자물가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기업들은 현재 원자재를 언제, 얼마에 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3U'(불안정·불확실·예측 불가)의 캄캄한 늪에 빠졌다. 이 때문에 주요 대기업들은 올해 세워둔 사업계획을 전면 보류하고 현금을 최대한 쥐고 있는 비상경영 체제로 돌아섰다. 재계에서는 기업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만으로는 이 위기를 넘을 수 없다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외교·정책적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도 해협 봉쇄에 따른 실물경제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당·정·청은 3월22일 25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하기로 합의했다. 민생 안정과 중동발 공급망 마비로 어려움을 겪는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정부는 '경제 전시' 상황임을 감안해 4월10일 국회 본회의 처리를 목표로 속도전에 돌입했다. 산업통상부는 에너지 수급 비상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중동에 편중된 에너지 수입 경로를 북미와 호주 등 비(非)중동 지역으로 다변화하는 게 주된 목표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그동안 반복돼온 지정학적 리스크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에너지 전환과 원료 조달 다변화 등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빙현지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에너지 전환 정책이 원료 조달 다변화 전략과 연계되지 않을 경우 에너지원만 바뀔 뿐 중동 의존 구조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며 "에너지 전환과 원료 조달 구조 다변화 전략을 함께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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