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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서 멀어지고 죽음은 잊고… 갈 길 잃은 중세의 초상

2026.03.28 03:06

[신학자의 미술관 산책] 한스 홀바인 ‘대사들’
홀바인 ‘대사들’(1533), 오크판넬에 유채, 207×209.5㎝, 내셔널갤러리, 런던. 위키미디어 커먼스

우리는 대체로 정면을 바라본다. 곧게 서 있는 것, 질서 있게 놓인 것, 이해 가능한 것들 속에서 안정을 느낀다. 그래서 세계가 잘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시대가 정면으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엔 이미 균열이 진행되고 있는 시대가 있다. 겉은 견고해 보이지만 중심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시간. 16세기가 그랬다. 지식은 확장됐고 세계는 넓어졌다. 천문학은 하늘을 계산했고 지리학은 바다를 건넜으며 예술은 인간을 새로운 중심에 세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모든 성취는 인간을 오히려 더 흔들리게 했다.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기준은 점점 흐려졌고 교회는 여전히 권위를 말했지만 더이상 신뢰를 주지 못했다. 정치는 신앙을 이용했고 신앙은 그 안에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발전하고 있었지만 정작 중심은 사라지고 있었다.

이 보이지 않는 균열을 한 장의 그림으로 붙잡아 낸 화가가 있다.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대사들(The Ambassadors)’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정치 종교 지성의 충돌 한가운데서 변화하는 시대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화려한 녹색 비단 커튼을 배경으로 2단 선반 탁자 양쪽에 두 남자가 서 있다. 왼쪽은 영국 주재 프랑스 대사 댕트빌로 홀바인에게 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주문한 당사자다. 오른쪽은 댕트빌의 친구이자 프랑스 왕의 밀서를 들고 찾아온 조르주 셀브이다.

헨리 8세의 결혼 문제는 유럽 질서를 뒤흔드는 정치적 사건이었다.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을 원했지만 교황은 이를 거부했다. 이 거절은 단순한 교회법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왕권과 교황권, 국가와 신앙의 충돌이었다. 결국 왕은 로마와 결별하고 앤 불린과 결혼한다. 그리고 영국 교회를 스스로의 손에 두는 길을 택한다.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는 이 균열 앞에서 침묵할 수 없었다.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영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도, 그렇다고 교황을 정면으로 거스를 수도 없는 미묘한 위치에 있었다. 이때 조르주 셀브가 밀서를 들고 댕트빌을 찾아온다. 밀서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밝혀진 게 없지만, 그림에 등장하는 상징으로 보아 헨리 8세의 결혼을 두고 가톨릭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영국과의 외교를 유지함과 동시에 종교개혁의 확산에 대한 우려 등이 담긴 것으로 추정된다.

댕트빌은 영국 궁정 화가였던 홀바인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한다. 흰 담비 털로 만들어진 망토는 그의 신분을 말해 주고, 탁자 위에 가볍게 얹힌 손에서는 당당함이 느껴진다. 홀바인은 댕트빌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칼집 한구석에 그의 나이를 의미하는 ‘29’라는 숫자를 새겼다. 오른쪽 조르주 셀브는 가톨릭 주교로 20대에 종교계 거물로 성장한 프랑스 교단의 실세다. 셀브의 오른팔 밑에 깔린 책에 적힌 숫자 ‘25’로 나이를 확인할 수 있다.

홀바인의 치밀하게 계산된 알레고리 묘사는 가운데 탁자에 놓인 갖가지 물건에서 절정을 이룬다. 2층 선반에는 천구의가 놓여 있고 그 곁에는 원통형 휴대용 해시계와 황동으로 만든 사분의, 그리고 또 다른 해시계들이 진열돼 있다. 모두 하늘을 관찰하기 위한 기구들이다. 아래쪽에는 지구본과 수학책, 류트, 찬송가 같은 지상을 위한 물건들이 있다. 류트 앞에는 비텐베르크에서 출간된 마르틴 루터의 찬송가가 펼쳐져 있다. 끊어진 류트 줄은 종교적으로 화합을 이루지 못한 시대상을 보여준다. 펼쳐진 수학책은 나눗셈 페이지에 멈춰 있다. 분열된 시대를 묘사한다.

이 그림에서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그림 중앙 아래 해골과 왼쪽 커튼 상단 뒤 숨겨져 있는 십자가이다. 이 둘은 그림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이면서 동시에 이 시대를 꿰뚫는 신학적 선언이다. 왼쪽 위에 무심히 드리워진 커튼 뒤에 작게 드러난 십자가가 있다. 그것은 중심에 있지 않다. 의도적으로 가려져 있다. 이 배치는 단순한 구도가 아니다. 십자가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더이상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지 않은 16세기의 영적 상태를 드러낸다. 교회는 여전히 십자가를 말하지만, 십자가는 권력과 제도, 그리고 인간의 계산 뒤로 밀려나 있다.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가려졌다.

화면 중앙 아래 길게 늘어진 형태로 놓인 해골은 정면에서는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시선을 비틀어 옆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또렷한 해골로 드러난다. 이 기법은 애너모포시스(anamorphosis·왜상)이다. 홀바인은 원근법의 극단적 형태를 이용해 그림 속에 해골을 숨겼다. 당시 해골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삶을 성찰하기 위해 사용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나타내는 오브제이다. 죽음은 그 자리에 분명히 있지만 올바른 시선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다.

왜곡된 이미지는 인간의 시선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 서 있고 같은 시대를 살며 같은 문제를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시선 위에 있다. 시간과 우주를 측량하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현실은 정면에서 보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이 작품은 보여준다. 인간은 천구의로 하늘을 계산하고 해시계로 시간을 측정하며 지식과 권력을 손에 쥐고 있지만 정작 가장 분명한 사실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여전히 보이는 질서 속에서 안정을 찾고 익숙한 시선으로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중심이 흔들린 시대는 정면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시선을 바꾸지 않으면 본질은 끝내 드러나지 않고, 분열의 한가운데서도 우리는 무엇을 붙들어야 할지 놓치기 쉽다. 십자가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삶의 중심에서 밀려났을 뿐이며, 삶을 결정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무엇을 중심에 두는가이다.

라영환 총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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