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금리결정·물가관리에 머물지 않는 ‘능동적 한국은행’ 전망
2026.03.25 18:54
신현송 국제결제은행(BIS) 통화경제국장이 차기 한국은행 총재로 내정되면서 한은이 어떻게 변화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중동 리스크와 미국의 금리 동결이 겹치면서 신임 한은 총재 앞에는 고환율·고물가·고금리라는 난제가 산적해 있다. 통화정책과 금융안정의 사령탑을 맡게 될 신 후보자의 경제 철학이 주목받는 이유다.
25일 신 후보자가 BIS에 재직하며 2014년 6월부터 지난 3월까지 단독 혹은 공동으로 작성한 연설문(speech) 원고 91건을 전수조사한 결과, 그가 구상하는 이상적인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결정하고 물가를 관리하는 기관에 그치지 않는 것으로 분석된다. 오히려 외부의 금융 충격을 선제적으로 포착하고, 시장 전반의 위험을 점검하며, 향후 어떤 결제 시스템이 필요한지 고민하는 능동적인 기관에 가까워 보인다.
이창용 총재 시기 한은은 저출생·교육·노동시장 같은 사회구조 개혁까지 발언 범위를 넓혀왔다. 반면 신 후보자가 이끌 한은은 경제 영역 내부에 집중하며 금융 변수와 시스템 변화 등에 방점을 찍을 가능성이 높다.
금리보다 ‘경제 흐름’ 주목 중앙은행
신 후보자의 연설을 종합하면 금리만으로는 경제 전반을 온전히 진단할 수 없다는 인식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는 환율이 수출입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금융시장에도 파급되는 ‘금융 채널’로 작동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2017년 4월 국제통화기금(IMF) 콘퍼런스). 고환율을 ‘달러 부채가 큰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상정한 것이다.
그는 외환위기의 핵심 취약 요인으로는 통화 불일치와 만기 불일치를 지목했다(2017년 5월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 고위급 라운드테이블). 원화로 수익을 내면서 달러로 빚을 지거나, 단기로 조달한 자금을 장기로 운용하는 기업 구조가 특히 위기 상황에 취약하다는 논리였다.
신 후보자의 이런 시각은 2022년 이후 강달러 국면을 해석하는 대목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가파른 금리 인상과 긴축 기조 속에서 빚어진 달러 강세 현상이 시장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는 “이번 강달러는 세계 금융조건을 동시에 조이는 충격”이라고 진단했다(2022년 11월 블룸버그 인터뷰). 이듬해 3월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회의에서는 “달러의 힘은 경상수지가 아니라 자금조달 통화 역할에서 나온다”고 설명했다. 전 세계 금융기관과 기업이 달러를 빌리고 운용하는 구조 자체가 글로벌 금융시장을 움직이는 핵심축이라는 의미다.
이런 기조로 미뤄볼 때 신 후보자 취임 이후 한은은 기준금리 못지않게 대외 금융여건 변화를 중시할 가능성이 크다. 물가 관리에 더해 미국 금리와 달러 흐름, 환율 같은 외부 충격이 국내 금융조건에 미치는 영향을 점검하는 본래의 역할도 한층 강조될 수 있다. 최근 중동 리스크로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넘나드는 시국의 흐름을 읽어보면 신 후보자의 경제철학과 맞닿아 있다.
은행 밖 위험까지 보는 중앙은행
신 후보자 연설에는 금융위험을 은행만의 문제로 보지 않는 관점이 확연히 담겨 있다. 그는 2016년 4월 ‘유동성 정책과 운용(Liquidity Policy and Practice)’ 콘퍼런스에서 “시장 유동성과 자금조달 유동성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시장 불안의 원인을 거래 위축이 아니라 자금조달 경색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해 11월 런던정경대(LSE) 강연에선 2007년 금융위기를 회고하며 “겉으로는 은행 위기처럼 보이지만 실제 균열은 시장의 부채 축소에서 시작됐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신 후보자는 지난해 5월 찰스 굿하트 기념 강연과 6월 BIS 연차총회 연설에선 “금융의 무게중심이 은행에서 비은행 금융기관과 시장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은행 대출이 금융의 중심이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국채와 채권시장, 보험사, 연기금, 자산운용사의 영향력이 훨씬 커졌다는 것이다. 그는 외화 조달 구조와 외환스와프 시장 역시 중요한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결국 신현송호 한은은 은행 건전성을 넘어 채권시장과 부동산 금융, 비은행권 자금 흐름, 외화 조달 구조까지 함께 점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가계부채 규모가 크고 자금시장 변동성이 높은 한국 경제에선 은행권만으로 금융 불안의 신호를 포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돈의 미래를 설계하는 중앙은행
신 후보자는 중앙은행이 발권기관이 아닌 금융 인프라를 설계하는 주체라는 취지의 발언을 여러 차례 해 왔다. 그는 “중앙은행은 신뢰의 토대를 제공하고 민간은 그 위에서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2021년 BIS 연차총회 연설). 중앙은행이 돈을 찍고 푸는 데 그치지 않고 돈이 움직이는 기반 자체를 설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인식은 2022년 BIS 연차총회 연설에서 더 분명해졌다. 그는 테라·루나 코인 사태를 언급하며 “중앙은행 화폐라는 명목 기준점(nominal anchor)의 필요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 민간 화폐만으로는 신뢰를 유지하기 어렵고, 결국 화폐 질서의 기준은 공적 화폐가 맡아야 한다는 의미다.
신 후보자의 시야는 점차 통화정책을 넘어 화폐와 금융 인프라의 미래로 확장해 왔다. 그는 2023년 BIS 연차총회에서 “토큰화는 통화 시스템의 다음 단계”라며 금융자산의 거래·결제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2024년 미국 통화감독청(OCC) 심포지엄에선 현실 자산의 토큰화가 발행과 유통, 결제 구조를 바꾸며 금융 인프라 재편을 불러올 수 있다고 짚었다.
같은 해 BIS 연차총회에서는 인공지능(AI)이 중앙은행의 분석 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문제의식도 드러냈다. AI가 각종 데이터를 더 신속하게 분석하기에 정책 판단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신 후보자가 총재가 되면 한은은 디지털 원화와 지급결제 시스템, 토큰화, 데이터 기반 정책, 인공지능 활용까지 함께 고민할 것으로 보인다. 한은은 이미 ‘한강 프로젝트’ 등을 통해 중앙은행 기반 디지털 화폐 체계 구축을 검토하고 있는 만큼 관련 논의에도 속도가 붙을 수 있다.
돈의 기준을 만드는 중앙은행
신 후보자는 2023년 BIS 연차총회에서 “중앙은행은 통화 시스템의 토대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디지털 화폐, 민간 코인, 플랫폼 결제가 빠르게 확산하는 시대일수록 무엇이 ‘기준이 되는 돈’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담긴 발언으로 읽힌다.
그는 91건의 연설에서 금리 자체보다 금융 흐름을 읽어야 하고, 은행권 밖으로 확산하는 위기 요인을 점검해야 하며, 새로운 통화 환경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일관되게 강조해 왔다. 그러면서 중앙은행이 금리만 결정하는 게 아니라 금융 시스템의 질서를 설계하고 떠받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향후 신 후보자 체제의 한은 역시 불안정한 금융환경 속에서 한국 경제가 신뢰할 수 있는 돈과 통화의 기준을 어떻게 세울지에 정책 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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