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만세" 실수로 징역 10년... 좌익수 고문 주도자로 변신한 남자
2026.03.23 18:11
"친애하는 애국 시민 여러분!"
160cm의 단신 신형식은 단상에 올라 웅변을 시작했다. 무심천 광장에는 시민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휴전협정 반대 시위의 열풍이 청주에도 상륙한 것이다. 자유당을 비롯한 공무원들과 반공 단체가 총동원돼 시민들을 동원했다.
단상에 오른 자유당 충북도당 부위원장 신형식은 달변가이며, 시민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명연설가였다. 그는 휴전협정과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 방식과 관련해 평소 지니고 있던 불만을 터뜨렸다.
"김일성 장군 만세"
"우리는 UN에 대하여 하나도 고마워할 것이 없습니다. (중략) 우리 농토를 황폐화시켜 놓고 썩은 밀가루를 갖다 주는 것이 고맙습니까?"
그는 이어서 독설에 가까운 연설을 했다.
"개가 주인으로부터 찬밥덩이나 얻어먹을 적에는 주인을 따르지만 주인이 개를 잡아먹으려고 노끈으로 목을 매달 때는 그 유순하던 개도~ 눈에서 불이 번득이면서 최후발악과 반항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다음 발언이다.
"이박사(李博士)께서는 너무 고령하시고 노쇠하여 장래가 우려됩니다."
즉, 이승만 대통령이 너무 늙었기 때문에 후계자를 준비해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이었다. 그는 결론으로 민족청년단(족청) 최고지도자 출신인 이범석 장군의 뒤를 따르자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전혀 엉뚱한 말이 나왔다.
"영웅적인 지도자 김일성 장군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무심천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시민은 웅성거렸다. 단상 바로 아래 있던 청주경찰서 사찰과 형사들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1953년 6월 25일 북진통일위원회 충북지부(지부장 신형식)가 주최한 '6.25 기념 충북시민대회'는 이것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대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일부 흥분한 군중이 단상으로 뛰어들어 "빨갱이 새끼"라고 했지만, 사찰과 형사들이 제지했다. 행사장은 마치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되었고, 집회는 곧바로 해산되었다(<동아일보> 1953년 6월 29일, 7월 11일 자).
| ▲ 신형식 망언 사건 신형식 망언 사건 기사 |
| ⓒ <동아일보> 1953년 7월 1일자 |
시민이 모인 공개적인 자리에서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친 것은 그것이 비록 실수라 하더라도 현장 체포 대상이었다. 청주경찰서 사찰과 김동수는 신형식을 연행했다. 신형식은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내가 미쳤지. 미쳤어"를 반복해 외쳤다.
청주지방법원에서 신형식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청주지방법원장 문귀선 판사가 주심을 맡고, 법조계 거물인 서울의 신태악 변호사와 여러 명이 신형식의 공동 변호인이 되었다. 그런데 청주에서는 공동 변호인단에 포함된 변호사는 없었다.
신형식과 변호인은 망언이 단순한 실수였음을 수차례 강조했지만, 극단적 반공주의 체제 하에서는 그런 말이 용납될 수 없었다. 1심에서 구형은 사형이었다. 신형식의 전·현직 경력을 봤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최종 7년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충북 지역의 언론뿐만 아니라 전국 중앙지에도 1면 기사로 실렸다.
하지만 대법원에서는 10년을 선고해 1심보다 높은 형을 선고했다. 확정 판결을 받은 후 그는 보따리를 싸 전주형무소로 향했다(박만순, <기억전쟁>, 2018).
| ▲ 신형식 사형 구형 신형식 사형 구형 기사 |
| ⓒ 동아일보 1953년 12월 1일자 |
휴전 반대 집회와 여고생 혈서
"우리는 휴전이 아니라 죽음을 원한다."
머리카락이 뾰족 서는 구호를 외치는 이는 상이군인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반공 교육을 받고 '휴전협정 반대 집회' 때 연설자로 뽑힌 여고생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여고생들이 혈서로 북진을 호소한 일은 1953년 6월 20일 청주에서 있었다.
여고생은 심지어 면도칼로 손끝을 그어 혈서를 쓰기도 했다. 여고생이 혈서를 쓰자 대회장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너도나도 혈서를 쓰기 위해 줄을 섰다. 대부분 학생과 청년이었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휴전협정을 앞둔 시기에 대한민국 전역에서 벌어진 풍경이었다.
| ▲ 휴전회담 반대시위 서울 덕수궁 앞에서 열린 휴전 회담 반대 시위 |
| ⓒ 우리역사넷 |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 시민들 몰래 대전을 경유해 부산으로 도망간 이승만은 수복 후 여름 난리에 피난 가지 않은 국민들을 부역자로 규정해 처벌했다. 사법 처벌을 받지 않았을지라도 피난 가지 않은 이는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여름 난리 때는 낙동강에서 전선이 고착화되더니,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고착화된 것은 3.8선 부근이었다. 이곳에서 실익 없는 전투가 2년여 기간 벌어졌다.
애초에 한반도 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남·북 모두에게 상처와 고통만을 안겨주었다. 전투에 참가한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 수가 훨씬 많았다.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허무한 죽음을 당할 가능성이 커졌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은 하루아침에 박탈될 위기에 처해졌다.
특히 UN군의 공중전에 당해낼 여력이 없던 북한이 느낀 위기의식은 남한보다 컸다. 이런 상황에서 중·조 연합군의 휴전협정 제안이 있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6월 30일 중공군의 완전 철수, 인민군의 무장 해제, 한국 문제에 대한 국제회의에 한국 대표의 참석 등 5개 안을 휴전협상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후 그는 5개 안의 조건을 계속 주장하면서 이에 부합하지 않으면 어떠한 휴전안도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북한군 무장 해제, 중공군 완전 철수 등은 휴전협상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수 있는 일방적 주장이었으므로, 워싱턴의 누구도 이승만과 협상은커녕 그를 설득하려 들지도 않았다. 미국은 휴전협상에서 한국 정부를 무시하고 배제했다. 휴전협정은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된 지 2년 만인 1953년 7월 27일에 이루어졌다.
이렇게 휴전협상이 지연된 것은 한국 정부의 반대도 하나의 원인이었지만, 휴전 반대 운동은 실제로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이 송환 거부 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시킨 후 협정이 조인된 7월까지 약 1개월 정도 영향을 미쳤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왜 그토록 휴전을 반대했을까? 한국 정부는 휴전을 전쟁 전의 불안한 상황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휴전 후 군사적 안전 보장과 경제 원조 등을 요구하면서 휴전을 반대했다.
국민들도 수많은 인명과 재산 손실을 겪고서 그 화근인 북한 정권이 존재하는 한 재건과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이왕 전화(鞠禍)를 입게 되었으므로 장래 북한으로 하여금 재침략의 기회를 주느니, 차라리 무력으로나마 통일이 되기를 바랐다(조성훈, <왜 이승만은 휴전협정에 반대했을까?>, <내일을 여는 역사>, 2005).
어쨌든 이승만은 한국전쟁을 기화로 한·미·일 군사동맹과 미국의 대한 경제 원조를 끌어내려 했다. 또한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이 대거 당선돼, 대통령 재선에 빨간불이 켜진 상황에 대해 정치적 반전을 꾀했다.
결국 한국전쟁으로 인한 최대의 정치적 수혜자는 이승만이었다. 대신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 인권은 무한정 폐기되었다. 당시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매국노이자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전향 공작의 행동대장
1956년 어느 날 갑자기 '국가보안법', '국방경비법' 위반자에 대해 전향서를 쓰라는 쪽지가 감방 안에 돌았다. 그날 이후로 정치범에게는 출역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악몽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정치범들을 '감옥 안의 감옥'에 한 명씩 불렀다. 이곳은 전주형무소장의 재가를 받아 신형식이 정치범들을 전향 공작하기 위한 특별 감방이었다.
당시 정치범의 절대다수는 한국전쟁기에 빨치산 활동을 하거나 북한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좌익수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좌익수를 고문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빨갱이들을 죽여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별 감방에 끌려간 정관호(1925~2023)에게 신형식이 "당신이 주동이 되어 인민공화국 재건하려는 거 아냐?"라고 다그쳤다. 황당무계한 얘기였다.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정관호에게 돌아온 건 매였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매타작을 받은 후 본격적인 고문이 시작되었다.
양발과 손을 묶고 그 사이에 나무를 끼웠다. 그러면 사람이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다. 이른바 '통닭 구이 고문'이다. 이어서 수정(수갑)을 채우고, 입을 틀어막고 곡괭이로 두드려 팼다. 고문이 끝난 후에는 수갑을 채워 먹방(징벌방)에 가두었다. 영화 <1987>에서 나온 장면과 같은 모습이다.
고문은 정관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좌익수 200명을 대상으로 매일 진행되었다. 특별 감방은 전주형무소 내 감방 하나를 비우고 신형식이 상주하면서 고문을 진두지휘한 곳이다.
직접 고문을 가한 이들은 전직 형사나 깡패로, 소위 '경비'라고 불렀다. '경비'는 형무관(현재의 교도관)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 '경비'가 정치범을 고문하는 악역을 맡았다. 신형식의 '전향 공작'으로 많은 좌익수들이 전향했다. 이 전향 공작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 최초의 전향 공작이다.
흔히 전향 공작하면 박정희 정권 시절 제정된 사회안전법과 연동해서 생각하게 된다. 1974년 '7·4 남북공동성명서' 발표 이후 대한민국에 좌익수가 없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 전국의 형무소에서 좌익수에 대한 대대적인 전향 공작을 전개했다. 하지만 신형식은 20년 일찍 '전향 공작'이라는 명분하에 구타와 고문 등 반인권적인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정관호는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파킨슨병에 시달렸다. 온몸에 마비 증세가 오고, 청각을 거의 잃었다. "당시에 곡괭이 자루로 머리를 맞은 것이" 주요 병인(病因)이다. 정관호는 감형으로 1960년에 석방되었지만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불가능했다.
변신의 귀재
"김일성 장군 만세" 발언으로 만 9년간의 교도소 생활을 한 신형식은 어떤 인물인가? 1910년 충북 청원군 가덕면 병암리 출생인 그는 일제강점기 만세운동에도 참가하고, 1932년 적우연맹 사건으로 징역 5년을 복역했다.
석방 후 <조선일보> <중앙일보> <만주일보> 기자를 역임했다. 해방 후에는 근로인민당 충북도당 부위원장을 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충북지부 선전부장을 맡기도 했다. 1949년 9월 전향한 뒤 그해 12월 결성된 충북국민보도연맹 간사장을 맡았다.
그가 독려해 가입한 충북 지역 국민보도연맹원 4000여 명이 한국전쟁 초기에 죽음의 골짜기로 끌려갔을 때, 그는 청주지검장의 보호 아래 보은을 거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보은에서 충북경찰국장이 마련한 술파티에서 신형식이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있을 때, 한 청년이 곤경에 처했다. 보은 장신리에서 헌병이 피난민 대열에서 오열(간첩)을 색출한다며 몸수색을 할 때였다. 홍관의라는 청년의 양복 주머니에서 보도연맹 간사장 신형식의 명함이 나왔다. 헌병이 홍관의를 처형하려고 했다. 이때 언론인이자 정치인인 홍원길이 홍관의를 적극 변호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신형식은 피난지 부산에서 권총을 차고 다니며 CIC 문관 활동을 했다. 수복 후부터 망언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까지 그는 자유당 충북도당 부위원장과 중앙당 징계위원장을 맡았다. 복역 후에는 <충청일보> 논설위원과 광주 광덕학원 이사를 역임했다. 변신의 귀재, 신형식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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