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부자’ 삼전닉스…예금한대도 국내 은행 ‘NO’ 왜?
2026.03.23 21:01
대기업 달러 자금 국내 회귀하는데
자본 시장에 반도체 머니가 돌기 시작했다. AI 혁명 덕분이다. 덩달아 정부 요청으로 해외에 머물던 대기업 달러 자금이 국내로 회귀하고 있다. 이 와중에 눈길 끄는 건 시중은행 태도다. 일부 지점은 “대규모 예금은 못 받겠다”는 입장이다. 쌍수를 들어 환영할 듯하지만 속사정은 왜 이리 복잡할까.
반도체 머니 왜 갈 곳 잃나?
대규모 자금 국내 유입은 지난해 말 정부 환율 방어 대책에서 비롯됐다. 당시 원달러 환율 상승으로 외환 시장 변동성이 커지자 정부는 시중에 달러 공급을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주요 대기업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소집해 해외에 보관 중인 달러 예금, 이른바 파킹자금을 국내로 송금해줄 것을 당부했다. 이에 따라 수출 대기업이 보유하던 달러 자산 상당액이 원화로 환전돼 국내 금융 시장으로 유입됐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현금·현금성 자산 합계액은 160조원에 달한다. 삼성전자 현금성 자산은 125조8471억원으로 전년 대비 11.7% 증가했다. SK하이닉스 역시 2024년 말 14조원에서 지난해 말 34조9423억원으로 2배 이상 늘었다.
과거 수출 대기업은 현지 공장 투자나 경쟁사 인수합병(M&A) 수요에 즉각 대응하기 위해 유동자금을 해외에 보관했다. 미국 등 주요국 금리가 한국을 웃돌 때는 이자 수익 면에서도 해외 예치가 유리했으며 세제 혜택 요인도 작용했다. 2024년 말 기준 삼성전자 한국 본사 현금 보유액은 12조원 수준이었으나 해외 법인 금고에는 100조원가량 자금이 비축돼 있었다. 하지만 정부 환율 대책에 발맞춰 이 자금이 국내로 회귀하면서 대규모 대기 자금이 형성됐다.
상식선에서 은행은 큰돈이 들어오면 환영해야 마땅하다. 은행은 예금자에게 받은 돈을 기업이나 가계에 대출해주고 그 이자 차이(예대마진)로 돈을 번다. 큰돈이 들어오면 그만큼 대출 규모를 키워 이익을 낼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한 대기업이 은행에 10조원을 맡기며 연 2% 이자를 요구한다고 가정하자. 은행은 1년에 2000억원 이자를 기업에 내줘야 한다. 은행이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이 10조원을 다른 곳에 연 3%나 4% 이자로 빌려줘 3000억~4000억원 수익을 내야 한다.
문제는 현재 시중은행이 이 막대한 돈을 굴릴 창구가 막혀 있다는 점이다. 지난 수십년간 은행의 가장 확실한 돈줄이었던 가계대출은 정부 고강도 부동산 대책과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등 규제로 가로막혔다. 주택담보대출 문턱이 높아지면서 은행은 예금을 받아도 대출로 내보낼 곳을 찾지 못한다. 돈이 은행 창고에 쌓여만 있으면 은행은 꼼짝없이 기업에 이자만 물어줘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출 제약이 걸린 상태에서 대규모 자금이 들어오면 은행은 이자 수입보다 이자 비용이 더 클 수 있어 기업이 예금 대신 채권 시장 참여를 검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기업 자금 성격도 은행이 주저하게 만든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자금은 노후 대비용으로 묶어두는 개인 적금과 다르다. 공장 증설이나 반도체 장비 구매 등 투자 일정에 따라 수시로 빼갈 수 있는 단기 자금이다. 만약 은행이 이 돈을 다른 기업에 3년 만기로 대출해줬는데 삼성전자가 3개월 뒤에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면 은행은 자금 경색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시중은행은 방어막을 이미 5년 전부터 쳐놨다. 기업 규모에 따라 정기예금 한도를 100억~500억원 수준으로 제한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거액 예금에 주던 우대금리도 없앴다. 일부 은행은 대기업 법인 정기예금 금리를 0%대로 낮추는 방안까지 검토하며 사실상 예금 사절 의사를 내비친다. 돈을 보관해주는 대가로 수수료를 받는 마이너스 금리 시대가 한국에서도 펼쳐질 조짐이다.
삼성전자 12년 만에 채권 시장 ‘큰손’
시중은행 예치가 막힌 반도체 기업 유동자금은 자본 시장, 특히 채권 시장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우량 채권은 원금 손실 위험이 적고 은행 예금보다 수익률이 높으며 상시 현금화가 가능해 대기업 단기 자금 운용처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최소 2조원 규모 회사채 투자를 준비하며 자산운용사 선정 작업에 돌입했다. 은행 예금 대신 만기 3개월 이내 AAA등급 특수은행채와 시중은행채를 매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특수은행채는 산업은행이나 기업은행 등 국가 신용도를 확보한 국책은행이 발행해 안정성이 높다. 시중은행 단기 예금 금리가 연 2%대 초반인 데 반해 특수은행채 수익률은 연 2.7~3%에 달한다. 지난해 설비투자에 52조7000억원을 집행한 삼성전자는 자금 유동성을 유지하면서 수익을 낼 수 있는 단기 채권을 대안으로 선택하는 분위기다.
삼성전자가 이렇게 채권 시장에 직접 매수자로 나서는 일은 현금 보유액이 60조원을 돌파했던 2014년 3000억원 규모 국고채 매입 이후 12년 만이다.
SK하이닉스 역시 최근 증권사 특정금전신탁(신탁)과 채권형 랩어카운트 등에 1조원 자금을 예치했다.
은행 계속 고객 뺏길까
부동산 담보 길들여진 전당포식 영업 한계
수출 대기업이 번 막대한 현금을 국내 은행이 소화하지 못하는 상황은 한국 금융 산업의 취약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국내 은행은 지난 20여년간 아파트를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주는 주택담보대출 영업에 안주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은행이 이자 수익에만 매달려 금융 기법이 발전하지 않는 전형적 후진국 금융 구조”라며 “미국 은행이라면 채권 매입이나 투자, 새 금융상품 개발에 나섰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문제는 반도체 호황으로 대기업 금고가 더 넉넉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증권가는 올해 삼성전자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4배 이상 늘어난 200조원에 육박하고 현금 보유액은 연말 215조원, 2027년 말 278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그런데 이 자금을 국내 생산 투자로 연결할 다리가 약하다는 점은 계속 논란이 될 전망이다. 미국 역시 자국 글로벌 기업의 해외 파킹자금을 본국으로 부르기 위해 세제 혜택을 줬지만 다른 규제로 성과가 크지 않다. 전문가들은 한국도 이런 미국 사례를 벤치마킹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용진 교수는 “은행의 운용 능력 한계 이면에는 규제가 있다”며 “선진금융 기법을 자유롭게 도입할 수 있는 여건 마련이 절실할 때”라고 말했다.
[박수호 기자 park.suho@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52호(2026.03.25~03.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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