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만 울린 ’왕사남’...영화가 OTT에 맞서는 전략 [허태윤의 브랜드스토리]
2026.03.22 10:00
눈물을 지켜낸 위기 관리...영월로 간 관객의 마음
그런데 나는 이 숫자 앞에서 한 가지 질문이 먼저 떠올랐다. 1300만명은 도대체 왜 울었을까. 극장을 나오던 관객들의 표정을 떠올려보라. 눈이 충혈된 중년 남성,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20대 여성, 엄마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아이. 역사책 속 단종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결말을 뻔히 알면서도 끝내 울었다. 그 눈물은 그냥 흘러나온 것이 아니다. 누군가 치밀하게 설계한 브랜딩 전략이 심장에 닿은 순간, 비로소 터진 것이다.
마케팅에서 페르소나(Persona)는 브랜드의 인격을 상징하는 대표 캐릭터다. 코카콜라의 북극곰, 미쉐린의 뚱뚱한 타이어 인간처럼. '왕사남'이 선택한 페르소나는 다름 아닌 장항준 감독 본인이었다. 기존 한국 영화 마케팅은 감독의 '작품성'이나 '예술적 깊이'를 홍보한다. 봉준호라면 사회적 메시지를, 박찬욱이라면 미학적 완성도를. 그러나 장항준은 달랐다. TV 예능과 라디오에서 쌓아온 '친구 같은 아저씨' 이미지를 브랜딩의 핵심 자산으로 활용했다. 관객들은 이 영화 앞에서 방어막을 내려놓았다. 거장의 작품을 감상하러 간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러 간 것이다. 그렇게 열린 마음 속으로 단종의 슬픔이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그는 천만 돌파 이후 영화 시장을 먹자골목에 비유하며 “한 집만 번성하는 건 그 골목에 좋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경쟁자를 깎아내리는 대신 동료를 챙기는 이 한마디에, 관객들은 영화 밖에서도 다시 한번 마음이 움직였다. 또 천만 돌파 공약으로 유행하는 ‘성형·개명’ 대신 커피 2000잔을 직접 들고 관객을 만났다. 관객은 커피 한 잔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의 영화라서 울어도 괜찮았다’는 확인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왕사남'은 협업 툴 노션(Notion)을 활용한 '촬영 실록' 프로젝트로 영화 마케팅의 새 장을 열었다. 극장을 나온 관객들은 여운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그 감정이 채 식기 전에 촬영 실록 페이지가 열려 있었다. 박지훈이 단종의 눈빛을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유해진이 마지막 장면 앞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관객들은 그 기록을 읽으며 다시 한번 울었다. 그리고 그 페이지를 캡처해서 친구에게 보냈다. “나만 운 게 아니었어”라는 공감의 확인이었고, 그 공유가 다시 새로운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가장 강력한 바이럴 마케팅이었다.
때로는 관객의 감동을 가장 빠르게 식히는 것은 제작진의 실망스러운 태도다. 그런데 '왕사남'은 두 차례의 시험을 받았고, 두 번 모두 감동을 지켜냈다. 개봉 초기 호랑이 CG 완성도가 도마에 올랐을 때, 제작진은 상영 중임에도 수정 작업을 공식화했다. “당신이 흘린 눈물은 허투루 받지 않겠다”는 무언의 약속이었고, 논란은 오히려 응원으로 바뀌었다. 영화의 인기를 악용한 피싱 사기가 등장했을 때도 제작사는 즉각 경고 메시지를 발송해 관객을 보호했다. 브랜드가 소비자를 지키는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가장 놀라운 현상은 스크린 밖에서 일어났다. 주요 촬영지인 영월이 팬들의 '성지순례'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고, 영월군은 여행경비 50%를 지역화폐로 환급하는 시범사업을 연계했다. 사람들은 왜 영월로 갔을까. 단순한 관광이 아니었다. 극장에서 흘린 눈물의 의미를 확인하러 간 것이다. 단종이 바라봤을 강물 앞에 서면, 영화 속 감정이 현실의 공간과 겹치며 다시 가슴이 먹먹해진다. 감독이 해외 영화제 일정을 취소하고 영월단종문화제에 직접 참여하기로 한 것도 같은 결에 있다. 관객의 감정이 머무는 공간에 감독 자신도 함께 가 있겠다는 것, 브랜드와 커뮤니티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한편 단종 관련 도서는 전년 대비 2565% 급증했다. 극장에서 울고 나온 사람들이 서점으로 갔다. 단종이라는 인물을 더 알고 싶었던 것이다. '왕사남'은 영화가 아닌 '단종을 기억하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OTT는 편리함으로 극장을 압박해 왔다. 더 싸고, 더 빠르고, 소파에 누워서 볼 수 있다. 콘텐츠의 양과 다양성으로도 극장은 넷플릭스를 이길 수 없다. 그 싸움은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그런데 '왕사남'은 처음부터 그 싸움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극장이 가진 본질적 강점, 즉 높은 몰입도의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과 같은 감정을 동시에 나누는 경험에 주목했다. OTT의 1인 화면 앞에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것, 옆자리 사람과 같은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고 로비에서 붉어진 눈을 마주치는 것. 여기에 촬영 실록 아카이브로 관람 후 여운을 붙잡고, 영월이라는 물리적 공간으로 그 감정을 현실까지 연장했다. 극장 안에서 시작된 경험이 일상으로 스며드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이것이 영화가 OTT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진짜 무기다. 더 좋은 콘텐츠가 아니라, 극장이라는 고몰입 공간에서 시작해 현실로 번져나가는 소비자 경험의 설계. 극장을 단순한 상영 공간이 아닌, 브랜드 경험의 출발점으로 재정의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굿즈, 성지순례, 아카이브, 지역 축제 연계는 모두 하나의 전략적 생태계를 이루는 조각들이었다.
1300만명이 울었다. 그 눈물은 단종의 비극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낯선 이와 함께 울고, 영월 땅을 밟고, 책장을 넘기며 감동을 이어간, 그 모든 경험의 총합이었다. '왕과 사는 남자'는 OTT 시대에 극장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답을 흥행으로 증명했다. 침체된 한국 영화 산업이, 그리고 전 세계 극장가가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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