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스스로 촛불을 켜는 즐거움
2026.03.21 00:29
진나라 평공(平公)은 나이 70에 배움에 뜻을 두었으나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하다가 맹인 악사 사광(師曠)에게 넌지시 물었다. “배우고자 해도 이미 늦은 듯하오.” 사광이 답한다. “어찌 촛불을 밝히지 않습니까.”
유향의 『설원·건본편』에 실린 이 짧은 이야기를 처음 접한 시절, 나는 평공이 불쾌했던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촛불’이라는 단어에 그의 마음을 ‘긁’힌 건 아닐지.
칠십 노년에 ‘이 나이에 무언가를 새로 배울 수 있을까’라며 민망한 불안을 토로했을 땐, 내심 ‘늦지 않았다’는 위로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믿었던 신하(사광은 평공의 책사 역할을 한 사람이다)는 ‘촛불(이나) 켜시지요’라고 한다. 촛불은 해가 진 뒤에야 켜는 것이니, 평공의 입장에서는 ‘당신은 이미 해가 진 사람’이라는 비유처럼 들릴 수 있다. 평공의 시간을 대놓고 ‘캄캄한 밤’으로 전제해 버렸으니 그의 불쾌함은 놀림에 의해서라기보다 불안이 정면으로 들킨 느낌에 가깝다.
그렇다면 사광의 입장도 들어보아야 할 일이다. 면박을 주려는 게 사광의 본 뜻이었을까. ‘이르냐 늦으냐’는 평공의 물음에, 그는 ‘빛이냐 어둠이냐’로 질문의 축을 바꾼다.
‘늦지 않았다’는 말이 위로는 될 지언정, 배움의 가치를 전달하기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침 해, 한낮의 빛이 누구나 고루 받는 밝음이라면, ‘촛불’은 다르다. 스스로 불을 붙여야만 존재한다. ‘나’의 의지가 없으면 한 뼘의 밝음도 얻지 못하니 가장 능동적인 빛이기도 하다.
노년의 배움이란, 이처럼 어둠 속에서 불을 켜야만 하는 필연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이 일화를 계기로 후대인들은 나이 들어 배우는 일을 ‘병촉지명(秉燭之明)’, 즉 ‘(어두운 밤에) 초를 잡고 불을 밝히는 일’이라 하였다. 동아시아 한자 문명권에서 이 사자성어의 무게는 상당하다.
학번은 2026910205, 사서교육원 2급 정사서 과정. 이것이 올봄, 나의 또 다른 속성값이다. 퇴근 후면, 나는 다시 ‘학생’이 된다. 주중 나흘 저녁을 할애한다는 건 녹록지 않다.
물론, 온라인 수업도 더러 있어 줌으로 편하게 들을 수 있겠거니 했으나 착각이었다. 교수님은 이미 화면 너머에 토론용 가상의 방을 여러 개 마련해두고 수강생들을 무작위로 흩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
클릭 한 번에 낯선 학우들과 마주하게 되는 문명의 이기가 아름답지만 무자비하기도 하다. 서먹함에 한마디 꺼내기도 전, 원래 화면으로 소환되고 나면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한숨만 절로 나온다. 대면 수업도 마냥 편하지는 않다. 지각할까 노심초사, 노트북 뒤로 숨어 ‘질문의 시선’을 피하느라 시종 긴장이다. 어리바리한 나의 3월은 분주해도, 다시 학생이란 감각에 짜릿하다. 어쩌랴, 낮에는 강의, 밤에는 배우는 이중고를 스스로 선택했으니.
‘인류의 기억을 개인에 환원하는 사회적 장치, 도서관’. 피어스 버틀러가 정의한 이 공간에 대해 나는 오랜 동경이 있었다. 학기 초반, 학생들에게 ‘도서관 편애 팁’을 전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점토판에서 디지털에 이르는 인류 지혜의 타임라인이 집약된 곳이니 졸든 사랑을 하든 그대는 인류 지성사의 한복판에 있는 셈이다”라며 역설하곤 했다.
언젠가는 ‘이용자’가 아닌 ‘매개자’로서 이곳의 기제를 배우고 싶었고 50에 들어서며 드디어 ‘촛불’을 쥐게 되었다. 따로 있어도 모두 이어지는 곳, 스스로 촛불을 켤 수 있다는 자각과 확신을 얻게 될 곳. 소소한 배움이 내 일상에 얽혀 있다면, 이미 촛불 하나는 들고 있는 셈이다.
배움으로 맺는 인연만큼 무탈한 것이 있을까. 캄캄한 길, 저마다의 촛빛으로 모이면 근사할 것이다. ‘병촉지명’, 네 글자의 기적을 너나 없이 누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김영죽 성균관대 동아시아미래가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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