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현상’이 일본의 희망이 될 수 없는 이유
2026.03.20 02:26
갈림길의 일본
이헌모 지음
생각의 힘, 520쪽, 2만4800원
먼저 저자의 이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지바현 중앙학원대학 교수인 이헌모는 1990년, 26세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와세다대학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중앙학원대학에서 자리를 잡은 뒤 현재까지 36년째 정치학자로서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국에서 살아온 세월보다 일본에서 생활한 기간이 훨씬 길다. 그는 “일본인과 같은 조직, 같은 커뮤니티에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며 ‘방문자’가 아닌 ‘생활자’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내부자로서 일본의 민낯을 가감 없이 경험하고, 외부자로서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일본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얘기다.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일본은 큰 변화를 겪었다. 저자가 일본에 첫발을 디딜 때만 해도 일본은 아시아 유일의 선진국이었고, 한국을 비롯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동경하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은 장기 불황 속에서 “망망대해를 조타수 없이 밤하늘의 별자리에 의존해 항해하는” 거대한 배와 같을 뿐이다. 저자는 일본이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원인을 분석한다. 전공 분야인 정치와 행정은 물론 경제와 산업, 교육과 문화 등 일본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애정 어린’ 비판을 덧붙인다.
저자가 목격한 최근 일본의 풍경 중 가장 당혹스러운 장면은 2026년 2월 8일 치러진 중의원 총선거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기습적인 해산 선언은 자민당 316석이라는 전무후무한 대승으로 돌아왔다. 전체 의석의 68%를 장악하며 헌법 개정안 단독 발의권까지 손에 넣은 거대 여당의 탄생이었다.
자민당의 압도적 승리의 배경에는 ‘사나카츠’라 불리는 다카이치 팬덤 현상이 자리 잡고 있다. 잃어버린 30년의 무력감에 젖어 있던 일본 대중에게 ‘여성 최초·비세습 총리’라는 서사는 강력한 흡입력을 지닌 상품이었다. 다카이치는 구체적인 정책 로드맵 대신 소셜미디어와 유튜브 쇼츠를 통해 가공된 이미지를 전파했고, 젊은층은 이를 아이콘으로 소비하며 열광했다. 저자는 “숙의 민주주의가 사라진 자리에 이미지 정치가 들어섰다”고 일갈한다. 냉철한 정책 검증 없이 감성적 일체감만으로 몰아준 316석은 일본 정치를 더욱 극단적인 우경화의 늪으로 밀어 넣고 있다.
저자는 일본의 흥망성쇠에는 항상 자민당이 동행했고, 지금도 함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1955년, 당시 좌파 세력의 대통합에 위기를 느낀 일본 우파는 자유당과 민주당으로 양분돼 있던 보수 진영을 통합해 자유민주당(자민당)을 탄생시킨다. 자민당 체제는 전후 복구와 고도성장을 이끌었지만 정경유착과 파벌 정치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고착시켰다. 일본의 3류 정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저자는 3류 정치를 용인하고 지지하면서 그런 정치를 유지시켜 온 주권자의 책임도 강조한다. 이 지점에서 언급되는 것이 ‘생활 보수주의’와 ‘오마카세 민주주의’다. 일본 국민은 1990년대 경제 버블 붕괴 이후 장기 불황을 겪으면서 개혁이나 변화보다는 현재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우선시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생활 보수주의 의식이 결국 보수 정치를 지지하는 정치 성향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는 자민당의 반영구적인 지배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또한 식당에서 셰프에게 메뉴 선택을 전적으로 맡기는 ‘오마카세’처럼 일본 국민들은 정치적 판단과 정책 결정을 엘리트 관료나 집권 자민당에 전적으로 위임하는 경향이 팽배하다. 저자는 “결국 정치는 정치가가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이 하는 것”이라며 “우리의 삶은 정치에 ‘무관심’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정치와 ‘무관계’로 존재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정치 분야 외에도 실생활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활력을 잃고 정체된 사회 분위기를 분석한다. 일본은 21세기 정보화 사회인 지금도 도장이 필수품이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 학교에서 도장을 새겨 졸업 선물로 주기도 한다. 무엇을 하더라도 매뉴얼에 따라 번잡한 서류를 작성해야 하고, 거기에는 도장이 필요하다. 저자는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의 장학금 신청을 위해 주거래 은행 잔고증명서를 발급받는 데에만 일주일 넘게 걸리는 사례도 언급한다. 사회 곳곳에선 비생산적인 회의를 통한 만장일치 결론이라는 시스템이 작동한다. 사전 조율이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동의할 때까지 이어지는 끝없는 회의는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가 일본 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핵심 키워드로 제시하는 것은 ‘요코나라비’다. 원래 ‘옆으로 나란히 줄 선다’는 뜻으로 ‘차등을 두지 않고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평등과 공평의 가치가 우선시되는 사회에서는 모두가 함께하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더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저자는 말한다.
비교적 두툼한 분량의 책에는 저자가 새로 쓴 글도 있지만 그동안 틈틈이 써 놓은 글들도 많이 등장한다. 가끔 현재와 시점이 일치하지 않은 글들이 보이는 이유다. 전체적인 주제는 일본의 쇠락 원인에 대한 분석이지만 딱딱하지 않다. 일본 어린이들의 가방인 ‘란도세루’에 투영된 일본인들의 교육관부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에 대한 일본 언론의 부정적인 반응을 통해 일본 미디어의 이중성도 고발한다. 책 곳곳에 배치된 ‘커피 브레이크’ 코너는 일본어의 미묘한 어감 등 일본과 관련한 상식을 소개하며 가깝고도 먼 이웃 나라를 이해하는 지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일본을 볼 때는 그냥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권하고 싶다”는 저자의 기대에 맞는 책이다.
⊙세·줄·평………………………………………★★★
·경계인이 들여다본 일본의 민낯
·장황할 수도 있지만 책의 장점을 뺏지는 않는다
·타산지석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
저작권 보호를 위해 본문의 일부만 표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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