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독립운동가’에 박헌영 아내 주세죽은 있는데… 프란체스카는 없다니
2026.03.19 05:01
1992년 3월 19일 92세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1900~1992)의 주민등록증(1983년 발행)에 적힌 이름은 ‘프랜시스카 또나’이다. 김명섭 연세대 교수는 2021년 낸 ‘푸랜시스카 사진의 한국사’ 에서 “한국 호적상의 이름은 ‘푸랜시스카 또나’”라고 했다. ‘프랜시스카’ 또는 ‘푸랜시스카’가 법적 이름인 셈이다. 프란체스카 자신은 한글로 이름을 적을 때 주로 ‘푸랜시스카’라고 썼다. 김 교수는 ‘푸랜시스카’로 쓴다. 여기서는 많이 알려진 표기 프란체스카로 적는다.
김명섭 교수는 위의 책 서문에서 “푸랜시스카는 대한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외국인들 중 한 명이지만 독립유공자로서 합당한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불명예 퇴진 이후 푸랜시스카의 공적 사항은 외면되어 왔다”며 “대한민국 국립여성사전시관 홈페이지 여성 독립운동가 DB에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은 나와도 푸랜시스카는 없다”고 했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서거한 후 프란체스카는 남편 유해를 따라 서울로 오지 못했다. 오랜 기간 남편 간병에 건강이 좋지 못한 상태였다. 하와이 호놀룰루의 차지수 조선일보 통신원은 “그녀는 이 박사의 장례식이 고국에서 거행되는 동안 서울의 영자신문 코리어 타임즈와 코리언 리퍼블릭을 모조리 읽었고, 양자 이인수씨가 보내온 사진 앨범을 보고 한국 정부의 충분한 배려와 시민들에게 감사한다고 되풀이 했었다”(1965년 9월 19일자 6면)고 전했다.
프란체스카는 이승만 서거 두 달 후 자신의 고향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와이 일부 교민은 빈으로 떠나는 프란체스카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빈에 ‘비자금’이 있다는 거짓 소문이 퍼졌다. 당시 기사는 프란체스카를 ‘그여자’라고 부르며 비난하는 하와이 교민의 말을 전했다.
“그여자가 비엔나로 가는 것은 이 박사 집권 시절에 돈을 비엔나에 갔다 놓았기 때문이지요. 그여자의 전 남편과의 사이에 있었던 자식도 비엔나에 살고 있고요. 또 일본에서는 오빠가 상업을 하고 있으니까 하와이에나 한국에서 살 필요가 있겠어요?”(1965년 9월 19일 자 6면)
프란체스카가 전 남편 사이에 낳은 자식이 있다거나 오빠가 일본에서 상업을 했다는 이야기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
이승만 하야 후 하와이 생활은 빈한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이발비를 아낄 정도로 근근히 생활하며 검약하게 살았다. 거처를 마련해 준 교민 윌버트 최에게 서울 이화장을 양도한다는 차용증(2015년 7월 18일 자 A1면)을 써줄 정도였다. 호화 생활이나 비자금 설(說)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애초 하와이에 오랜 기간 머물 생각도 아니었다.
프란체스카가 빈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에 대한 기사도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양덕규 빈 통신원은 “갖은 노력 끝에 알아낸 주소 빈시(市) 제1구에 있는 엘리자베드가(街) 7층 아파트를 찾아냈다. 갖은 방법으로 요청했으나 그때마다 거절당하고 말았다”면서 앞서 프란체스카를 인터뷰했던 빈 일간 신문 크로넨 자이퉁의 부루노 사이저 기자를 찾았다.
“그(*사이저 기자)는 첫 마디에 프 여사가 자신을 감추기 위해 패니라는 이름을 쓰고 있고 반짝이는 잿빛의 옷에 눈처럼 흰 머리를 뒤로 동여매고 공포에 사로잡힌 눈을 하고 있더라고 설명해주었다.”(1965년 10월 17일자 3면)
프란체스카가 자신을 감추기 위해 이름을 바꿨다는 해석은 억측이다. ‘패니’라는 이름은 이승만이 프란체스카를 부르던 애칭이었다.
“이승만은 그녀를 ‘파니(Fanny)’ 또는 ‘마미’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파니는 푸랜시스카의 서양식 애칭이고, 마미는 하와이 시절부터 그녀가 유난히 사랑했던 ‘애견(들)의 마미’라는 의미가 있다. 푸랜시스카가 이승만을 ‘파파(Papa)’라고 부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푸랜시스카 사진의 한국사 1, 6쪽)
양덕규 빈 통신원은 사이저 기자를 인용해 프란체스카의 동정을 전했다. 프란체스카가 매우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고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사이저 기자에게 “제발 나의 있는 곳을 세상에 알리지 마십시오. 어느 목요일 두 한국 사람이 나의 문을 두드렸을 때 나는 나의 은신처가 안전치 못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후 두 사람은 항상 대문 앞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나의 돈을 또는 생명을 아니면 그 둘 다를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어요”라고 무엇엔가 쫓기는 듯한 불안한 빛을 보였다고 한다.”(1965년 10월 17일 자 3면)
위 기사에서 ‘나의 돈과 생명을 원한다’는 부분은 앞서 국내에 보도되면서 파문을 일으켰다. 프란체스카가 숨긴 돈이 많아 비밀 기관원이 생명을 노린다고 생각할 정도라는 억측을 불렀다.
“이 박사의 유서조차 공개되지 않은 지금 그의 유산이 얼마나 되는지 또한 해외 도피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렇다고 부군을 잃고 사양에 들어선 외로운 외국 노인파를 노려 재산을 갈취하거나 한국 비밀 기관원이 생명을 노릴 만한 까닭을 찾기는 어렵다. 혹시나 한국 특파원이 끈덕지게 쫓아다니는 것을 오해한 것이나 아닌지도 모른다.”(1965년 9월 28일 자 7면)
프란체스카는 1970년 5월 16일 한국으로 ‘영주 귀국’했다. 앞서 양자 이인수씨가 득남해 손자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씨에게 편지를 통해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지난해 11월 손자 병구 군이 태어나자 여사는 아들 부부에게 “아버지(*이승만)의 산소가 있는 한국이 그립다. 귀여운 나의 손자를 키우며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사연을 보냈으며 그로부터 여사의 영주 귀국 계획은 조용히 추진돼 왔다.”(1970년 5월 16일자 8면)
프란체스카는 이후 22년간 서울 이화장에서 검소하게 살다가 1992년 3월 19일 별세했다. 언론인 이규태는 프란체스카의 유품을 보고 그의 검약 정신에 감탄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저이던 이화장에 전시되고 있는 고 프란체스카 부인의 유품전은 유품을 구경한다기보다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에 아프게 쏘아꽂는 하나하나의 화살 같은 충격이었다. 소매와 솔기가 닳아빠진 하늘색 투피스는 40년을 오로지 그 한 벌로 입어내렸다는 퍼스트레이디의 예복이었다. 거의 같은 세월을 신었다는 갈색 구두, 31년간 썼다는 우산, 두 손자에게 입혔다는 하얀 내복들은 서너 군데씩 기워져 있었으며 기운 자리를 다시 기워놓은 것을 보았을 때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 별다르게 눈길을 끄는 유품은 국민학교에 다니던 두 손자에게 손수 깎아주었던 몽당연필들이었다. 필통에 간직된 스무남은 개의 이 몽당연필들은 하나 예외 없이 새끼손가락만 한데 연필깎지를 끼워서도 더 이상 깎아 쓸수 없는 길이였다.”(1993년 4월 2일자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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