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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로 쓰던 호르무즈, 진짜 무기로 바꾼 이란…6500㎞ 밖 한국 울리는 나비효과

2026.03.18 17:47

정부가 아랍에미리트(UAE)로부터 앞서 공급받은 원유 600만 배럴 외에 1800만 배럴을 추가로 공급받는다고 18일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의 특사로 UAE를 방문하고 돌아온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UAE 측이) 한국은 원유 공급에서 최우선이라고 분명히 약속해줬다”고 말했다.

비상 상황 속에서 거둔 외교적 실적이지만, 역설적으로 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전쟁이 금방 끝날 거란 기대는 이미 물 건너갔다. 긴 싸움을 각오한 이란은 초크포인트(Choke points, 말라카 해협, 수에즈 운하 등 해상 운송 요충지) 중 하나인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본격화하고 있다. “호루무즈 해협은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다”(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국회의장)는 경고는 과장이 아니다. 낚싯배로 위장한 드론 보트의 자살 공격이 시작됐고, 기뢰와 미사일도 투입도 예고됐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오만의 무스카트항 인근에 대기하고 있는 유조선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하루 평균 1570만 배럴의 석유가 이 길을 지났다. 전 세계 해상 석유 물동량의 3분의 1이 넘는다. 수십 년간 이란은 외부의 위협을 받을 때마다 이 길을 인질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년), 걸프전(1990~1991년) 등 수 없는 포화 속에도 해협은 완전히 봉쇄되지 않았다. 이번엔 진짜 막아섰다. 약 6500㎞ 떨어진 한국도 위기에 직면했다. 한국이 수입하는 원유의 70%는 중동에서 오고, 그중 90%가 호르무즈 해협을 거친다.

지난 3주가 치솟은 유가와의 싸움이었다면 이젠 수급과의 전쟁이다. 비싼 건 불안의 영역이지만 없어지는 건 실존적 공포다.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현실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비축유 방출을 검토하고, 차량 5부제 같은 수요 억제책도 언급된다. 현장에선 4~5월 위기설이 돈다. 원유가 제때 들어오지 못하니 모아둔 걸로 버텨야 하는데 이대로라면 공백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실제로 정유사가 비축한 물량은 이르면 4월부터 소진된다. 중동 외 물량, 외교력을 동원해 확보한 추가 물량만으로는 어차피 기존 물량을 채울 수 없다. 현재 석유 비축 물량은 약 1억9000만 배럴. 정부는 비축유로 208일을 버틸 수 있다고 설명하지만, 이는 수출을 뺀 계산이다. 지난해 국내 정유사의 수출 물량은 4억8535만 배럴로 전체 원유 도입량(9억3506만 배럴)의 51.9%다. 수출을 포함한 하루 석유 소비량은 280만 배럴. 1억9000만 배럴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약 68일이다.

정부는 위기가 고조되면 수출을 통제하고, 수요를 억제하며 장기전에 돌입할 것을 시사했다. 하지만 한 정유 업계 전문가는 “실제 비축유 방출을 시작했는데 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으면 매일 시장은 패닉에 빠질 수 있다”이라며 “그런 점에서 4월이든 5월이든 위기설은 일리가 있다”고 말했다.

원유만 문제가 아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중동 및 인근 국가 수입 의존도가 70% 이상인 즉각 관리 대상 품목은 총 41개다. 반도체·정밀화학 원료로 쓰이는 헬륨이나 건설업에 필수인 석고 등이 여기에 속한다. 편중은 부작용을 부른다. 평시에 다변화 노력을 하지 않은 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중국만 믿다가 온 국민이 요소수 대란을 겪은 게 불과 5년 전이다.
박경민 기자
정부도 상황을 오판했다. 김형건 강원대 경제·정보통계학부 교수는는 “초기부터 공급 리스크를 제대로 반영했다면 수요 또한 제어해야 하는데 정작 꺼낸 카드가 최고가격제였다”며 “한 마디로 기름값 걱정하지 말고 차를 타라는 건데 정유사들이 현물까지 사들이는 현 상황과 맞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국민 부담을 줄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서가 잘못됐다는 얘기다. 최고가격제를 하면서 5부제도 시행하는 게 앞뒤가 전혀 안 맞는다는 지적도 많다.

이미 국내 산업 현장에선 ‘나프타 쇼크’가 라면부터 화장품, 자동차 등 전방위로 엄습하고 있다. K푸드, K뷰티 열풍을 타고 사상 최대 수출 실적을 기록 중인 식품`화장품 업계가 뜻밖의 악재를 만났다. 자동차시트에 들어가는 폴리올 수급도 악화하면서 자칫 자동차 생산에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

식품 업계에선 석유화학 제품 조달에 차질을 빚으면서 ‘포장재 대란’ 우려까지 나온다. 한 식품 업계 관계자는 “포장재 재고 상황을 예의주시 중”이라며 “앞으로 한 달 이상 이란 전쟁이 장기화 땐 제품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고 토로했다.

라면·과자 등 포장재의 핵심 원료인 폴리에틸렌(PE)은 나프타를 주원료로 한다. 나프타는 원유를 추출해 만드는데, 국내 석유화학 업계는 나프타를 생산하거나 중동산을 수입한다. 그런데 이란 전쟁으로 원유 수급과 중동산 수입이 어려워져 연쇄적인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여천NCC 등은 고객사에 ‘불가항력’ 가능성을 언급한 상태다. 석화 업계 관계자는 “호르무즈해협 봉쇄가 계속될 경우를 가정하면 일부 업체는 이달 말부터 셧다운될 수 있다”고 했다.
차준홍 기자
나프타를 가공해 만드는 폴리올 수급도 비상이다. 가구부터 침대, 자동차 산업까지 직격탄을 맞는 구조다. 침대 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가다간 조만간 매트리스, 나아가 침대도 생산하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매트리스 폼에 주로 사용되는 폴리우레탄의 핵심 원료인 폴리올 수급이 어려워지면서다. 부피가 큰 매트리스 폼의 특성상 재고는 업체별로 길어야 일주일치가량이다.

화장품 업계로도 위기감이 번지고 있다. 석화 업체에서 공급받은 나프타를 활용해 폴리에틸렌(PE) 폴리프로펠린(PP) 페트(PET) 소재 용기를 만드는데, 수급이 불안정해지면 용기 제작이 어려워질 수 있어서다. 한 포장재 기업 관계자는 “석화 업계의 공급이 불안정해지면 불가피하게 포장재 가격까지 인상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석유 업계 고위 관계자는 “미국∙베네수엘라 등에서 대체 물량을 구하려 백방으로 뛰고 있다”고 말했다. 중동은 25일이면 한국에 도착하지만, 북미는 대략 35일~40일이 걸린다. 물량을 찾아도 그만큼 비용이 더 든다. 게다가 미국 등의 원유는 대부분 경질유다. 중동산 중질유 중심의 설비를 갖춘 국내 정유사 입장에서는 정제 효율이 떨어진다. 설비 조정 등의 방법이 있지만, 역시 시간이 문제다.

정유사가 원유를 도입할 때 보통 장기 계약(70~80%)과 현물 거래(20~30%)를 수급 상황에 따라 조절한다. 급할 땐 비싸게 현물을 사오면 되지만 지금은 현물 가격도 너무 치솟았다. 16일 싱가포르에서 거래된 두바이유 현물 가격은 배럴당 153.24달러로 2월 말(71.24달러) 대비 두 배가 넘는다. 운송비 역시 천정을 뚫었다. 17일 기준 중동과 중국을 오가는 초대형 원유 운반선(VLCC)의 하루 운임은 47만 달러까지 치솟았다. 지난달 20일까지만 해도 15만7000달러였는데 3배가 됐다.

무엇보다 이 길이 더는 안전하지 않다는 걸 전 세계가 공유하게 됐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과 앞으로의 가능성만으로도 화주든 선주든 보험사든 이 길을 피할 유인은 충분하다. 한국해양진흥공사는 “과거 사례를 고려할 경우 봉쇄가 해제되더라도 정상화까지는 봉쇄 기간의 2배 이상이 소요된다”고 내다봤다.

공급 차질이 눈 앞에 닥친 건 수십 년 만이다. 비축유 방출까지 언급되는 이번 사태가 1970년대 1∙2차 오일쇼크에 비견되는 이유다. 산업통상부는 이날 오후부터 원유에 대한 자원안보 위기 경보를 기존 ‘관심’에서 ‘주의’ 단계로 격상했다. 또한 품귀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나프타는 경제안보품목으로 지정해 관리하기로 했다. 한 정부 관계자는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당분간은 전시에 준하는 대응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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