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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군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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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기억 저장소, 우리의 시네마 천국… 극장은 영원할 거야

2026.03.17 16:30

[레드 기획]씨네큐브 개관 25주년 헌정작 ‘극장의 시간들’… 이종필·윤가은·장건재 세 감독이 말하는 ‘나에게 영화관이란’
씨네큐브 개관 25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영화 ‘극장의 시간들’ 포스터. 티캐스트 제공


극장은 해묵은 ‘추억’을 불러내는 장소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 부모를 졸라 만화영화를 봤던 나들이의 기억을, 누군가는 애인과 헤어지고 눈물 바람을 했던 찌질한 기억을, 누군가는 오래전 연락이 끊긴 친구와 해후했던 반가움의 기억을, 누군가는 다음 약속까지 붕 뜬 시간을 때웠던 심심풀이의 기억을…. 수년 혹은 수십 년이 지나 그때 봤던 영화는 또렷이 기억나지 않아도, 극장은 우리가 발걸음할 때마다 즐겁고 신나는 혹은 쑥스럽고 민망했던 갖가지 추억을 소환한다. 이문세의 ‘조조할인’ 속 가사처럼 ‘함께한 순간 이젠 주말의 명화 됐지만’ 극장은 그 긴 시간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다.

공공연하게 ‘극장의 위기’라는 말이 회자하는 2026년, 극장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영화 ‘극장의 시간들’(3월18일 개봉)이 찾아온다. ‘세계의 주인’의 윤가은 감독, ‘파반느’의 이종필 감독, ‘한국이 싫어서’의 장건재 감독까지 요즘 ‘잘나가는’ 세 감독이 뭉쳐 만든 앤솔러지(모음) 영화다. 무엇보다 한국 독립예술영화관의 자존심으로 불리며 오랜 시간 서울 광화문을 지켜온 ‘씨네큐브’의 개관 25주년을 기념한 작품이라 그 의미가 남다르다. 앞서 2025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당시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관람해 주목받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30분 남짓의 단편영화 세 편과 그 앞뒤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덧붙여진 형식이다. 극장과 영화에 대한 세 감독의 애틋한 시선은 관객 각자의 추억이 퐁퐁 샘솟는 경험을 하게 한다.

씨네큐브 개관 25주년 기념 영화 ‘극장의 시간들’ 중 첫 번째 작품인 이종필 감독의 ‘침팬지’는 시네필이라는 공통점으로 친구가 된 고도, 모모, 제제가 나눴던 추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티캐스트 제공


지워지지 않는 마음속 고향


 

‘침팬지’는 씨네큐브의 시작인 2000년 광화문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20대의 고도(원슈타인)는 남아도는 시간의 여백을 메우려 우연히 들른 헌책방에서 동물에 관한 책을 읽다가 침팬지에 대한 오묘한 이야기를 접한다. 고도는 시네필(영화 애호가)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친해진 모모(이수경), 제제(홍사빈)와 함께 책 속에 나온 ‘창경궁 침팬지’를 찾아가는 등 소소한 추억을 쌓는다. 폴란드에서 실려와 창경궁으로 갔던 침팬지에 대한 이야기는 2025년 40대 감독이 된 고도(김대명)의 영화로 만들어진다. 관객은 영화에 대해 ‘불친절한 서사’ ‘의미 없는 메타포’ ‘별 한 개도 아깝다’는 등 혹평을 하지만, 고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함께한 시간이 남았다”며 친구들과 나눴던 추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우연히 20년 전과 비슷한 헌책방에서 ‘침팬지 이야기’가 실렸던 그 책을 발견하지만, 자신의 기억과 전혀 다른 내용만 확인하게 된다.

기억의 편린은 쉽게 잊히고 왜곡된다. 꿀물을 좋아하던 그 침팬지는 정말 존재했을까? 침팬지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때 그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랜 친구같이 대신 웃어주고, 대신 울어주는” 영화는 빛나던 20대를 함께했던 세 친구의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체였다. 누군가는 사라지고, 누군가는 감독이 돼서 영화와 운명을 함께하는 등 걷는 길은 달라졌지만, 극장에서 보냈던 한때의 온기는 여전히 따스하게 남아 있다. 그렇게 겹겹이 포개진 기억은 눈물이 핑 돌 만큼 아련하다. 이 작품은 이종필 감독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시사회 뒤 열린 간담회에서 이 감독은 “극장은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라며 “씨네큐브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받고 오래전부터 침팬지와 관련된 개인적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어 연출에 응하게 됐다”고 했다.

‘극장의 시간들’ 중 두 번째 작품인 윤가은 감독의 ‘자연스럽게’는 어린이 배우들과 함께 촬영하며 자연스러운 장면을 연출하려 고군분투하는 감독의 모습을 그려낸다. 티캐스트 제공


놀이로 경계 허물자 샘솟은 자연스러움


 

‘우리들’(2016), ‘우리집’(2019) 등 주로 아이들과 함께 촬영해온 윤가은 감독의 ‘자연스럽게’는 여자 초등학생 한 무리의 왁자지껄 신나는 동네 나들이를 담는다. 약속 장소에 먼저 온 아이가 늦게 온 아이들을 기다리고, 함께 뭉쳐 들로 산으로 몰려다니며 까르르 웃어댄다. 그러다 카메라는 아이들이 영화를 촬영하는 중이었으며, 감독(고아성)은 아이들 눈높이에서 대화하며 자연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때부터 영화는 카메라 안과 밖을 오간다.

아이들에게 계속해서 “자연스럽게”를 주문하는 감독은 더워서, 지쳐서 연기의 텐션이 달라지는 걸까 고민하며 고군분투를 이어간다. 하지만 정작 자연스러움은 스태프와 감독, 아이들이 다 함께 어울려 뺑뺑이(놀이터 회전무대 기구)를 타고 얼음땡을 하는 동안 배어 나온다. 마치 특별하지 않은 순간순간이 쌓여 시간을 채우고, 그렇게 채워진 시간을 기록한 것이 자연스러운 영화가 아니냐고 묻는 것처럼. 카메라가 멀리 찍으면서 장면이 전환되면, 아이들과 감독은 극장에 앉아 자신들이 나오는 영화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밝게 웃는다.

영화는 윤가은 감독이 영화를 만들며 가장 천착했을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끌어내는 법’에 대한 이야기다. 관객 입장이 아닌,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입장에서 그려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또한 자전적 작품인 셈이다. 영화는 매 장면, 간단한 설명을 준 뒤 아이들이 하는 즉흥적인 연기로 채워졌다고 한다. 윤 감독은 간담회에서 “어린이 배우들에게 재미를 주면서 좋은 장면을 뽑아낼 수 있을지 늘 고민이다. 놀이처럼 담으려 했다”고 말했다. 고아성은 이종필 감독의 ‘파반느’, 장건재 감독의 ‘한국이 싫어서’에 이어 윤가은 감독의 ‘자연스럽게’에 출연하면서 세 감독 모두와 연을 맺게 됐다. 간담회에 참석한 고아성이 “세 감독님과 모두 작업해 이 자리가 저에겐 ‘세계관 붕괴’ 같고 어색하다”고 했는데, 그만큼 상업·독립영화를 막론하고 영화계에서 배우 고아성의 자리가 뚜렷하다는 뜻이 아닐까.

‘극장의 시간들’ 중 세 번째 작품인 ‘영화의 시간’은 고교 동창인 영화와 우연의 이야기를 뼈대로 극장 뒤편에서 일하는 영사기사, 매표원, 청소부 등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티캐스트 제공


스크린 밖에서 영화관 움직이는 사람들


 

‘영화의 시간’은 강원도 춘천에 사는 ‘영화’(양말복)가 오랜만에 광화문과 정동에 방문했다가 극장에서 여고 동창생 ‘우연’(장혜진)과 우연히 만나는 얘기다. 신산한 생활의 여정 속에서 ‘우연’히 마주한 ‘영화’처럼, 극장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곳이 아니라 어쩌면 삶과 삶이 마주치는 교차로 같은 공간일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영화 중간 벼르고 별러 ‘반차’까지 내고 극장에 왔다가 허무한 이유로 돌아서는 한 관객의 에피소드엔 짠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피식 웃음이 난다. 나도 모르게 삶의 중간에 ‘쉼표’를 찍는 것처럼.

장건재 감독은 극장을 찾는 관객 외에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극장이 잘 돌아가게끔 애쓰는 매표원, 청소부, 영사기사 등의 묵묵한 일상도 담아낸다. 장 감독은 시사회 뒤 열린 간담회에서 “극장이 작동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상상해봤다. 일하는 사람들, 오랜만에 극장을 찾은 사람들이 만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엔딩 크레디트가 아니라 영화 첫머리에 각본, 프로듀서, 주연배우는 물론 단역, 조명, 미술, 의상 메이크업, 동시녹음, 현장 편집 등 스태프들의 이름을 일일이 읊어주는 부분에서부터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을 거치는지, 그리고 감독이 얼마나 그들 모두의 노고에 감사하는지가 드러난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어떤 숭고한 감상 태도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영화 속 등장하는 감독의 말을 빌려 “어떤 영화는 우리를 잠으로 이끈다. 그런 영화 앞에서는 이상하게 긴장이 탁 풀리고 무장해제가 된다”고 말한다. ‘영화’가 다 끝난 뒤 흔들어 깨우자 일어난 ‘영화’에게 “너 피곤했구나. 잘했어”라고 말해주는 친구 ‘우연’처럼.

영화 ‘극장의 시간들’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나오는 나이 든 씨네큐브 영사기사 홍성희씨와 젋은 영사기사(배우 심해인). 티캐스트 제공


위기일지언정 소멸하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과 끝엔 씨네큐브 영사실에서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늙은 영사기사 홍성희씨와 청년 영사기사(배우 심해인)의 모습이 다큐멘터리처럼 담겨 있다. 늙은 영사기사는 청년 영사기사에게 필름을 거꾸로 감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필름에) 혀를 대보라는 노하우를 전한다. “현상 입힌 부분이 밑으로 가야 하는데, 혀를 대보면 끈적하다”고 일러주며. 에필로그의 끝, 젊은 영사기사는 혼자 출근해 전수한 방법대로 상영 준비를 한다.

영화진흥위원회의 ‘2025년 영화산업 결산’ 자료를 보면, 2025년 12월31일 기준으로 전국에서 영업 중인 극장 수는 2024년에 견줘 23개(4.0%)가 줄어든 547개였다. 전체 스크린 수는 2024년 대비 142개(4.3%)가 줄어든 3154개인데, 이 가운데 독립·예술영화 전용관 스크린 수는 고작 70개에 불과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모두가 극장의 위기를 말한다.

하지만 ‘극장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대를 이어 그 역사를 이어갈 것’이라고 이 영화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분명히 못박는다. 극장이 사라지지 않는 한 관객의 삶과 추억이 켜켜이 쌓이고 교차하는 ‘극장의 시간들’도 계속될 것이다. 조금 소원했을지라도 다시 찾아가면 극장은 언제나 우리를 반갑게 맞아줄 터다. 이종필 감독은 “단편을 찍고 나니 앞에 표지처럼 무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씨네큐브 영사기사님을 찍고 싶었다”며 “표현이라기보단 기록의 의미였는데, 다큐멘터리 같으면서도 영화적인 작업이 됐다”고 설명했다. 자못 근사한, 속지 못지않은 표지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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