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소할 뻔 했던 유럽 여행, 8개월 뒤 우리가 얻은 것
2026.03.15 14:11
| ▲ 여행의 끝,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시간. 동유럽 여행의 마지막 자다르 숙소 앞. 택시를 기다리는 아내의 뒷모습에서 여행의 여운과 한국으로 돌아갈 설렘이 동시에 묻어난다. |
| ⓒ 김봉석 |
크로아티아 자다르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 8개월 전, 인천공항의 낯선 공기를 마시며 떠나왔던 우리가 이제는 한국으로 향하기 위해 자그레브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나는 익숙하게 거대한 캐리어 두 개를 버스 화물칸에 밀어 넣고, 아내는 미리 예약해둔 플릭스버스(FlixBus) 자리에 앉아 세팅한다.
처음 국경을 넘을 때만 해도 커다란 짐 가방 앞에서 쩔쩔매던 은퇴 부부였다. 하지만 이제는 버스 이동의 고수가 다 되었다. 저렴한 가격에 도시와 도시를 잇는 유럽 버스 여행은 고단하지만 매력적이다. 좌석에서 삐걱거리는 몸을 달래며 창밖을 본다. 자다르 시내를 지나 고속도로로 접어드는 풍경 위로, 지난 8개월의 발자취가 파노라마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취소 버튼 앞에서 망설였던 2025년 7월
사실 이 여행의 시작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 유럽행 비행기 티켓을 손에 쥔 채 들떠 있던 것도 잠시, 출국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아내의 건강에 치명적인 적신호가 켜졌기 때문이다.
동남아에서의 6개월 여정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장인어른의 칠순 여행까지 도맡아 준비하느라 아내는 쉼 없이 달렸다. 그 과도한 일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아내의 몸은 결국 비명과도 같은 신호를 보내왔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급성 빈혈과 멈추지 않는 하혈을 지켜보며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AI 검색은 물론, 지인들에게 수소문하며 가장 실력 있는 의료진을 찾았다. 그렇게 알게 된 송파구의 여성병원을 방문해 지체 없이 검사를 진행했다. 아내가 검사실로 들어간 짧은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여행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보다 더 두려운 것은 아내의 몸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하며 아내를 기다렸다. 잠시 후, 무거운 공기 속에서 검사 결과가 나왔고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진료실의 문을 열었다. 굳은 표정으로 차트를 응시하던 의사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근종의 위치가 좋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여행은커녕 일상생활조차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수술을 받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미 유럽 8개월 치의 숙박과 비행기 표 예약이 모두 끝난 상태였다. 수술 대기자가 많아 빨라야 7월 초에나 수술이 가능하다는 청천벽력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어질한 마음을 움켜 잡으며 나름 침착한 어조로 선생님에게 간절히 호소했다.
"선생님, 저희가 은퇴 후 어렵게 준비해온 여행입니다. 조금만 더 빨리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절박함이 닿았던 걸까. 선생님의 배려로 기적처럼 6월 초에 수술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장기 해외 여행을 앞둔 우리를 위해 회복이 가장 빠른 수술법을 선택했고, 다행히 실비보험의 도움을 받아 경제적인 짐도 덜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수술 후에도 예상치 못한 문제로 두 번의 재입원이 반복되었고, 출국을 단 일주일 앞둔 순간까지 우리는 병원을 제집처럼 드나들어야 했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진지하게 설득했다.
"물질적인 손해는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가 예약해 둔 모든 것을 포기하자. 당신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아. 지금은 몸이 먼저야."
하지만 아내는 자신이 직접 준비하고 꿈꿔왔던 그 8개월의 시간을 차마 포기할 수 없었다. 아내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엄격하게 관리하기 시작했다. 통증을 참아가며 식이요법과 휴식을 병행했고, 기적처럼 출국 직전에 아내의 모든 건강 수치가 정상 범위로 돌아왔다. 그렇게 우리는 모든 고난의 터널을 뚫고, 다시 유럽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국경을 넘을 때마다 자라난 우리 부부의 근육
그렇게 어렵게 시작된 여정이었기에, 나는 여행 내내 아내의 그림자가 되었다. 그녀의 보폭에 내 걸음을 맞췄고, 여행 초기엔 아침마다 그녀의 안색을 살피는 것이 나의 첫 번째 일과였다. 아내 역시 스스로를 다스렸다. 낯선 도시의 숙소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안전한 러닝 코스를 찾아 달렸고, 현지 식재료로 건강한 식단을 차려내며 체력을 관리했다. 덕분에 우리는 그 흔한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8개월의 강행군을 버텨낼 수 있었다.
우리의 여정은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시작되었다. 사바강과 다뉴브강이 만나는 요새의 노을을 보며 우리는 '건강하게 이곳에 왔음'에 감사했다. 이어지는 북마케도니아 오흐리드에서의 한 달은 '느림'이 주는 축복이었다.
몬테네그로 코토르 요새의 1350개 계단을 오를 때는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중세의 시간을 공유했다. 오흐리드 시장에서는 그곳의 문화를 모른채 물건을 고르다가 문전박대당하고, 사진 촬영 문제로 현지 경찰과 대치할 뻔했던 식은땀 나는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난관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크로아티아로 넘어와 '왕좌의 게임' 촬영지의 웅장함에 압도당하고, 플리트비체의 에메랄드빛 물줄기 사이로 무지개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여행이 주는 위대한 치유를 경험했다. 그리고 자다르에서 0.90유로의 빈 병 보증금을 환급받으며 깔깔거리던 소박한 일상은 직장인 시절에는 결코 알 수 없던 행복이었다.
새로운 여정의 예고, 양평 구옥, 그리고 또 다른 지도
| ▲ 추억을 가득 담은 캐리어, 무겁지만 가벼운 발걸음. 자그레브 공항으로 들어서는 나의 뒷모습. 유럽의 돌길을 누볐던 캐리어는 이제 묵직한 추억으로 가득 찼지만, 앞으로 펼쳐질 양평에서의 삶을 생각하니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 |
| ⓒ 김봉석 |
자그레브 터미널에 도착해 무거운 캐리어를 다시 끌며 생각에 잠긴다. 이곳에서의 하루가 지나면 이제 이 짐들을 풀 곳은 낯선 유럽의 숙소가 아니라 정겨운 한국의 우리 집일 것이다. 낡은 신발을 신고 뒤꿈치에 테이프를 붙여가며 닳도록 걸었던 이 길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단단한 용기다.
| ▲ 창가 너머 비행기에 담긴 지난 8개월의 여정. 이제 곧 우리를 한국으로 데려다줄 비행기를 바라보는 아내. 8개월 전, 설레는 마음으로 올랐던 비행기보다 지금 이 순간의 창밖 풍경이 더 깊고 아련하게 느껴진다. |
| ⓒ 김봉석 |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또 다른 의미의 '국경'을 넘으려 한다. 경기도 양평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유럽의 올드타운은 아니지만, 한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그곳의 시골 풍경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의 올드타운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는 양평을 시작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우리만의 속도로 유람하는 '국내판 세계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은퇴는 인생의 마침표가 아니라 긴 호흡을 위한 쉼표였다. 유럽의 낡은 버스가 목적지에 닿아 문을 열면 다시 새로운 승객을 태우듯, 우리의 삶도 자그레브 공항을 기점으로 다시 뜨겁게 태어날 것이다. 이제 우리는 8개월의 치열하고도 아름다웠던 추억이 담긴 캐리어를 닫고, 양평의 소소한 즐거움이 담길 새로운 지도를 펼치려 한다.
"안녕, 유럽. 그리고 고마워... 여보."
| ▲ 다시, 한국으로. 기내 창가에 앉아 출발을 기다리는 아내의 옆모습. 많은 일을 겪어내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얼굴에서 여행이 남긴 깊은 평화와 안도감이 느껴진다. 이번 여행으로 우린 더욱 단단해 졌다. |
| ⓒ 김봉석 |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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