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기의시대정신] 월드컵에 울린 총성
2026.03.09 23:22
청년층, 조국 패배 응원하며 반기
올핸 유혈사태 이어 美 공습까지
6월은 총성 아닌 함성이 가득하길
2022년 11월 29일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이란이 미국에 패해 16강 진출에 실패하자 테헤란 거리로 청년들이 쏟아져 나왔다. 승리가 아닌 패배를 축하하러 나온 이들이었다. 이란 북부의 한 조용한 항구 도시도 다르지 않았다. 스물일곱 살의 메흐란 사마크는 차 안에서 경적을 울리며 환호했다. 그 순간, 다가온 보안군이 그의 머리를 향해 근거리에서 실탄을 발사했다.
그해 가을 이란은 반정부 시위로 들끓고 있었다. 히잡 사이로 머리카락이 보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의문사한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이 불씨였다. 분노는 자국 대표팀의 패배를 응원하는 역설적인 시위로 번졌고, 현장에서 숨진 사마크는 공교롭게도 당시 국가대표 미드필더와 어린 시절 한 팀에서 뛰었던 동료였다. 한때 축구선수를 꿈꿨던 청년이 친구가 뛰는 월드컵에서 조국의 패배를 외치다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 |
|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전 KBS PD |
월드컵이 결승을 향해 달려가던 무렵, 반정부 시위에 가담했던 이란의 청년들은 체포된 지 불과 몇 주 만에 줄줄이 처형됐다. 스물세 살의 한 청년은 손발이 묶이고 머리에 검은 자루를 뒤집어쓴 채 공개 처형됐고, 그의 시신은 도심 한복판 공사용 크레인에 매달렸다. 이란 관영 매체는 경고의 의미로 이 처형 사진을 대중에 공개했다.
그렇게 4년이 흘러 2026년, 다시 월드컵의 해가 돌아왔다. 그사이 이란의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화폐 가치 폭락 등 경제난으로 폭발한 반정부 시위는 “독재자에게 죽음을(Death to the Dictator)”이라는 구호로 번졌다. 지난 1월, 인터넷이 차단된 가운데 대규모 유혈 진압이 벌어졌다. 이란 정부가 공식 발표한 사망자 수만 해도 3000명 이상, 일부 보도에 따르면 3만명에 이르는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거리에 시신이 쌓였고, 시신을 되찾으려는 가족에게 시신 값을 요구하고 있다는 처참한 소식도 들려왔다.
그리고 지난 2월 28일,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습으로 37년간 이란을 철권 통치해 온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사망했다. 멀리서 전해오는 이란 시민들의 반응은 파편적이다. 어떤 이들은 이맘의 죽음에 오열했고, 어떤 이들은 독재자의 동상을 끌어 내리며 환호했다. 이 격변이 오랜 억압 끝의 해방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긴 고통의 서막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국제사회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이란의 반격이 걸프 국가는 물론 나토 회원국인 튀르키예, 코카서스 국가인 아제르바이잔까지 번지며 20여개국이 전쟁의 자장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그 가운데 한 나라의 성명이 눈에 띈다. “미국 행정부가 국제법의 근본 원칙을 무시하고 자행하는 공격이 우려스럽다. 국제분쟁은 평화롭게 해결되어야 한다.” 러시아 외무부의 성명이다. 이건 또 무슨 유체 이탈 화법이란 말인가.
나는 8년 전 러시아 월드컵 중계 화면 속 러시아 청년들의 얼굴을 기억한다. 차이콥스키 피아노협주곡과 스트라빈스키 불새가 울려 퍼지던 개막식에서 그들의 얼굴은 자부심으로 빛났다. 8강 진출이라는 기적을 쏘아 올리며 자국 국기를 두르고 세계인과 뒤엉켜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그들.
카타르 월드컵에서 그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축구연맹(UEFA) 회원국 자격이 정지됐다. 다가오는 6월 북중미월드컵에도 참가할 수 없다. 8년 전 자국의 월드컵 축제에 열광하던 그 젊은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떤 이는 무고한 이웃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낯선 땅에서 처참하게 생을 마감했는지도 모른다.
권력의 속성을 몰라서인지, 그들이 말하는 거창한 사명이란 걸 체득해 본 적이 없어서인지 몰라도, 일흔여든의 정치인들이 새파란 청춘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비정함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다. 거대한 명분 아래 젊은이들이 피 흘려온 비극은 인류 역사에서 멈춘 적이 없지만, 이성과 합리를 자처하는 이 시대에도 이토록 당연하게 반복될 줄은 몰랐다.
6월이 오면 다시 월드컵이 시작된다. 각국의 청년들이 공 하나를 쫓아 전력을 다해 달리고, 골이 터지면 모르는 이와 얼싸안고, 패배의 순간에는 함께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 장면들은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다.
이 혼돈이 부디 이란 청년들이 목숨 바쳐 원했던 자유의 길로 이어지길 바란다. 4년째 서로를 겨누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청년들도 이제는 무기를 내려놓게 되기를 희망한다. 월드컵을 석 달 앞두고 울린 총성이 더 큰 희생 없이 정의로운 결말로 마무리되기를, 그래서 이번 6월은 총성이 아닌 뜨거운 함성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전 KBS PD
저작권 보호를 위해 본문의 일부만 표시됩니다.
원문 보기 →댓글 (0)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월드컵의 다른 소식
모든 소식을 불러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