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Aview 로고

VIEW

지나
지나
아들뻘 연하남 쥐고 흔든 ‘버진 퀸’…배신·불륜 얼룩진 처절한 아리아 [고승희의 리와인드]

2026.03.09 14:39

세아이운형문화재단 ‘로베르토 데브뢰’
32살 연하남 사랑·배신한 엘리자베스 1세
16세기 사각관계가 만든 비극적 세레나데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에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역을 맡은 최지은(오른쪽)과 사라 역의 김정미(왼쪽) [세아이운형문화재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절정을 지나버린 때였다. 50대에 접어든 중년의 여성. 그에겐 ‘정신적 교감’을 나눈 ‘영원한 연인’은 있었지만, 결혼은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어느 날 여자 앞에 길들지 않는 야생마 같은 청년이 등장한다. 그의 나이는 21세. 자신보다 32살 어린 청년은 무모하고 오만했다.

눈부시도록 젊고 활기가 넘치는 청년. 모두가 눈치를 보며 자기 앞에서 고개를 조아릴 때도, 오직 이 어린 청년만은 당당했다. 푸릇한 당돌함을 거부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여자는 한참이나 어린 청년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청년은 여자와 일생 ‘관념적 사랑’을 완성한 연인의 의붓아들이었다. 둘의 사랑은 14년이나 뜨겁게 타올랐다.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가 본편에선 생략한 전사(前史)다.

이 오페라는 16세기 영국 튜더 왕조의 실존 인물인 엘리자베스 1세와 그의 총애를 받은 에식스 백작 로베르토 데브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 실제 역사에선 두 사람이 연인이었을 가능성만 암시됐을 뿐,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가에타노 도니체티는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 영국 역사상 치명적이고 위험한 사각 관계를 담은 오페라를 만들었다. 그게 바로 도니체티의 ‘여왕 3부작’ 중 마지막 편인 ‘로베르토 데브뢰’다. 오페라는 1837년 이탈리아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에서 초연, 유럽 전역에서 성공을 거뒀다. 대본은 살라토레 카마라노가 썼다.

‘로베르토 데브뢰’는 지난 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콘서트 오페라로 관객과 만났다. 일 년에 딱 한 번, 매해 3월 찾아오는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의 ‘고퀄리티’ 공연이다. 국립오페라단 이사장과 후원회장을 역임하며 오페라와 클래식 음악에 대한 극진한 애정을 가져온 고(故) 이운형 회장의 유지를 이어온 재단(이사장 박의숙)이 꾸준히 선보이는 오페라 공연은 수준 높은 음악과 연출, 실력 있는 성악가들로 해마다 ‘오페라 애호가’와 입문자들이 호사를 누리는 공연이다. 전석 무료로 열리기 때문이다.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의 로베르토와 사라 [세아이운형문화재단 제공]


이번 공연에선 표현진 연출가가 무대를 매만졌고, 국내 최정상 악단인 서울시립교향악단이 곡을 연주하고, 데이비드 이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가 지휘를 맡았다.

사실 오페라는 어려운 장르다. 수백 년 전 만들어져 고전이 됐고, 동시대 관객에겐 이해가 어려운 정서와 스토리가 많다. 게다가 성악가들이 부르는 노래는 대부분 시적이라 서사와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클래식 음악을 즐겨듣지 않는 관객이라면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음악을 흥미롭다고 느끼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로베르토 데브뢰’는 그런 면에 보면 비교적 쉬운 오페라다. 우선 아침 드라마 못지않은 막장 사각 관계라는 선명한 스토리 구조가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이 오페라엔 4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소프라노 최지은)과 그를 둘러싼 복잡한 관계로 얽힌 세 사람이다. 여왕의 연인인 매력적이고 야심 넘치는 청년 로베르토 데브뢰(테너 김범진), 그의 친구인 노팅엄 공작(바리톤 최인식), 데브뢰와 사랑에 빠지는 공작의 아내 사라(메조소프라노 김정미) 등이 그 주인공이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어느덧 늙고 지친 여왕은 로베르토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그의 연인을 밝히기 위해 ‘의처증의 화신’이 된다. 여왕의 총애와 사랑을 받지만, 마음은 사라에게 빼앗긴 로베르토. 하지만 사라는 여왕이 맺어준 노팅엄 공작과 결혼 생활에 한창이다. 사라 역시 여왕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친구다. 노팅엄 공작은 로베르토의 절친이자 정치적 후원자였다. 반란군 진압에 실패해 반역죄의 누명을 쓴 로베르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서지만, 친구가 자기 아내와 내연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되며 파국으로 치닫는다.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 [세아이운형문화재단 제공]


콘서트 오페라여서 오케스트라가 무대 위로 올라와 있지만, 그래도 관객들은 상징적 장치와 조명, 의상 등을 통해 16세기 튜더 왕조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노래와 연기의 조화를 강조하는 표현진 연출가는 성악가 한 사람 한 사람의 동선과 몸짓, 표정 변화를 조율, 이야기의 밀도를 높였다. 특히 이탈리아 낭만주의 오페라가 즐겨 쓴 소품을 통한 극적 장치가 이 무대에서 보다 선명하게 그려졌다. 로베르토에게 준 사라의 푸른 스카프, 여왕이 로베르토에게 준 반지가 네 사람의 심리적 붕괴를 치밀하게 드러냈다.

‘로베르토 데브뢰’는 도니체티의 70여 편에 달하는 오페라 중에서도 음악적 구성이 가장 치밀하고 극적 응축이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벨칸토 시대의 정점에 있는 이 작품에서 도니체티는 인물의 감정을 선율의 형태와 오케스트레이션으로 긴밀하게 연결했다.

이 오페라는 아름다운 노래에도 불구, 여왕 역할의 엄청난 난이도로 자주 오르지 못하는 작품 중 하나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전 음역대를 넘나드는 극악의 가창력을 들려줘야 하고, 여왕의 권위와 함께사랑의 행복, 사랑으로 인한 불행과 상처, 절규와 광기를 동시에 소화해야 한다.

소프라노 최지은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흥미로웠다. 1막에서의 카바티나(오페라 주역 가수가 무대에 처음 등장해 부르는 아리아) ‘그의 사랑은 나를 행복하게 했네(L’amor suo mi fe‘ beata)’에선 로베르토를 향한 순수한 애정을 콜로라투라(coloratura, 기교적으로 장식된 선율) 기법으로 표현한다. 여왕의 권위와 지엄한 신분 뒤에 감춰진 여인의 순수한 감정을 마주하게 되는 장면이다.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 [세아이운형문화재단 제공]


이 아리아를 시작으로 여왕의 변화는 시시각각 포착된다. 로베르토와의 이중창 ‘다정한 마음이 내게 기쁨을 주었지’에선 로베르토의 변모를 힐난하며 그의 연인이 누구냐고 추궁한다. 3막의 마지막으로 향하면 ‘로베르토 데브뢰’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여왕의 아리아가 두 곡이나 이어진다. 로베르토의 처형 직전 부르는 아리아 ‘살아가라, 배은망덕한 자여, 그녀의 곁에서(Vivi, ingrato, a lei d‘accanto)’는 칸타빌레 선율에 여왕의 비통함이 담겼다. 가슴을 치며 여왕은 “당신을 용서했으니, 제발 살아남으라”며 슬픔을 토해낸다. 가볍지 않은 여왕의 목소리에 실린 섬세한 감정이 객석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러나 처형을 알리는 대포 소리가 들리자, 여왕은 이성을 잃는다. 광기에 휩싸여 부르는 카발레타(cabalette, 분위기를 전환해 화려한 기교를 뽐내는 곡) ‘흘려진 저 피가(Quel sangue versato)’에선 여왕의 절규가 극적으로 그려진다. 최지은은 사랑과 정치권력의 추락을 옥타브 아래로 떨어지는 음들을 그리며 실성하고 만다.

이 오페라를 쓸 당시 도니체티는 개인의 삶에서도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냈다. 1836년 부모가 연이어 세상을 떠났고, 1937년 6월엔 갓 태어난 아들이, 같은 해 7월 30일엔 아내가 목숨을 잃었다. 아내의 죽음 이후 한 달 만에 이 오페라의 작곡과 연습이 시작됐다. 도니체티의 피눈물이 써 내려간 음악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배신과 죽음에 대한 예감으로 담겼다. 여왕의 마지막 곡은 도니체티가 아내와 아들을 잃고 느낀 상실과 고통이 스며 폭발적 감정의 파동을 만든다.

표현진 연출가는 프로그램 북을 통해 “‘로베르토 데브뢰’에서 관객들은 화려한 왕관 아래 숨겨진 나약한 인간의 처절한 고독을 목격하며 격정적인 음악의 울림에서 여왕의 깊은 고통을 함께 경험한다”고 했다. 연출가의 예상은 적중했다. 여왕이 쓰러지며 노래를 마치자, 객석에선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최지은은 폭넓은 스펙트럼과 절제된 감정 표현, 완벽한 호흡 조절을 통해 한 인물의 복합적인 심리를 음악으로 견고한 건축물처럼 세웠다.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 [세아이운형문화재단 제공]


영웅적이면서도 서정적 면모를 갖춰야 하는 로베르토는 청량하면서도 단단한 소리를 가진 김범진이 완벽하게 소화했다. 청년 로베르토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하듯 짱짱한 목소리로 부르는 3막 런던탑 장면의 아리아 ‘천사의 영혼처럼(Come uno spirto angelico)’에선 사라의 명예를 지켜주려는 로베르토의 결의가 새겨졌다. 부드러운 레가토와 고난도 장식음, 치솟는 고음을 능수능란하게 소화한 김범진이 그린 로베르토의 마지막은 명예로웠다.

우정과 사랑에 배신당해 로베르토의 처형을 주도하는 노팅엄 공작 역의 최인식은 단단한 저음과 압도적 성량, 정확한 음정으로 등장 때마다 오페라의 중심을 잡아줬다. 사라 역의 김정미 역시 안정감과 깊이로 비련의 여주인공을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성악가들의 노래를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은 극적인 벨칸토 음악을 섬세하고 강렬하게 구현해 비극의 정서를 표현한 서울시향과 데이비드 이 지휘자였다.

이 공연은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의 예술 후원 철학이 맺은 결실이다. 재단은 2024년 ‘청교도’, 2025년 ‘루살카’에 이어 ‘로베르토 데브뢰’까지 3년 연속 국내 무대에선 쉽사리 오르지 않는 오페라를 올리며 예술계 다양성을 확장하고 있다. 특히 재단이 발굴하고 후원해 온 음악가들이 주역으로 대거 참여, 재단의 뚝심 있는 지원이 결실을 보는 무대이기도 했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공연계 관계자는 “해마다 올라오는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의 공연은 진입장벽이 높은 오페라 장르의 저변 확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천편일률적 작품을 벗어나 새로운 오페라를 선정해 높은 수준으로 보여줘 오페라 애호가들에게도 취향을 확장할 수 있게 해주고, 입문자들에겐 무료 공연이라는 이점으로 오페라의 문턱을 쉽게 넘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한국 오페라계의 성장과 발전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저작권 보호를 위해 본문의 일부만 표시됩니다.

원문 보기 →

댓글 (0)

0 / 1000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지나의 다른 소식

지나
지나
11시간 전
우주에서 신약 연구하고, 제조·발전·운송·광업까지... ‘우주 이코노미’ 시대
지나
지나
12시간 전
폐 이식 받은 가수 유열, 생명나눔 공동 홍보대사 위촉
지나
지나
12시간 전
‘영주시민 건강걷기대회’ 14일 개최
지나
지나
13시간 전
"봄바람 타고 7km 건강 레이스"...영주시, 14일 시민 걷기대회 개최
지나
지나
13시간 전
지휘자의 소통법…저자 김진수[신간]
지나
지나
13시간 전
담기부터 나누기까지, 직접 해보는 우리 장 만들기
지나
지나
14시간 전
'7년투병' 폐이식 받은 가수 유열…생명나눔 홍보대사로
지나
지나
14시간 전
"폐이식으로 새 삶" 가수 유열 '생명나눔 공동 홍보대사' 위촉
지나
지나
14시간 전
문지혁 “오토픽션, 몸을 가진 작가의 경험이 담긴 이야기”
지나
지나
14시간 전
1년 지나도 발견되는 유해…제주항공 참사 수습 도마 위에
모든 소식을 불러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