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여성·퀴어·정신질환자도 즐기는 ‘여성의 날’… “성평등은 모두를 위한 것”
2026.03.07 19:56
함께 페미니즘 책 읽고 ‘춤추는 효능’까지 권해…
비장함 대신 ‘즐거움’으로 채운 여성의 날
"오늘만큼은 우리의 날이잖아요!"
7일 오후, 페미니스트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경복궁 담장을 넘었다. 이날 서울 광화문 서십자각 앞에서 열린 한국여성대회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365일 중 단 하루뿐인 '여성의 날'. 이날을 기념하는 행사라면 어쩐지 비장한 마음이 필요할 것만 같지만 현장을 찾은 이들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부스를 돌아다니며 받은 홍보물과 굿즈를 수집하러 다니고,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들과 기념 사진을 찍느라 바쁜 페미니스트들에게 오늘, 이곳에 온 이유를 물었다.
양손 가득 굿즈를 챙긴 준희, 찬양씨는 포토월 앞에서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들은 여성대회에 온 이유를 '연결감'이라고 했다. "모르던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죠." 준희씨는 여성신문에 "여기 오면 여성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단체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고 전했다.
"페미니스트 명절인데 안 올 수 없죠!"
30대 여성 페미니스트인 송수민씨는 "여성대회에 오면 여기저기서 인사할 사람도 많아 반갑다"며 "즐거운 날"이라고 했다. 다양한 부스에서 굿즈를 모아왔다며 자랑한 수민씨는 '간호사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널싱 페미'부스에서 의료계 성차별에 대해 깊이 있는 설명을 들었던 것을 이날 가장 인상적인 순간으로 꼽았다.
사귄 지 100일이 됐다는 20대 커플도 여성대회를 찾았다. 문다예씨는 "항상 오고 싶었는데, 오니까 사람들이 여성의 날을 맞아 함께 연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여자친구의 제안으로 따라왔다는 김상엽씨는 "다양한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재밌다"며 소감을 밝혔다.
이주여성인 전지수씨(베트남 이름 지)는 가족과 함께 여성의 날을 즐기러 왔다. 지수씨는 "여성의 날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며 "오늘은 아들인 상재에게 직접 여성의 날의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 함께 왔다"고 했다. 지수씨와 함께 온 7살 이상재 어린이는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수줍어하며 답해주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부스를 구경하던 강석환씨와 강아론(Aaron Kang)씨도 여성대회를 찾은 가족이다. 석환씨는 "우리는 독일에서 결혼한 동성애자 커플"이라며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연대하는 마음으로 이곳을 찾았다"고 밝혔다.
논바이너리인 이한결씨는 'NO EXCUSE(변명은 그만)'라는 글자가 쓰인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지난해 한국여성의전화 여성 살해 규탄 퍼포먼스에 참여하며 받은 옷이라고 했다. 한결씨는 "여성뿐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삶 경험해 본 사람들도 여성폭력과 차별의 피해자 될 수 있다. 남성으로서 살았던 사람들도 가해자가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라며 "성평등은 모두에게 좋은 것이잖아요"라고 말했다.
"춤의 효능! 퀴어 페미니스트가 춤을 추면 얻을 수 있는 효과, 지금 바로 체험!" 루시아, 시옷, 주하씨는 사람들에게 '루땐'을 알리는 장난스러운 홍보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홍보물도 나눠주고 구경도 하러 왔다고 밝힌 루시아씨는 "루땐은 퀴어페미니스트 댄스 공간으로, 외모와 실력에 대한 어떠한 차별도 없이 편안하게 춤출 수 있는 공간"이라며 기자에게도 춤의 효능을 느껴볼 것을 권했다.
바닥에 앉아 책을 읽는 참여자들도 눈에 띄었다. 한 참여자는 기자에게 신성아 작가의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을 소개하며 "아이가 백혈병에 걸려 간병을 하면서 느낀 돌봄 부정의를 여성으로서, 페미니스트로서 쓴 수필"이라고 추천했다. '페미니즘'이 금기어로 통하는 사회에서는 공공장소에서 페미니즘 책을 읽는 것마저도 신경 쓰인다. 한국여성민우회 회원팀 활동가 다혜씨는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다들 광장에 모이는 날이니까 페미니즘 책을 덮개 없이, 두려움 없이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자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광장에 모인 페미니스트들에게 사안을 알리려 나온 참여자들도 많았다.
젠더폭력해결페미니스트연대는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를 맞아 집중 행동을 위한 연서명을 받고 있었다. 함께 서명을 받던 동서울여성회 관계자는 "올해 강남역 10주기다. 그러나 지금도 서울 강남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여성이라는 이유, 여성답지 못하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을 겪는 경우가 많다"며 관심을 호소했다.
정신질환 고립 경험한 당사자들이라고 밝힌 '펭귄의 날갯짓' 활동가 지선, 광호씨는 "우리는 광인, 여성, 생활곤란자, 부적응자, ( )이며 시민입니다. 여성의 날 = 모두의 해방"이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왔다. 광호씨는 "정신질환, 고립 경험자들이 쓸모 없다는 인식이 있다"며 "쓸모가 없어도 모두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펭귄의 날갯짓'은 수원에서 정신질환과 고립을 경험한 당사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정당 부스 앞에는 '차별금지법 오픈마이크'가 열렸다. 마이크 앞에 선 사람들은 "차별금지법 가능해"를 외치며 정당들에 차별금지법에 대한 관심을 재치 있게 촉구했다. "기본소득당, 조국혁신당 분들도 오셔서 한 말씀 부탁합니다! 함께 오셔서 우리 이번에 차별금지법 제정이 반드시 될 수 있도록 만들어요!"
한편 '8년 동안 성폭행 피해자 2차 가해하는 유행열(청주시장 예비후보) 민주당은 징계하라'고 쓰인 피켓을 든 이들이 부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서명을 받고 있었다. 지난 2018년 유행열 전 청와대 선임행정관은 차모씨의 '미투' 고발에 청주시장 선거 예비후보에서 중도 사퇴했지만,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 출마를 선언했다. 또한 유 전 선임행정관은 "미투는 정치공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성대회 참여자들에게 문제를 알리고자 가족들과 나왔다는 차모씨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고통스러운 날이라며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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