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 도파민 터지는 핑크 팬더의 신전으로 [김지은의 아트 레이더]
2026.03.06 20:12
(4) 캐서린 번하드
아이돌의 팬 사인회도 아닌데, 사진을 찍기 위해 늘어선 줄이 길었다. 현대미술 전시장에서 흔히 목격되는 풍경은 아니다. 트레이드 마크인 초록 테 안경을 쓰고 핑크색 립스틱을 바른 채, 정성껏 포즈를 취해주고 한 사람 한 사람 집중해서 대화를 나누는 작가 캐서린 번하드. 나는 긴 줄에 서는 대신, 그녀의 전시 동반 여행에 자주 동행하는 아들 칼리파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자신의 이름이 아랍어로 ‘리더(Leader)’라는 뜻이며 한국에 머무는 동안 매일 불고기를 주문해 먹었다는 취향 확고한 소년에게 물었다. “칼리파, 엄마 작품의 가장 멋진 점은 뭐라고 생각하니?” 소년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엄마는 완벽하지 않을 배짱이 있어요(She is brave enough not to be perfect). 특히 희석된 아크릴 물감이 캔버스 위로 뚝뚝 흘러내리는 ‘드리핑(Dripping)’ 부분을 저는 좋아해요. 엄청 자유롭게 느껴지거든요.”
무릎을 치게 하는 답이었다. 번하드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예리한 비평이자 대중과 평단이 동시에 그녀에게 열광하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한 번만 보면 그녀의 작품임을 알게 하는 즉각적 식별성은 우선 색채에 있다. 형광 핑크라는 지극히 인공적이고도 도발적인 색채를 이렇게 과감히 쓴 작가는 없었다. 그녀가 탐닉하던 1980년대 팝컬처의 네온컬러는 도시의 전광판이 아닌 그녀의 캔버스 위에 휘황하다. 한편, 너무 사소해 예술의 문턱 밖에 머물던 일상 소비재들은 또 어떤가. 화장지와 담배, 핑크 팬더와 크록스, 그리고 나이키 스우시까지. 하찮은 일상의 파편들은 기념비적으로 큰 스케일로 확대돼 시대의 아이콘으로 격상된다. 우리가 매일 소비하는 것들이 우리의 정체성임을 보여주는 ‘현대적 정물화’에는 색채에도 소재에도 위계란 없다. 그 자체로 전복적이다. 매끄러운 여신의 목욕 장면 대신 초록 타일 샤워부스에서 거품 목욕하는 핑크 팬더를 보라. 엄숙한 미술관을 일상으로 데려오고, 사라진 유머를 미술관으로 되돌려준 그녀 덕분에 관객들은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시각적 즐거움과 유쾌함을 만끽한다.
고상함과 통속의 경계를 어깨 힘 빼고 날렵한 속도로 무너뜨린 그녀에게 ‘현대성’의 실체를 물었다. ‘화가들의 화가’이자 가장 ‘현대적인’ 아티스트로 손꼽히는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녀는 이집트 한 피라미드의 코발트블루 천장에 새겨진 금빛 별들을 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5000년 전의 유산임에도 그 별들은 매우 현대적이었다. 인류가 공유해온 보편적 재료일지라도, 시대의 고유성을 독창적인 기법으로 빚어냈다면 시대를 막론하고 현대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미국 세인트 루이스(St.Louis) 약 200평 규모의 자동차 정비소를 개조한 작업실에서 한 손에는 아크릴 물감을, 다른 한 손에는 스프레이를 들고 밑그림 없이 바로 그림을 그려버리는 그녀 작품의 현대성은 어디에 있을까.
“인터넷을 통해 뭐든 볼 수 있고 일회용품 쓰듯 이미지들도 일회적으로 소비해요. 과도한 자극을 끝없이 받는 바람에 집중 시간은 계속 짧아지고 있고 몇 시간씩 스크롤을 내려 훑어보고, 너무 많은 시각 정보를 손끝 하나로 그 자리서 흡수하지만 정작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저는 매우 ‘현대적인 상황’이라 생각해요. 제 관심은 쉽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것들이 어떻게 상징적 의미를 획득하는지, 그리고 회화가 그 빠른 흐름을 어떻게 잠시 멈춰 세워 대상의 본질을 붙잡아둘 수 있는지에 있어요. 피넛 버터와 담배, 패스트푸드와 화장지 같은 소비재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주는 일종의 ‘시각적 축약어’입니다. 제 작업의 느슨한 스타일과 거대한 스케일, 강렬한 색채는 과잉 자극된 우리 세계의 반영이며, 일부러 어수선하게 표현하는 제작 기법 역시 저의 의도입니다. 우리의 현대적 삶 역시 정리정돈이 잘 안 되니까요. 끝으로 스프레이와 아크릴이라는 재료를 새로운 방식으로 혼합해 전례 없는 패턴과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행위 역시 제 작업의 현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품의 현대성을 정확히 의식하고 있는 번하드가 생각하는 우리 시대의 ‘현대적인 화가’는 누구일까. 그녀는 주저 없이 브라이언 벨롯(Brian Belott)을 꼽았다. 치약과 양말, 계산기와 솜뭉치 등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재료 삼아 콜라주와 그리드 속에 펼쳐내는 그는, 무엇이 ‘진지한 예술’인가에 대한 전통적인 위계질서에 가장 도발적으로 균열을 내는 작가다. 한편, 매끈한 선과 과감하게 크롭(Crop)된 평면적이고 이미지 중심적인 98세의 거장 알렉스 카츠도 빼놓을 수 없다. 마치 소셜미디어(SNS)의 프레임을 캔버스 위로 옮겨놓은 듯 오늘날의 시각 문화와 긴밀하게 호응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현대적 관심은 문화 전반의 아이콘들로 거침없이 뻗어 나간다. 배우라는 틀을 깨고 패션과 미술의 영역을 우아하게 가로지르는 티모시 샬라메, 그리고 마트 직원에서 라틴 트랩의 제왕이 된 배드 버니가 대표적이다. 특히 글로벌 슈퍼스타가 된 뒤에도 고향 푸에르토리코의 전통음악을 결합한 역사적인 공연을 선보인 그의 행보는, 지극히 로컬한 정체성이 어떻게 전 지구적 동시대성을 획득하는지 증명해낸 결정적 장면이었다. 여기에 2025년 말 넷플릭스를 달군 제이크 폴과 앤서니 조슈아의 복싱 경기까지 더해지면 번하드식 현대성의 지도는 완성된다. 유튜브 스타로 대변되는 디지털 네이티브와 정통파 챔피언의 링 위에서의 충돌은, 스포츠를 넘어 스트리밍과 SNS가 지배하는 대중문화의 가장 노골적인 현대판 자화상이었으니.
그녀가 불러낸 인물들은 미디어의 카테고리에 고착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오늘날의 세계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 ‘경계 없는 자유로움’은 캐서린 번하드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기도 하다. 망막을 자극하는 도발적인 색채, 고급문화와 하위문화가 무위계로 재편되고 스프레이와 아크릴이 충돌하며 빚어내는 독창적인 기법까지. 그녀의 캔버스는 동시대성을 자신만의 대담한 언어로 통과시킨 가장 현대적인 기록물이다. 언젠가 세인트루이스의 그 거대한 정비소 작업실에 들러, 형광 핑크색 물감이 튀어 있는 작업대에서 작가가 사랑하는 햄버거고기, 블랙올리브, 버섯이 올라간 이모 피자(Imo’s Pizza)를 함께 시켜놓고 ‘위대한 예술’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지금 살아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사소하지만 지극히 현대적인 즐거움을 만끽해보리라.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49호(2026.03.04~03.1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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