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 27명이 모두 영화·드라마에… 한국은 왜 사극에 빠졌나
2026.03.07 00:31
‘왕사남’ 천만 돌파
유별난 역사물 사랑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한국 영화론 25번째다. 569년 전 조선 왕의 짧은 생을 그린 이 작품은 개봉 한 달여 만에 파죽지세로 흥행 돌풍을 이어가고 있다.
놀라운 풍경은 아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가 극장가를 점령하며 사회·문화적 이슈가 되는 ‘사극(史劇) 블록버스터’ 현상은 지난 20여 년간 한국 영화 특유의 문법으로 자리 잡았다. TV 드라마와 뮤지컬, 웹툰과 게임에 이르기까지 정통 시대물 또는 역사적 배경이나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팩션(faction·역사에 근거한 허구)이 흥행 보증수표처럼 통한다.
우리는 왜 그토록 사극을 사랑하는 걸까. 가치관의 혼란과 분열의 시대, 역사의 더미를 뒤져 현재의 좌표를 찾고, 모두가 같은 고난을 극복해온 공동체의 정서를 회복하려는 열망이 투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 천만 영화 48%가 시대물
한국의 천만 영화는 시대물이 그 역사를 써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대 김일성 참수부대를 소재로 한 ‘실미도’가 2003년 국내 첫 천만 관객을 달성한 이래, 6·25전쟁 속 형제애를 다룬 ‘태극기 휘날리며’(2004), 연산군 시대 광대의 삶을 그린 ‘왕의 남자’(2005)가 연달아 히트했다.
역대 관객 수 1위 영화도 ‘명량’(2014)이다. 구국의 영웅 이순신이 무려 1761만명, 국민 3분의 1 이상을 극장으로 불러냈다. 2위 역시 전쟁·산업화 세대 애환을 그린 ‘국제시장’(2014)이다.
한국의 역대 천만 영화 25편 중 시대물이 12편(48%)으로 가장 많고 액션·코미디·드라마 등이 나머지를 나눠 갖는 구도다. 천만에는 못 미쳐도 ‘관상’(913만) ‘해적’(866만) ‘최종병기 활’(747만) ‘한산’(726만) 등 크게 흥행한 사극이 즐비하다.
이는 세계에서 드문 현상이다. 미국의 경우 박스오피스 매출 톱 20에 포함된 시대물은 1990년대 작품인 ‘타이타닉’과 ‘포레스트 검프’ 두 편뿐이다. 할리우드의 강자는 상상 속 히어로를 내세운 액션과 미래 SF물.
일본도 애니메이션 형태의 판타지나 휴먼 드라마가 압도적이다. 중국은 중화사상과 항일 투쟁을 내세운 역사물 비중이 높은 편이지만 한국의 사극 사랑에 비할 바는 아니다.
국내에서 나오는 제작비 30억원 이상의 상업 영화 중 상당수가 역사물이다. 올해도 ‘몽유도원도’ ‘국제시장 2’ ‘암살자(들)’ 등 시대물이 줄줄이 개봉 대기 중이다.
영화진흥위원회는 2019년 ‘실화 기반 영화 제작을 위한 가이드라인’에서 사극·시대물에 자본이 몰리는 현상을 짚으면서 “영화가 현실과 유사한 정보를 제공할 때 관객의 몰입이 배가되고, 실제 사례를 재조명해 현실의 사회 문제를 환기하고 해결하는 역할까지 한다”고 했다.
TV 드라마에서도 사극 열풍은 뿌리깊다. 1980년대 ‘조선왕조 오백년’부터 ‘용의 눈물’ ‘모래시계’ ‘허준’ ‘대장금’ ‘해를 품은 달’ ‘추노’ ‘미스터 션샤인’ ‘옷소매 붉은 끝동’ ‘고려거란전쟁’과 ‘폭군의 셰프’에 이르기까지, 정통 대하사극뿐만 아니라 액션·멜로·드라마·코미디마저 ‘시대의 옷’을 입을 때 인기가 폭발하곤 했다.
한국인은 왜 역사물을 좋아할까
서양에선 역사 영화를 코스튬 드라마(costume drama)라고 한다. 화려한 의상과 전쟁 스펙터클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는 뜻이다. 해외 팬들이 한국 사극을 그런 차원에서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오랜 사극 열풍은 ‘눈요기 효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사극 인기의 배경으론 우선 한국인들이 허구의 이야기에서도 유독 진실성과 현실성을 따진다는 점이 꼽힌다. 문학이든 영화든 순수한 상상으로 빚어낸 판타지나 무협지 스타일은 “뻥이 세다”며 싫어한다. 외부 세계를 객관적으로 재현해내는 사실주의 사조가 우세하다. 작가·감독들은 새로운 것을 창작하기보다는 이미 익숙한 서사와 실존 인물을 ‘재해석’하는 것을 안전하다고 여긴다.
또 파란만장한 반만년 역사를 거쳐오며 민족적 자각과 뿌리를 찾는 정서가 깊고, 과거 사건과 인물을 탐구해 교훈을 찾아내는 문화도 강하다는 점이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책 ‘천만 관객의 영화 천만 표의 정치’에서 “역대 천만 영화를 분석해보면 로맨스·판타지는 약하고 권력과 사회 부조리를 짚는 사회성이 짙게 나타난다”고 했다. 휘발되는 오락보다는 지적 만족감과 공동체의 교감을 선호하고, 이것이 시대물 열풍을 낳는다는 것이다.
박유희 영화 평론가는 “사회의 급격한 지각 변동으로 현재의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운 시기에 역사물이 유행하는데, 한국에서 역사물이 유행하지 않은 시기를 찾기 어렵다”고 했다. 실제 6·25 직후인 1950년대 후반에만 ‘춘향전’ 등 사극 영화가 매년 10여 편씩 쏟아졌다. 1960년대 첫 사극 드라마 ‘국토만리’를 필두로 TV·라디오에서도 역사물이 주를 이뤘다.
사극 열풍은 민주화까지 이룩한 고도 성장기였던 1990년대엔 주춤했지만 21세기 들어 되살아났다. 이는 2000년대 초 월드컵 개최로 민족주의 감성이 고조된 반면, 국내 정치·이념 갈등이 심화하고 북한 핵실험, 중국 동북공정 등 대외적 긴장 역시 커진 것과 관련 있다. 이때부터 절대 왕권과 붕당 정치, 외침과 분단 등 국난을 소재로 한 영화가 본격적으로 쏟아졌다.
미국에선 백악관이 등장하는 정치 드라마에서 현실 권력을 직접 비판·풍자한다. 반면 정권 교체와 정치 보복이 잦은 한국에선 이런 현안을 정면으로 다루기 어려워 그 우회로로 과거사를 택한다는 해석도 있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는 “대중은 사극을 통해 바람직한 지도자상, 위기를 극복한 백성의 공동체 의식 같은 시대의 결핍과 갈망을 투영한다”고 했다.
사극의 진화는 계속된다
헝가리 문예 사상가인 게오르그 루카치는 ‘역사소설론’에서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렸지만 원인 파악이 어려울 때, 찬란했던 과거의 기록 또는 동일한 문제를 극복했던 공동체의 경험을 확인하기 위해 역사를 끌어와 과거를 재서술한다”고 했다. 한국 사극 영화·드라마는 과거 이야기에 현재 정치·사회 코드를 마음껏 담아낸다는 점에서 이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하지만 역사학계에선 영화판이 역사를 자유자재로 현실 담론화하는 데 대한 우려가 크다. 사실(史實)에 기반을 둔 객관적 역사 인식보다 지금의 필요에 따라 과거를 재단하고 소비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김기봉 교수는 “많은 사극은 정통 학계의 해석과 고증을 벗어난 일종의 ‘역사 추상화’”라면서 “그런 콘텐츠가 각광받는다는 건 역사가들이 사실에 매달리느라 대중과 소통하는 역사를 생산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라고 했다.
사극이 많아 보이지만 그 배경의 90% 이상이 조선시대에 편중돼 있다고 한다. 조선 왕 27명 중 영화화되지 않은 인물이 없고, 그중에서도 광해군, 연산군, 사도세자, 계유정난 등 극적인 왕실 스캔들에 집중된다. 조선시대가 자주 다뤄지는 건 심리적으로 가깝고 고증이 쉬워서이기도 하지만, ‘일제 강점과 남북 분단 이전의 좋았던 시대’라는 국민적 환상이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 영화 평론가는 “조선 왕들의 누적된 선택이 결국 조선 멸망과 내전으로 이어진 것 아닌가. 유교 위정자들의 판단 착오와 무능이 사극 멜로와 영웅담에 가려지고 있다”고 했다.
과거 사극 영화·드라마는 권력 투쟁과 전쟁사, 민족주의 감성 일변도였다. 요즘은 사극의 외피를 입은 다양한 장르가 시도되면서 주제도 역사 인물 내면의 고뇌와 인간적 면모, 백성의 주체성과 연대 의식, 아웃사이더에 대한 연민, 시간여행 로맨스 등으로 확대됐다.
역사물 관객층도 중장년·남성에서 남녀노소·가족 단위로 넓어졌고, 글로벌 OTT를 통해 해외 관객의 K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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