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자고? 6가지 질문에 먼저 답하라
2026.03.05 15:36
| ▲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지난 2월 7일 오후 열린 박정현 부여군수의 출판기념식에 참석해 박 군수와 악수하고 있다. |
| ⓒ 박정현 부여군수 페이스북 |
2018년 미투운동 이후 많은 성폭력 피해들이 수면위로 드러났다. 8년이 지난 지금, 미투운동을 통해 고발된 성폭력 가해자, 그리고 2차 가해자들이 속속들이 종전 일터로 복귀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지난 2월 7일 박정현 부여군수의 출판기념회에 위력성폭력 가해자 안희정이 등장하여 언론을 탔다. 지난해 말에는 안희정 성폭력 사건 피해자에 대한 명예훼손 및 모욕 혐의로 유죄가 확정된 어청식씨가 아산시장의 정책보좌관으로 들어가려다 피해자의 문제 제기로 사직했다. (관련 기사: 김지은 "안희정 성폭력 2차 가해자 직위해제 해야"... 당사자 "사직서 내", https://omn.kr/2giy7)
지난해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와 올해 초 개봉한 <왕과 사는 남자>에는 2018년 동료배우 성추행으로 고발되었던 배우 오달수가 연달아 출연하기도 했다 (경찰은 오달수에게 제기된 의혹에 대해 2019년 내사를 종결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부산지방경찰청 관계자는 "범죄 혐의가 없다고 판단해서가 아니라 공소시효가 만료돼 내사를 종결한 것"이라고 밝혔다).
미투운동으로 고발된 사건들 중에는 가해자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떤 경우는 공소시효가 지나서, 또는 가해자가 사망해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공소시효가 지난 것을 '무혐의'나 '무죄'로 주장하면서 가해자를 감싸는 여론도 생겨났다.
지금 당장 2018년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발 영상에 달린 댓글만 봐도 그렇다. 가해자가 사망한 사건들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가해자 편을 들며 피해자를 '살인자'라며, 거짓말로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꽃뱀' 취급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어떻게든 가해자에게 법적 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야 했다. '유죄 확정판결'만이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인정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법적 처벌이 끝나면, 정말 끝난 걸까?
| ▲ 우리 사회는 피해자의 회복에 얼마나 신경 써왔나? |
| ⓒ unsplash |
다행히 법적 책임을 지게 할 수 있었던 사건들은 있었지만 이 과정 역시 절대 수월하지 않았다. 안희정 사건의 경우 재판과정과 안희정이 감옥에 있었던 3년 6개월은 물론, 처벌이 끝나고 난 후에도 안희정을 비호하는 사람들은 피해를 부정하고 피해자를 의심하는 말을 온라인에 써가며 가해자의 복권을 시도했다.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가 어떻게든 처벌을 피하기 위해 끝까지 가해 사실을 부인하고, 유죄 판결이 확정된 후에도 가해자나 혹은 주변인들이 '사실은 아니었다'라며 뒷얘기들을 흘리고 다니는 것이 성폭력 사건의 패턴처럼 자리 잡은 듯하다. 이런 패턴 속에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가해자도 '억울한 피해자'로 둔갑한다.
이렇게 법적 책임이 피해 회복과는 동떨어져 있을 때, 가해자가 법적 책임을 마쳤어도 피해자와 사회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성폭력'이 특별한 범죄여서가 아니다. 가해자가 국가의 규범을 어긴 것에 대해 법적 처벌을 받음에도 피해자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 한마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과와 반성이 없는데, 처벌의 목적인 '교화(변화)'나 '재발방지'를 만들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지난해 말, 어청식씨는 피해자의 문제제기로 당시 아산시장의 정책보좌관 자리에서 사직하며 본인의 페이스북에 "민형사상 책임을 다한 이후에 법상 결격사유에 해당되지 않는 과거를 이유로 재차의 처벌은 사적 제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법적 처벌이 끝나면 책임은 다 끝난 것일까? 법적 책임이 끝난 뒤에 피해자가 무언가를 더 요구하는 것이 '사적 제재'일까? 나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식은 하나일 수 없으며 사회가 추구해야 할 다양한 가치에 따라 달라진다고 믿는다.
회복적 정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의 사회학자 하워드 제어는 그의 저서 <우리 시대의 회복적 정의>에서 서구법률시스템은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질문에 기초해 있다고 말한다.
1. 어떤 규칙 또는 법률이 위반되었는가?
2. 누가 위반하였는가?
3. 어떤 벌을 받아 마땅한가?
이처럼 응보적 정의에 보다 기울어진 법률 시스템 속에서 재판 과정은 피해회복이 아니라 가해자의 처벌에 초점이 맞춰진다. 지금의 형사재판에서는 가해자와 검사가 '당사자'이며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닌 참고인이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주체성을 잃고 '증거'로서 소비되며 다시 한번 소외된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고통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부당함에 집중하며,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형을 위해 판사에게 반성문을 제출한다.
물론 피해자에게 먼저 피해를 보상하고 합의하면서 드물게는 진정한 사과를 하고 이를 양형에서 참작 받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소외된 재판을 거치며 피해자는 다시 상처받는다. 따라서 가해자가 처벌을 받고 돌아와도 피해자와 공동체는 과거의 고통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 생긴다.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 나는 한국에도 회복적 정의의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어 하워드 제어는 회복적 정의를 지도하는 질문 여섯가지를 제시한다.
1. 누가 상처 입었는가?
2. 그들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3. 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누구의 의무인가?
4. 원인이 무엇인가?
5. 이 상황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6. 이 상황의 원인을 해결하고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에 이해관계자를 참여시킬 수 있는 적절한 절차는 무엇인가?
회복적 정의는 '피해'에 집중한다. 회복적 정의 안에서 피해자와 공동체는 깨진 신뢰 회복을 위해 가해자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를 할 수 있고, 회복적 정의는 가해자의 필요가 아닌 피해자의 필요, 가해자가 잘못을 바로잡을 의무를 강조한다. 회복적 정의를 실천하는 구체적 방식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회복적 정의의 렌즈로 성폭력 사건을 바라본다면 미투 운동 이후 가해자들이 복귀하는 상황 속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많은 여성들의 느낌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진정 '두 번째 기회'가 필요하다고 믿는다면
| ▲ 책 <김지은입니다> 겉표지 |
| ⓒ 봄알람 |
응보주의에 치우친 사법시스템에서는 법적 처벌을 받은 가해자가 반성하지 않은 채로 피해자와 분리되어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피해자는 가해자가 끼친 악영향을 회복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그중에서 어떤 피해자는 국가에 의한 피해를 인정받은 것만으로도 피해회복의 계기를 만들 수 있으며, 피해 이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많은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피해의 경험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의 훼손과도 연결된 문제라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쉽지 않다. 어떤 피해자는 피해 이후 삶의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그가 나에게 왜 그랬을까' '다음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가해자가 해야 할 피해회복의 의무를 피해자 스스로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다.
하태경 보험연수원장은 가해자 안희정이 법적 책임을 졌으니, 이제는 그만 시민으로서 두 번째 기회를 주자고 한다. 그러나 긴 시간 동안 '반성하고 사과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기회를 선택하지 않은 안희정의 8년의 시간에 대해서 하 원장은 묻지 않았다. 그는 역시 피해자 김지은씨가 피해로부터 회복되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기회'에 대해서는 말을 얹지 않았다.
이처럼 피해자의 회복은 피해자 개인이 알아서 하는 것이고, 가해자의 회복은 사회가 나서서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 바로 이 생각이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연대'가 여성에게 갖는 위력이며, 권력을 가진 이의 연대가 정치권 성폭력 피해자에게 갖는 위력이다. 하 원장과 같은 남성 권력자의 한마디가 안희정이 가진 위력을 다시금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약 누군가 시민 안희정을 아끼고 응원한다면, 회복적 정의가 제시하는 여섯 가지 질문을 고민하길 바란다. 안희정이 피해자 김지은씨와 그의 잘못을 바로잡을 것을 요구하는 공동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깨어진 피해자의 일상과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도록 도와주길 바란다. 그것이 가해자가 시민으로서 두 번째 기회를 얻기 위해 주변인들이 해야 할 진정한 조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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