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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녀였다” “아니, 비밀 약혼녀였다”…‘24세 빵집 여인’ 로맨스 미스터리[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라파엘로 산치오 편]

2026.03.06 23:51

라파엘로 산치오, 라 포르나리나(일부 확대), 1519~1520, 패널에 유채, 85x60cm, 갤러리아 나지오날레 다르테 안티카


200. 마르게리타 루티 (& 라파엘로 산치오)

미남자 천재 화가가 사랑한 여인
초상화 속 비밀 사랑의 증거물들?
두 사람은 은밀한 연인이었을까
일각선 단순 ‘거래 관계’라 주장
확실하지 않아 더 신비로운 설들


편집자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청순하고도… 요염한 여인의 정체


라파엘로 산치오, 라 포르나리나, 1519~1520, 패널에 유채, 85x60cm, 갤러리아 나지오날레 다르테 안티카


그녀의 눈은 맑고 깊다.

터번처럼 두른 줄무늬 숄은 금빛으로 반짝인다. 머리칼에 닿은 진주는 물방울처럼 영롱하다. 긴 눈썹은 우아함을 부른다. 자두색 귀와 복숭앗빛 볼, 사과처럼 둥근 두상은 인상을 더 부드럽게 만든다. 그녀는 목 아래로 속살을 보인다. 오른손은 한쪽 가슴에 얹고, 남은 왼손은 무릎 사이에 올린다. 이것은 일명 ‘베누스 푸티카(Venus Pudica·정숙한 비너스)’. 미(美)의 여신 비너스가 거품에서 알몸으로 나왔을 때 취했다는 자세다. 그런데, 그녀의 손과 팔은 신체 부위를 다 덮지 못한다. 투명한 천 위로는 배꼽도 비친다. 이렇듯 그녀는 몸을 가리는 동시에, 외려 비밀스러운 구석을 드러내고 있다. 촉촉한 눈과 미소 짓는 입, 수줍은 얼굴에 나체와 다를 바 없는 몸. 청순한 그녀가 한편으로는 교태롭고, 요염하게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로 산치오의 그림 <라 포르나리나(La Fornarina·빵 굽는 여인)>다.

라파엘로 산치오, 라 포르나리나(일부 확대), 1519~1520, 패널에 유채, 85x60cm, 갤러리아 나지오날레 다르테 안티카


그녀의 눈빛을 보라.

고개를 살짝 옆으로 튼 그녀가 응시하는 대상. 이는 라파엘로일 것이다. 미래의 어딘지도 모를 전시장, 누군지도 모를 관람객에게 쏘는 안광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사적이고, 은밀하다.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마르게리타 루티. <라 포르나리나>라는 제목처럼 아버지를 도와 빵을 만드는 여인이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그 시절 웬만한 유력가도 보기 힘들었던 라파엘로를, 어떻게 동네 제빵사의 딸이 모델로서 긴 시간 만날 수 있었을까. 화가를 향한 은근한 표정, 야릇한 자세에는 무슨 사연이 담겨 있을까. 이것은 이 물음의 답을 추적하는 글이다. 장르의 8할은 로맨스다. 나머지 2할은, 아마도 추리 또는 미스터리.

햇빛 아래? 비 아래? 낭만적 이야기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라파엘로와 라 포르나리나, 1814, 캔버스에 유채, 64.8x53.3cm, 포그 박물관


마르게리타는 1512~1514년께 로마 트라스테베레(Trastevere) 구역에서 라파엘로와 처음 만났다는 말이 전설처럼 내려온다.

당시 마르게리타는 열일곱에서 열아홉, 라파엘로는 스물아홉에서 서른한 살쯤이었다.

태양이 특히나 뜨거웠던 날. 마르게리타는 집 근처 야외 분수대에서 발을 씻고 있었다. 때마침 라파엘로도 교황청에 갈 일이 있어 바깥에 있었다. 그는 사나운 햇빛 틈으로 그녀를 봤다. 순간 걸음을 멈췄다. 청초한 그녀를 통해 이상적 모델의 상을 봤기에, 그대로 홀린 채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와는 비슷한 듯 다른 낭만적인 설도 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던 늦은 밤. 마르게리타는 오늘 몫의 빵집 영업을 끝내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닫으려고 힘을 줘도 당겨지지 않았다. 그사이 손님이 왔을까. 손을 놓은 순간, 다시 활짝 열린 문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숨을 몰아쉬는 미청년, 라파엘로였다. 빗물을 피하려고 아무 문이나 잡아당긴 그. 그러다 우연히 둘 사이 만남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밖에 시장 또는 축제에서 자연스럽게 서로를 알게 됐다는 식의 말도 있다. 대면 시기가 1512년보다 일렀으며, 둘의 나이 차 또한 10~17살로 보는 분석도 있긴 하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라파엘로와 제빵사의 딸, 1840, 캔버스에 유채, 35.5x27.3cm, 콜럼버스 미술관


다만, 이 모든 사례와 추측은 후대가 문학적 상상력을 섞어 새롭게 쓴 드라마일 가능성이 크다.

가령 문학가 멜키오르 미시리니(Melchiorre Missirini·1773~1849)가 두 사람의 가장 유명한 조우설인 분수대 만남 장면을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아둬야 할 것은, 그에게는 ‘잘 꾸며진’ 옛이야기를 실감나게 전하는 재주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밖에 다른 설도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결정적 근거는 없다. 즉, 두 사람이 언제 어떻게 서로를 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두 사람이 어느 시점에서 서로 통하기는 했다는 것. 이 부분만큼은 확실한 일로 여겨진다.

‘제빵사의 딸’, 그리고 ‘모든 화가의 왕자’


마리 필리프 쿠팽 드 라 쿠프리, 초상화를 그리기 전 포르나리나의 머리 모양을 매만지는 라파엘로, 1824, 캔버스에 유채, 102x82cm, 스웨덴 국립 미술관


그런데, 그저 통하기만 했을까.

두 사람은 서로 맞닿은 후 곧장 급류에 휘말리고 만다. 급류의 또 다른 이름은 사랑이었다. 그것은 희대의 스캔들이었다.

왜?

마르게리타는 지극히 흔한 배경을 둔 여인이었다. 마르게리타는 1495년경 로마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는 빵 빚는 프란체스코 루티. 집을 둔 트라스테베레 구역은 오밀조밀한 주택과 작업장, 작은 식당과 초라한 술집으로 북적이는 지역이었다. 그녀는 가게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뒤로는 납작한 빵 반죽을 주무르며 자랐을 것이다. 이러한 삶은 더할 나위 없이 소박했으리라. 예측가능한 미래-가령 옆집 정육점 아저씨의 고기 써는 소리, 뒷집 약국에서 풍겨 나오는 시큼한 냄새-는 일상을 배신한 적이 없었을 터였다.

살바토레 포스티글리오네, 라파엘로의 작업실, 19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59.5x95cm


반면, 라파엘로의 나날은 평범치 않았다.

라파엘로는 마르게리타보다 12년쯤 이른 1483년 우르비노에서 출생했다. 라파엘로는 날때부터 눈부신 예술 재능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 조반니(그는 궁정화가였다)와 여러 예술가의 가르침을 받은 그는 열일곱쯤에 벌써 장인 대우를 받았다. 그는 동시대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부드러운 묘사,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역동적 표현을 순식간에 제 것으로 만든 기재였다. “라파엘로처럼 (…)쉽게 흡수하는 사람은 없었다”(미술사가 하인리히 뵐플린의 평가)라는 말이 나올 만큼 모방과 재창조의 천재였다. 그래서일까. 서른 무렵부터는 이미 로마 내 가장 주문 많은 작업실의 주인 노릇도 하고 있었다. 교황과 귀족, 부를 쌓은 상인 등 모두가 그의 작품 한 점을 갈망했다.

라파엘로 산치오, 아테네 학당, 1509~1511, 프레스코화, 500x770cm, 바티칸


마르게리타가 ‘제빵사의 딸’로 알려질 때, 라파엘로는 ‘모든 화가의 왕자’로 이름값을 높이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둘은 같은 땅이지만, 영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 싶어 작업도 못했다…?


윌리엄 터너, 바티칸에서 본 로마, 장식 그림을 준비하며 라 포르나리나와 동행한 라파엘로, 1820년경, 캔버스에 유채, 177x335.5cm, 테이트 브리튼


하지만, 사랑으로 두 세계를 합칠 수 있었다.

동시대 화가 겸 미술사가 조르주 바사리(Giorgio Vasari·1511~1574)의 저서 『예술가들의 생애』 등은 이들의 애달픈 이야기를 소개한다. 라파엘로가 거부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의 주문을 받고 빌라 파르시네나(Villa Farnesina)에서 벽화를 그리던 시기. 대형 건물의 속을 채우는 일이었던 만큼, 라파엘로는 이곳에서 꼼짝없이 잠과 식사를 해결했다. 그런데 왜인지 그의 얼굴은 나날이 수척해졌다. 처음에는 짧은 열병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 매일 사랑을 속삭였던 연인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키지는 라파엘로에게 은밀한 사정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작업장에 불렀다. 서로 언제든 같이 있을 수 있도록 공간도 열어줬다. 며칠 밤이 흘렀다. 이 젊은 화가의 얼굴은 다시 화사해졌다. 그를 그렇게 만들어준 여자, 그녀 또한 마르게리타였다는 이야기다.

라파엘로 산치오, 갈라테이아, 1511~1513년경, 프레스코화, 295x225cm, 빌라 파르시네나


라파엘로는 이 기간 빌라 파르시네나에 여러 벽화를 그렸다.

그 중 특히나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이 있었다. 신화화 <갈라테이아>였다. 갈라테이아는 고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서사시 『변신 이야기』에 등장한다. 그녀는 시칠리아 해변을 유영하는 바다 요정이었다. 해신 네레우스의 딸 50명(또는 100명) 중 가장 매력적인 처녀였다. 그림은 갈라테이아가 괴물 폴리페모스의 막무가내 구애에서 도망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녀의 미모에 홀린 돌고래 한 쌍이 기꺼이 고삐를 준다. 활을 든 천사들이 호위에 나선다. 트리톤과 또 다른 요정 무리는 딴짓하는 척 그녀를 은근슬쩍 에워싼다. 이것은 갈라테이아의 미모를 칭송하는 그림이었다. 모든 이가 무작정 돕고 싶을 만큼 뛰어난 아름다움을 갖춘 점을 찬양하는 예술품이었다.

라파엘로는 갈라테이아의 얼굴에 본인이 생각하는 미의 화신을 그려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림 속 그녀가 <라 포르나리나>의 얼굴, 즉 마르게리타와 은근하게 닮았다는 말이 있다. 훤한 이마와 둥근 두상, 무엇보다도 특유의 깊고 그윽한 눈빛이 그렇다. 다만, 한편으로는 그 시절 베테랑 기녀였던 엠페리아 코냐티(Imperia Cognati·1486~1512)의 모습을 참고했을 터라는 분석도 있다.

그녀는 그녀일까, 증거는 ‘진주’


라파엘로 산치오, 베일은 쓴 여인(벨벳을 두른 여인), 1512~1515년경, 캔버스에 유채, 82x61cm, 갤러리아 팔라티나


라파엘로가 마르게리타를 모델로 했으리라고 ‘비교적’ 확신할 수 있는 그림도 여럿 있다.

<베일을 쓴 여인>이 그중 한 점이다. 그림 속 그녀는 <라 포르나리나>와 비슷한 자세를 취한다. 반짝이는 눈빛, 정숙한 듯 살짝 미소 짓는 표정도 닮은 구석이 있다. 얼굴형이 살짝 다른 듯도 하지만, 이는 작업 시점에 따른 체중 차이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속 여인을 마르게리타로 볼 수 있는 증거는 외모 말고도 또 있다. 머리에 단 장신구다. <라 포르나리나>와 <베일을 쓴 여인> 모두 같은 자리에 진주 장식을 달고 있다. 진주는 라틴어로 마르가리타(Margarita). 이는 그녀가 그녀라는 강력한 증거로 거론된다. 그런가 하면, 마르게리타는 <의자의 성모> 속 모델로 나섰을 가능성도 있다. 성모 마리아가 의자에 앉은 채 아기 예수를 안는다. 마리아가 갖춘 눈매의 각도, 귀의 형태, 비교적 두툼한 손바닥은 <베일을 쓴 여인> 속 그녀와 닮은 모습이다. 가지런히 쓴 줄무늬 숄은 <라 포르나리나>를 재차 떠올리게도 한다.

라파엘로 산치오, 의자의 성모, 1513~1514, 패널에 유채, 71x71cm, 팔라조 비티


라파엘로 산치오, 그리스도의 변용, 1516~1520, 패널에 유채, 410x279cm, 바티칸 미술관


라파엘로가 빵집 소녀 마르게리타를 아마도 귀부인, 나아가 아예 성모처럼 표현한 일.

그것은 연인으로서 그만이 꿰뚫어 볼 수 있던 그녀의 고귀한 내면이었을지. 라파엘로는 이 밖에도 마르게리타를 데리고 <폴리뇨의 성모>, <성 세실리아의 황홀경>, <그리스도의 변용> 등의 주요 등장인물을 그렸다는 설도 있다. 오래 전부터 전해져온 이 낭만적인 ‘추리’를 놓고, 18~19세기 예술가들 또한 열광해 관련한 여러 작품을 남겼다.

라파엘로, 이미 약혼녀가 있었다?


라파엘로 산치오, 라 포르나리나(일부 확대), 1519~1520, 패널에 유채, 85x60cm, 갤러리아 나지오날레 다르테 안티카


나이부터 지위, 생활 환경 등 모든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 둘.

그렇다면 두 사람은 흔들림 없이 사랑을 가꿔갈 수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이 솔솔 들 때면 다시 <라 포르나리나>를 살펴봐야 한다. 그림 속 그녀의 왼팔. 그곳에는 터키색 암릿(armlet)이 있다. 거기에 쓰인 글자는, ‘RAPHAEL VRBINAS(우르비노의 라파엘로)’. 화가는 자신의 고향과 이름을 여인 팔에 새겼다. 위아래로 금색 점을 일일이 찍어가며, 정성스럽게도 그렸다. 그녀 뒤에 있는 건 비너스를 상징하는 은매화 나무, 세속적 사랑을 의미하는 모과나무인 것으로 여러 학자는 추정하고 있다. 아울러 비교적 최근 전문가들이 엑스레이 투시를 한 데 따르면, 그녀는 원래 반지도 끼고 있었다. 정확히는 왼손 세 번째 손가락, 그곳에 달린 보석은 루비였다. 이는 훗날 라파엘로의 제자가 몰래 지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모든 장치는 하나의 의미로 쏠릴 수 있다. 그대는 나의 소유, 나의 사람이자 사랑이라는 증표. 마르게리타와 라파엘로 사이 혼약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된다.

라파엘로 산치오, 비비에나 추기경의 초상화, 1516년경, 나무에 유채, 85x66.3cm, 갤러리아 팔라티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모든 서사와 추측 사이에는 하나의 거대한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당시 라파엘로에게는 약혼녀가 있었다. 그녀는 마르게리타가 아니었다. 또 다른 여인이었다. 사실 라파엘로는 교황청의 유력 인사인 비비에나 추기경에게 오랜 시간 압박을 받고 있었다. 내 조카, 마리아 비비에나와 결혼하라는 권유는 사실상 강권과 다를 바 없었다. 라파엘로는 이를 뿌리치지 못했다. 추기경과 추기경의 뒷배경을 무시할 수 없는 탓이었다. 그래서, 1514년께 결국 그녀와의 결혼을 약속하고 말았다. 라파엘로에게는 그때부터 본인 뜻과 상관없이 짝이 있었다. 그러니까 도의적으로 보면, 마르게리타와의 사랑은 애초 있어서는 안 될 ‘사고’였다. <라 포르나리나> 속 루비 반지가 지워진 이유는 이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가 추기경의 조카 아닌 제빵사 딸과 몰래 연을 맺고 있다는 것. 이러한 소문이 잘못 퍼지면 최악의 일도 벌어질 수 있었다. 라파엘로의 명성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 그의 작업실이 파산 위기에 처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르게리타의 기녀설도 거론


안토니오 리날디, 라파엘로와 라 포르나리나, 1841~1845, 캔버스에 유채, 170.3x120.8cm, 조반니 쥐스트 주립 미술관


그런가 하면, 지금껏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연애 서사를 아예 무너뜨릴 수 있는 주장도 있다.

미술사학자 줄리아노 피사니(Giuliano Pisani·1950~) 등은 최근 <라 포르나리나>를 놓고 파격적인 가설을 내놓았다. 마르게리타가 빵집 소녀이자 라파엘로의 비밀 연인이 아닌, 그저 기녀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단어 ‘포노’(forno·오븐)가 당시로는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를 가리키기도 했다는 점이 근거다. 이 말이 맞다면, 라파엘로가 마르게리타를 그릴 무렵 그녀는 단지 은어적 의미에서 ‘빵집 여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 굳어진 표현에 맞춰 <라 포르나리나>라는 제목을 붙였으며(초상화의 제목이 <라 포르나리나>로 확정된 건 18세기 중반 무렵이다), 언젠가부터는 이것이 은어임을 모른 채 본뜻 그대로 받아들이는 기류가 생겼다. 그러다 지금에 이르러선 자연스럽게 ‘마르게리타는 제빵사의 딸’이 되고 말았다는 흐름이다.

이 주장이 맞다면 마르게리타와 라파엘로의 사이도 다르게 볼 수밖에 없다.

이들의 관계는 비밀스럽고도 매혹적인 사랑 아닌, 서로에게 약간은 마음을 더 줬던 거래 관계로 수축할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이 또한 두 사람 사이를 둘러싼 수백 갈래의 추측 중 하나일 뿐이다. 전통적 믿음과 시기 등을 따져볼 때, 주장 자체가 다소 어긋난 내용이라는 반박 또한 상당하다. 어떤 점에서는 다행이랄까.

“아름다운 여인…그 이상 알 필요는 없다”


주세페 소니(추정), 라파엘로와 라 포르나리나, 1826년경, 캔버스에 유채, 169x125.5cm, 브레라 미술관


라파엘로는 1520년 3월28일(또는 4월6일)에 죽었다.

당시 나이는 고작 서른일곱이었다. 천재 중 천재의 생으로는 허무한 끝맺음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라파엘로는 그때도 여전히 독신이었다. 마리아와의 약혼이 결실을 보지 못한 것이다. 무슨 핑계를 끌어와서든 결혼만은 미뤘다는 후문이 나온다. 미술사가 바사리는 라파엘로가 열닷새간 급성 열병을 앓다가 숨졌다고 쓴다. ‘과도한 사랑 행위’에 따른 탈진이 원인이었을 가능성도 제시한다. 1790년에 라파엘로 전기를 쓴 안젤로 코몰리는 아예 “라파엘로가 한 여인에 의해, 그런 여인에 의해 쓰러지는 것을 보라”라는 문장도 남긴다. 바사리가 언급한 라파엘로의 열정적인 사랑 행위 상대, 코몰리가 지목한 그를 ‘쓰러뜨린’ 여인으로는 긴 세월 오직 한 명만이 꼽혀왔다. 역시나 그녀였다. 마르게리타였다. 다만, 요즘 들어서는 라파엘로의 사인이 단순히 폐렴이었을 가능성도 나온다.

고(故) 프란체스코 루티의 딸인
과부 마르게리타가 새롭게 들어왔다.

라파엘로와 마르게리타가 처음 만난 곳으로 꼽힌 땅, 트라스테베레.

그곳의 산타폴로니아 수녀원 장부에는 위와 같은 기록도 있다고 한다. 날짜는 1520년 8월18일. 라파엘로가 죽고 4개월가량이 흐른 시점이다. 그렇게 수녀원에 들어간 그녀 또한 2년 후 요절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이는 스물일곱쯤이다. ‘과부 마르게리타’. 그녀는 왜 과부로 쓰였을까. 앞서 그녀는 임종을 맞은 라파엘로 곁에 있었지만, “둘은 어떤 관계도 아니지 않느냐”는 말로 내보내졌다는 설이 있다.

제롤라모 인두노, 라파엘로와 라 포르나리나, 1869, 캔버스에 유채, 70x83cm


하지만, 비밀 연애는 비밀스럽기에 비밀 연애이지 않은가.

화가를 향한 은근한 표정, 야릇한 자세. 아울러 은매화 나무와 반짝이는 진주, ‘RAPHAEL VRBINAS’의 터키색 암릿과 지워진 루비 반지…. 모든 메시지가 파노라마처럼 재차 흘러간다. 이 의미에 대한 답을 길게 추적해 왔지만, 그럼에도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500년 전 일을 추적할 때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이런 식일 때가 많다. “포르나리나. 그녀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 이상 알 필요는 없다.”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1821~1880)는 『통념 사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애초부터 이것이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라 포르나리나>를 그저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화로 감상할 수 없다. 괜히 애틋해지고, 소슬한 마음까지 피어난다. 마음은 복잡해진다. 이 그림 앞에서,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딱 어느 지점까지 믿으면 되는 것일까.

참고 자료


라파엘로, 크리스토프 퇴네스, 마로니에북스

라파엘로 정신의 힘, 프레드 베랑스, 글항아리

르네상스 미술가평전, 조르조 바사리, 한길사

Vita di Raffaello da Urbino, Enzo Gualazzi, Milano, Rusconi

기자의 말풍선


<후암동 미술관>이 200회를 맞았습니다. 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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