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와 페르시아는 원래 ‘은인’과 ‘동맹’의 관계였다 [이규화의 지리각각]
2026.03.06 00:41
이스라엘-이란 불구대천 된 건 최근의 일
바빌론 유수의 질곡, 페르시아가 풀어줘
키루스대왕, 유대에 성전 재건 기회 제공
페르시아 제국 아래서 이어진 교류 공존
이란혁명 후 배타적 신앙과 민족성 지배
바빌론 유수의 질곡, 페르시아가 풀어줘
키루스대왕, 유대에 성전 재건 기회 제공
페르시아 제국 아래서 이어진 교류 공존
이란혁명 후 배타적 신앙과 민족성 지배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공습과 보복의 악순환은 표면적으로 핵무기 개발 의지와 저지, 신정과 민주정의 대립이란 배경이 작용하는 것 같지만, 속은 민족적 신앙적 사상적 갈등이 작용하고 있다.
미국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에서조차 이번 전쟁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등이 떠밀려 시작한 것이고, 결국은 이란에 대한 이스라엘의 적개심이 발동한 데서 찾아야 한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유대인과 페르시아인 간 전쟁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사실 이 두 민족은 긴 역사의 맥락에서 보면 원래부터 서로 증오하던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고대에는 한쪽이 다른 쪽을 구해준 ‘은인’(恩人)이자 ‘정치적 동맹’에 가까운 관계였다. 지금의 적대는 수천년에 걸친 교류와 공존의 역사에 비하면 극히 최근에 나타난 현상일 뿐이라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다.
두 민족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사건은 기원전 6세기 서아시아의 격변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유대인의 왕국은 바빌론 유수(幽囚)라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유다왕국이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이끄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공격으로 무너지면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됐고, 왕족과 장인·지식인 등 상당수 유대인이 강제로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유대인들에게 이 사건은 민족의 운명이 무너진 절망의 시기로 기억된다.
그러나 약 60년 뒤 상황은 극적으로 바뀐다.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2세, 즉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을 정복하면서 유대인의 운명이 달라졌다.
키루스 대왕은 정복민에게 종교와 문화를 허용하는 관용적 정책을 폈다. 그는 바빌론에 억류돼 있던 유대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구약성경과 키루스 2세의 행적을 기록한 ‘키루스의 실린더(점토 원통)’에도 잘 기록돼 있다.
키루스의 관대한 정책은 유대인들에게 민족의 구원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실제로 유대교 경전에서도 키루스는 이방인 왕임에도 불구하고 신의 뜻을 실현한 지도자로 묘사된다. 유대인의 역사에서 페르시아 왕이 거의 ‘구원자’에 가까운 위치로 평가받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서 유대인들은 비교적 안정된 자치권을 누렸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도 이 시기에 이뤄졌고 유대 공동체 역시 재건됐다. 이 시기의 경험은 유대교가 한 지역종교를 넘어 경전 중심의 체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페르시아 제국과 유대 사회는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공존 속에서 장기간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이후 시대가 바뀌어도 두 민족의 이해관계가 크게 충돌한 적은 없었다. 로마 제국이 서아시아를 지배하던 시기에는 유대인 일부 세력이 페르시아 계열 제국과 손잡고 로마에 맞서기도 했다. 파르티아 제국과 사산조 제국 시기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페르시아 영역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살아가며 상업과 학문 활동을 이어갔다.
다시 말해 고대 세계에서 유대인과 페르시아인은 서로를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협력할 수 있는 정치적 파트너였다.
7세기 이후 페르시아가 이슬람화하면서 관계의 성격은 달라졌지만 완전히 적대적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이슬람 세계에서 유대인들은 ‘책의 사람들’로 분류됐다. 이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이슬람 이전에 신의 계시를 받은 종교라는 의미로, 차별은 존재했지만 신앙 공동체 자체는 인정받았다. 페르시아 지역에도 오랜 유대인 공동체가 남아 있었고 이들은 상업과 문화 분야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근현대에 들어서도 관계가 항상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중반까지 이란의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국왕 시절 두 나라는 오히려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이란은 서아시아에서 이스라엘을 인정한 거의 유일한 나라였으며 석유를 공급했다. 이스라엘은 농업 기술과 군사 장비를 이란에 제공했다. 당시 이란은 이스라엘이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역 파트너 중 하나였다. 친이스라엘 국가인 미국 역시 서아시아 이슬람 국가 가운데 이란이 가장 믿을 만한 우방이었다.
두 민족(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것은 1979년의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였다. 혁명을 이끈 루홀라 호메이니는 친서방 팔레비 왕정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신정체제를 세웠다.
새로운 정권은 미국을 ‘거대한 사탄’, 이스라엘을 ‘작은 사탄’으로 규정하며 강경한 반(反)이스라엘 노선을 채택했다. 이후 이란이 레바논의 헤즈볼라 등 반이스라엘 무장세력을 지원하고,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 개발을 생존 위협으로 간주하면서 양측의 적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극렬한 대립 속에서도 역사적 공존의 흔적이 기적처럼 살아남은 게 있는데, 이란 내의 유대인 사회다. 현재 이란에는 약 1만명 안팎의 유대인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서아시아에서 이스라엘을 제외하면 가장 큰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 가운데 하나다.
이란 헌법은 유대인을 공식 종교를 가진 소수민족으로 인정하며 국회 의석도 1석 보장하고 있다. 테헤란에는 유대교 회당과 유대인 학교, 병원도 운영되고 있다. 이란 정부는 정치적 시오니즘과 종교적 유대교를 구분한다는 정책을 줄곧 유지하며 공동체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더 흥미로운 상징도 남아 있다. 구약성경의 이야기로 알려진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무덤이 이란 서부의 하마단에 보존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성지로 여겨진다. 이란 당국 역시 이를 문화유산으로 관리하고 있다. 서로를 향해 미사일을 겨누는 오늘의 현실에 비추면 매우 생경한 장면일 수 있다.
역사를 길게 보면 유대인과 페르시아인은 결코 태생적 원수가 아니다. 오히려 한때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구해준 기억을 공유하는 드문 관계였다. 정치 체제와 이데올로기, 신앙의 충돌이 두 국가를 적으로 만들었지만 그건 최근의 일이다.
그 이전 수천년 동안 두 민족은 공존하고 협력하며 인류사에 찬란한 고대 문명을 만들어 왔다. 과거의 기억이 당장 현실의 갈등을 해결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역사에서 목도하는 것처럼 영원한 적은 없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은인과 동맹’으로 맺어졌던 두 민족의 역사가 언젠가 다시 복원될 날이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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