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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맞은 하메네이 36년, 이란은 이제 어디로 가나

2026.03.05 22:30

2026년 3월1일 이란 수도 테헤란 중심가 혁명 광장에서 전날 미국과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숨진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를 추모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있다. UPI 연합뉴스

1989년부터 36년여 최고지도자로 이란을 이끌었던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2026년 2월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란 관영 타스님 통신 등은 이날 미사일 7발이 수도 테헤란 북쪽 셰미란에 있는 대통령궁과 하메네이의 거주지 및 집무실 인근으로 날아들었다고 전했다. 이란 국영방송(IRIB)은 3월1일 “최고지도자께서 2월28일 오전 순교하셨다. 40일간 국가 애도기간이 선포됐다”고 밝혔다. 향년 86.

마르크스·게바라 탐독하던 청년기
알리 호세이니 하메네이는 1939년 4월19일 이란 북동부 호라산라자비주 마슈하드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자바드 하메네이는 시아파 성지인 이라크 중부 나자프 태생의 이슬람 성직자였다. 4살 때부터 이슬람 경전 쿠란을 공부한 그는 1958년 시아파 성지인 이란 서부 곰에서 본격적으로 신학을 배웠다. 그 무렵 그는 운명적 만남을 하게 된다.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랜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당시 곰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당시 정치적으로 각성한 신학생들은 카를 마르크스와 체 게바라 등 좌파 지식인의 저작을 탐독했다. 청년 하메네이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964년 팔레비왕조의 탄압을 피해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망명길에 오른다. 그는 튀르키예를 거쳐 이라크 시아파 성지 나자프에 자리를 잡게 된다. 이 무렵 하메네이는 반미·반왕조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이란 정부가 공개한 공식 이력을 보면, 하메네이는 모두 여섯 차례 체포돼 고문까지 당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왕조가 무너졌다. 혁명의 3대 구호인 ‘독립·자유·이슬람공화국’(에스테글랄·아자디·좀후리예에슬라미)에 따라 이란이슬람공화국이 탄생했다. 삶을 규정하는 ‘이슬람’과 정치를 규정하는 ‘공화국’은 신생 이란을 떠받치는 양대 기둥이었다. 서구식 민주화가 아닌 이슬람 전통에 뿌리를 둔 ‘자생적 근대화 모델’이었다.

2026년 3월1일 이란 북동부 알보르즈주의 카라즈에서 전날 폭격으로 숨진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를 추모하기 위해 마련된 간이시설에 사람들이 조의를 표하고 있다. UPI 연합뉴스

사담 후세인 정권의 추방으로 프랑스 파리로 잠시 거처를 옮겼던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즉시 귀국해 최고지도자가 됐다. 하메네이는 혁명위원회 위원을 거쳐 국방차관에 임명돼 혁명수비대 건설을 지원했다. 이후 혁명수비대는 하메네이의 든든한 권력 기반 구실을 하게 된다.

혁명 직후 만들어진 이란 헌법은 총리직을 두고 있었다. ‘신적 존재’인 최고지도자의 지휘 아래 대통령은 외치를, 총리는 내정을 맡는 방식이었다. 1980년 1월 혁명 이후 첫 대통령 선거에서 과도정부 재정경제부 장관 겸 외교장관 권한대행을 지낸 아볼하산 바니사드르가 당선됐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6월 “성직자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탄핵당한 뒤 망명길에 올랐다. 바니사드르는 이후 ‘하메네이 저격수’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이어 1981년 8월 바니사드르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알리 라자이가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그는 집권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폭탄공격으로 암살됐다. 라자이는 반왕조 투쟁 당시 좌파 성향인 이란인민무자헤딘(MEK) 소속으로 활동한 바 있다. 이어 1981년 10월 하메네이가 제3대 대통령에 올랐다.

호메이니와 달리 ‘이슬람+공화국’ 추구
집권 직후 하메네이는 자신의 측근인 알리 악바르 벨라야티를 총리로 지명하고 사실상 친정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혁명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때였다. 진보 색채가 강했던 의회(마즐리스)가 반기를 들고 나섰다. 결국 벨라야티 총리 지명은 좌절됐고, 하메네이는 마즐리스의 반발을 달래기 위해 외교장관 출신으로 개혁 성향이 강한 미르호세인 무사비를 총리로 기용했다. 당시 아야톨라 호메이니도 무사비의 총리 기용을 적극 지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2026년 1월31일 ’이란 혁명의 아버지’인 그랜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하메네이가 대통령을 지낸 기간은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과 고스란히 겹친다. 전쟁의 참상으로 점철된 8년여 동안 무사비는 생필품마저 부족한 ‘전시경제’를 공평하고 효율적인 배급체제로 무난하게 관리했다. 그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쌓인 것은 당연했다. 아야톨라 호메이니 역시 무사비에게 힘을 실어줬다. 하메네이는 그런 그를 견제했다. 1989년 6월 아야톨라 호메이니 사망 뒤 최고지도자로 선출된 하메네이가 총리제부터 폐지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후 정치권에서 철저히 배제됐던 무사비는 2009년 6월 개혁파를 대표해 대선에 출마하며 다시 정치권 전면에 나섰다. 당시 대선은 부정선거 논란 속에 강경보수파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는데, 하산 호메이니를 비롯한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직계 자손 3명은 대선 결과 취소를 촉구한 바 있다. 무사비는 그때부터 지금껏 가택연금 상태다.

이슬람 혁명 당시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슬람’과 ‘공화국’을 분리하기를 원했다. 성직자 출신이 대통령을 맡지 못하도록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하메네이를 시작으로 역대 대통령 가운데 성직자가 아닌 대통령은 아마디네자드 전 대통령과 마수드 페제시키안 현 대통령 단둘뿐이다. 하메네이가 ‘이슬람’과 ‘공화국’을 일치시키려 했음을 방증한다.

2025년 ‘12일 전쟁’ 이후 취약해진 기반
그렇다고 하메네이가 이란 정치권을 강경보수파 일색으로 채운 건 아니다. 실제 하메네이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온건보수파인 악바르 라프산자니다. 라프산자니의 후임은 사상 첫 개혁파 대통령인 모하마드 하타미였다. 그 뒤를 강경보수파인 아마디네자드가 이었다. 아마디네자드의 후임인 하산 로하니는 온건보수파였고, 강경보수파인 에브라힘 라이시가 그의 뒤를 이었다. 라이시가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숨진 뒤 실시된 2024년 7월 대선에선 외과의사 출신으로 하타미 정부에서 보건장관을 지낸 개혁파 마수드 페제시키안이 당선됐다. 하메네이식 ‘실용주의’였던 셈이다.

하메네이 치하에서 이란은 반미·반이스라엘을 기치로 중동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소수 수니파 출신인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뒤 시아파가 다수인 이라크 정치권에서 이란은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다. 하메네이는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예멘의 후티 반군을 ‘저항의 축’으로 묶어 세웠다. 친미 왕정국가 일색인 아랍 각국과 달리 미국·이스라엘과 정면으로 맞서면서 ‘이슬람권의 자존심’으로 떠올랐다. 그럴수록 이란에 대한 제재와 봉쇄는 강화됐다.

2025년 6월 ‘12일 전쟁’은 중동의 맹주를 자처하던 이란의 명성에 치명타를 날렸다. 이스라엘은 6월13일 새벽부터 이란의 핵시설과 군사기지, 사회기반시설과 민간인 거주지역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란은 제대로 된 반격을 가하지 못했다. 6월21일엔 미군 폭격기가 포르도·나탄즈·이스파한 등 이란의 3대 핵시설에 벙커버스터를 투하했다. 이란군은 6월23일 카타르 도하 외곽의 알우데이드 미군 공군기지로 탄도미사일 14발을 발사했지만, 이란 쪽이 카타르를 통해 사전통보를 한 탓에 미국 쪽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체제의 취약성을 부추긴 건 악화일로를 치닫는 경제였다. 장기간 봉쇄된 채 온갖 제재에 시달려온 이란 경제는 ‘12일 전쟁’ 직후 물가 폭등과 통화가치 급락이 겹치면서 휘청이기 시작했다. 2025년 12월28일 수도 테헤란 중심가 그랜드 바자르(시장)에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이 점포와 사무실을 폐쇄하고 거리시위에 나선 이유다. 1979년 부패한 친미 왕정을 무너뜨린 이슬람 혁명의 도화선도 바자르였다. 놀란 정권은 무자비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시위대의 최소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권의 도덕성마저 나락으로 떨어졌다. 유달승 한국외국어대 페르시아어·이란학과 교수는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선 이란이 이슬람공화국 수립 이후 가장 취약한 상태로 내몰렸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짚었다.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2026년 2월28일 이웃 나라인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주재 미국대사관 주변에서 시아파 주민들이 반미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 연합뉴스

무모하게 시작한 전쟁,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하메네이 사망 뒤 이란은 차기 최고지도자 선출 절차를 밟고 있다. 과도기를 이끌고 있는 건 하메네이가 생전에 전권을 위임한 것으로 알려진 알리 라리자니 최고국가안보회의 사무총장이다. 대외 강경파인 라리자니는 2월28일 소셜미디어 엑스(X)에 올린 글에서 “시온주의 범죄자(이스라엘)와 파렴치한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하게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 등은 3월3일 “이란의 차기 최고지도자로 숨진 하메네이의 차남 모즈타바 하메네이가 유력하게 떠오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초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호메이니와 마찬가지로 하메네이 역시 최근까지 ‘세습’에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69년 9월 집안의 기반인 마슈하드에서 태어난 모즈타바는 이란-이라크 전쟁 참전 뒤 성지 곰에서 신학 교육을 마친 성직자 출신이다. 그는 별다른 공직 경험 없이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부친 보좌에 주력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2005년과 2009년 대선 때 강경보수파인 아마디네자드 전 대통령을 적극 지원한 바 있다.

2026년 2월28일 모즈타바 하메네이는 부친만 잃은 게 아니다. 아내 자라 아델과 아들 한 명, 어머니 만수레 호자스테 바게르자데도 폭격 현장에서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모즈타바는 혁명수비대와 바시지 민병대 등 군부 내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스라엘군은 3월3일 성지 곰에 자리한 이란 전문가회의 청사를 폭격했다. 전문가회의는 차기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헌법기구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의 차기 최고지도자 역시 표적 암살 대상이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파상공세 속에 이란은 중동 전역으로 보복타격 범위를 넓히고 있다. 무모하게 시작한 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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