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모호함이 키운 '사적 제재' 우회로
2026.03.03 04:30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귀임 전 동남아시아 특파원이던 당시, 한국인 연루 범죄 사건을 다룰 때마다 기사 작성만큼 중요한 작업이 있었다. 현지 언론이 공개한 피의자 얼굴에 '자체 모자이크'를 덧씌우는 일이다. 현지 매체는 범죄 경중과 관계없이 범인 얼굴과 신상을 공개하지만, 한국 기사에서는 그대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2024년 5월 태국 파타야에서 한국 관광객을 납치·살해하고 시신을 호수에 유기한 일당의 얼굴도 그래서 가렸다. 실명 대신 '김모씨'와 '이모씨'라는 익명의 방패를 씌웠고, 때로는 A씨와 B씨라는 정체 모를 이름을 입혔다. 피의자 인권을 보호하겠다는 거창한 신념보다는 혹시 모를 법적 책임을 피하려는 이기적인 계산에 가까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늘 '의미 있는 행동일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잔혹하고 엽기적인 범죄에 신상 공개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거셌지만, 한국 수사당국이 번번이 결정을 미루는 사이 이들의 사진과 실명, 나이, 고향까지 온라인상에 이미 박제돼 있었다. 공적 시스템이 미적대는 사이 사적 응징이 앞서 나갔다.
최근 서울 강북구에서 벌어진 연쇄 약물 살인 사건도 2년 전과 꼭 닮아 있다. 피해자가 다섯 명으로 드러났지만, 경찰은 피의자인 20대 여성 김모씨 신상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범행 수단의 잔혹성 등 현행 중대범죄신상공개법 요건을 충족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사람이 둘이나 목숨을 잃었고 계획 범죄 정황도 속속 밝혀지는데, 국가가 기준으로 삼는 '중대한 피해'와 '잔혹성', '공익성' 문턱은 대체 어디까지인지 시민들은 묻기 시작했다.
기준이 흔들리면 분노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수사 당국이 모호한 문구에 기대는 사이, 온라인에서는 다시 광기 어린 신상털기가 시작됐다. 이름과 나이는 물론 확인되지 않은 사생활 정보가 쏟아졌고, 이 과정에서 범죄와 무관한 여성이 피의자로 지목되는 2차 피해까지 발생했다. 일부는 외모를 품평하거나 '예쁘니까 무죄' 등 범행을 미화하는 듯한 글을 남겨 또 다른 논란이 되기도 했다.
유가족의 울분과 나빠진 여론에 직면해서야 검찰이 움직였다. 조만간 신상정보 공개 여부를 판단하는 심의위원회를 열고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사실상 '등 떠밀린 결정'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제도적 절차를 신뢰하기보다 목소리를 키우고 소란을 피워야만 '알권리'가 실현된다는 인식을 형사 사법 시스템 스스로가 보내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공적 단죄가 누군가의 신상을 폭로해 얻어내는 전리품이 되지 않으려면, 수사 기관의 기준부터 시민 상식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 그래야 위법함을 알면서도 사적 제재라는 우회로에 기대고 열광하는 서글픈 풍경을 멈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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