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국제화, 30년 금기 깨다]②인프라로 첫발 뗐다…성공 위해선 '이것'까지 가야
2026.07.20 11:00
해외서 원화 계좌 개설·외국인 간 송금 가능
외국인 원화 대출·증권 발행 신고 규제도 푼다
금리 인하·보험 확대…결제 수요에 인센티브도
원화 장기 보유·투자 매력 높이는 것이 관건
“한국 경제 체급에 걸맞은 금융시장 경쟁력 갖춰야”
편집자주원화가 큰 변화의 길목에 섰다. 정부가 원화를 자유교환통화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원화 국제화 로드맵'을 내놓으면서다. 우리나라 자본시장이 개방된 지 30년이 넘으면서 한국 경제의 체급은 커졌지만, 원화의 위상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겪은 한국이 달러 경색에 따른 원화 가치 폭락의 트라우마로 원화를 해외에서 자유롭게 쓰는 데 제약을 둬왔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 고도화와 자본시장 선진화 등을 고려하면 원화 국제화는 필수 과제다. 성공적인 원화 국제화의 전제 조건은 크게 두 가지다. 인프라·제도 면에서 '글로벌 시장에서 원화가 편히 쓰이는 데 제약이 없어야'하고, 수요·공급 면에서 '원화의 쓰임이 다양해 널리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이번 기획을 통해 30년 금기를 풀고 국제화의 출발선에 선 원화가 어떤 변화를 앞두고 있는지, 원화가 한국의 경제 체력에 걸맞은 위상으로 거듭나기 위해 앞으로 무엇이 더 필요한지 짚어본다.
정부가 내놓은 원화 국제화 로드맵의 핵심은 원화의 국제적 수용성을 높이기 위한 인프라 구축이다. 24시간 외환시장 개방과 역외 원화 결제 시행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됐다. 원화 사용과 공급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도 함께 내놓으며 첫걸음을 뗐다. 최종적으로는 투자 수단으로서 원화의 매력을 높여야 원화 국제화도 성공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4시간 외환시장 열고 역외 결제망 구축…원화 사용 손쉬워진다
원화 국제화의 첫 단추는 24시간 외환시장이다. 정부는 원·달러 환전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 지난 6일부터 역내 외환시장을 24시간 가동하고 있다. 2024년 거래 시간을 새벽 2시까지 확대한 지 2년 만에 평일 중단 없는 환전 거래를 시작했다.
이로써 역내 외환시장은 런던에 이어 뉴욕 금융시장 마감 시간까지 아우를 수 있게 됐다. 뉴욕 시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원·달러 환전 공백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장벽부터 없애겠다는 취지다. 시간 제약 없이 거래할 수 있게 되면 차액만 결제해 환율 변동성을 키우는 역외 차액결제선물환(NDF) 수요도 일부 흡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다른 핵심 변화는 해외에서도 원화를 편리하게 보유할 수 있도록 외국인 간 원화 거래를 자유화했다는 데 있다. 정부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역외 원화 결제 제도를 만들었다. 해외에 기반을 둔 금융기관과 국내 금융사의 해외 지점이 외국인에게 원화 관련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관련 시스템을 구축하고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 골자다.
제도가 시행되면 역외 원화결제기관으로 등록한 외국 금융사는 국내 은행에 원화통합계좌를 두고 원화를 직접 운용할 수 있게 된다. 원화 보유는 물론 역외 원화결제기관 간 거래와 대출도 가능해진다. 외국 금융사는 이를 바탕으로 현지 고객에게 원화 송금·결제·차입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원화 관련 사업을 할 수 있다. 비거주 외국인의 국내 투자와 외국인 간 송금, 원화 대출이 지금보다 한층 쉬워진다는 의미다.
현재 외국인이 원화를 거래하려면 국내 외국환은행에 직접 계좌를 개설해야 한다. 실명 확인을 위해 적어도 한 번은 한국을 방문하거나 대리인을 거쳐야 하는 등 계좌 개설 과정도 까다롭다. 외국인 간 원화 이체도 불가능해 자유로운 거래가 사실상 막혀 있었다.
하지만 역외 원화 결제 제도가 시행되면 외국인은 국내 은행을 직접 거치지 않고도 역외 원화결제기관으로 등록한 현지 은행을 통해 원화 계좌를 개설할 수 있게 된다. 이 계좌로 국내 주식 등에 투자할 수 있고 원화 대출, 외국인 간 송금도 가능해진다. 국내 부동산 거래를 제외하고는 사전 신고 의무도 면제해 불편을 줄였다.
정부는 이를 뒷받침하는 네트워크인 역외 원화결제망을 한국은행에 구축해 9월부터 시범 운영할 계획이다. 내년 1월부터는 24시간 가동 체계가 본격 시행된다. 이형렬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은 "원화 거래의 장벽을 완전히 없애 투자를 편리하게 해주는 것이 핵심 콘셉트"라고 말했다.
원화 대출 빗장 일부 풀고, 결제도 유도…원화 쓰임 획기적으로 늘어날까
그동안 우리나라는 원화를 외국인, 즉 비거주자에게 빌려주는 데 특히 보수적이었다. 1992년 미국 헤지펀드 투자자 조지 소로스가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했던 것처럼, 외국인이 환투기를 목적으로 원화를 빌린 뒤 한꺼번에 팔아치우면 원화 가치가 순식간에 급락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외국인이 보유할 수 있는 원화 총량을 제한해 원화 국제화를 막는 요인으로도 작용해 왔다.
정부는 이번 로드맵에서 외국인에 대한 원화 대출 규제를 일부 완화했다. 그동안 외국환은행이 비거주자에게 원화를 대출할 경우 잔액 기준 10억원 이하는 신고가 면제됐다. 10억~300억원은 외국환은행에, 300억원을 초과하면 한국은행에 신고하게 돼 있었다. 정부는 이번에 신고 기준 금액을 두 배 이상 높이기로 했다. 외국 금융회사의 역외 원화 표시 증권 발행도 사후 보고 방식으로 문턱을 낮춰 해외에서의 원화 채권 발행과 보유를 유도한다.
원화 사용을 늘리기 위한 다양한 결제 유인책도 내놨다. 교역 규모와 취업·체류 등을 고려해 향후 직거래 수요가 클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와 원화·현지 통화 간 직거래 체계(LCT)를 추진한다. 아시아 지역의 원화 결제 비중을 높이기 위해 소액결제망 공동 프로젝트인 '프로젝트 넥서스' 참여도 검토할 계획이다.
이 외에 원화로 무역대금을 결제할 경우 금리 인하나 무역보험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 현재 2%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출입 대금의 원화 결제 비중을 높이기 위한 조치다.
정영식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선임연구위원은 "결국 원화 결제의 물꼬를 트려면 우리 기업 본사와 해외 지사 간 원화 결제가 원활해지는 것도 중요하다"며 "본사와 지사 간 원화 결제가 원활해지면 현지 업체 간 거래도 조금씩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그동안 닫혀 있던 빗장을 풀며 원화 국제화의 첫발을 내디딘 가운데, 원화의 국제적 쓰임을 획기적으로 늘리려면 자유로운 거래를 넘어 궁극적으로 원화의 매력도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주식이나 채권 등 자본거래 차원에서 원화 표시 자산에 투자하거나 원화를 보유하는 것만으로도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박성욱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글로벌 투자자 입장에서 볼 때 국채가 됐든 주식이 됐든 원화가 투자 대상이 되는 것이 일단 중요하다"며 "원화를 계속 보유하는 상태가 돼야 사용도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경제 규모를 키우고 원화 가치의 안정성을 높이는 것도 원화 국제화를 지속하기 위한 선결 과제다. 생산과 무역, 금융시장의 규모가 클수록 원화 수요가 늘어나 국제통화로 사용될 가능성도 커진다. 이정환 한양대 경제금융학과 교수는 "원화 국제화가 성공하려면 우리나라의 경제력도 더 강해져야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수출 의존도가 높은 데다 원화가 위험 선호 통화로 분류돼 대외 여건에 따라 환율 변동성이 크게 나타나는 편이다. 다만 외환시장이 깊고 넓어져 유동성이 커진다면 외부 충격에 따른 변동성의 폭도 줄어 원화 보유 위험을 낮출 수 있다.
원화의 투자 매력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국내 금융시장의 경쟁력 강화도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달러와 파운드화가 국제통화로 널리 사용되는 배경에는 뉴욕과 런던이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다양한 금융상품과 유통 기반을 갖춘 점도 있다. 원화가 국제적으로 널리 사용되려면 금융상품과 유통 구조, 금융기관의 글로벌 경쟁력을 함께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원화의 국제적 매력은 금융시장의 경쟁력뿐 아니라 한국 경제에 대한 신뢰와 제도의 안정성에도 좌우된다.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통화의 매력은 결국 돈을 쓰고 보유하기 편한 정도에 더해 해당 국가의 경제에 대한 신뢰와 규칙의 안정성까지 포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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