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묶인 외환정책 빗장 푼다…“미국인도 뉴욕은행서 원화계좌 개설”
2026.07.19 12:17
현재 미국 자산운용사가 한국 국채에 투자할 원화를 마련하려면, 한국에 있는 은행에 별도 계좌를 개설해야 한다. 한국인이 국내 은행에서 달러계좌를 만들 수 있는 것과 달리, 미국인은 자국 은행에서 실제 원화를 예치·송금할 수 있는 계좌를 개설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르면 오는 9월부터는 이런 제약이 사라진다. 미국인도 현지 은행에서 원화계좌를 만들어 원화를 보유하고 투자 등에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독일의 자동차 부품회사도 자국 은행의 원화계좌에 있는 돈으로 한국 협력업체에 물품대금을 바로 지급할 수 있게 된다. 일본인이 한국 여행 후 남은 원화를 도쿄 소재 은행 계좌에 보관하다가 가족에게 송금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정부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30년 가까이 유지해 온 역외 원화거래의 빗장을 본격적으로 푼다. 재정경제부는 19일 이런 내용을 담은 ‘원화 국제화 로드맵’을 발표했다. 지난 6일 국내 외환시장을 24시간 개장한 데 이어 해외에서도 원화를 자유롭게 조달·활용할 수 있도록 거래 인프라를 구축하고 외환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내용이다.
해외서도 원화계좌…24시간 거래·결제
지금까지는 외국인이 원화를 실제로 보유하거나 결제하려면 국내 외국환은행에 별도 계좌를 열어야 했고, 역외 자본거래에는 사전신고도 필요했다. 정부는 이번 개편을 통해 원화를 이런 ‘규제통화’에서 제약 없이 거래할 수 있는 ‘자유교환통화’로 전환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형렬 재경부 국제금융국장은 “외국인이 아무런 망설임이나 두려움 없이 원화를 보유하고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우선 일정 요건을 갖춰 재경부에 등록한 해외 금융기관이 ‘역외원화결제기관’으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원화 예금·대출·송금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외국인은 평소 거래하는 해외 은행에 원화계좌를 만들어 원화를 예치하거나 빌린 뒤 한국 주식·국채에 투자할 수 있게 된다.
역외원화결제기관을 통한 외국인 간 원화 자본거래는 사전신고가 면제(국내 부동산 거래는 제외)된다. 은행도 계좌 정보 등 최소한의 사항만 확인하도록 의무가 완화된다. 역외원화결제기관을 이용하지 않는 거래에는 기존 신고·확인 절차가 적용된다. 한국은행은 외국인 간 원화거래를 최종 결제하기 위한 ‘역외원화결제망’을 새로 구축한다. 결제망은 24시간 운영돼 외국에서도 시차 없이 원화자금을 결제할 수 있게 된다.
정부는 내달 중 관련 외국환거래규정 등을 개정한 뒤 9월 시범 운영을 거쳐 내년부터 정식 시행할 계획이다. 외국인 관련 원화 대출·차입 등 자본거래에 적용되는 사전신고 기준금액도 현행보다 두 배 이상 높인다. 장기적으로는 사전신고 중심의 규제를 사후보고 체계로 전환하는 방안도 검토한다.
원화 수요를 늘리기 위한 유인책도 마련한다. 국내 기업이 수출입 대금을 원화로 결제하면 수출금융 금리와 무역보험 한도 등을 우대하고, 원화 결제 실적을 수출지원사업 평가에 반영한다. 주요 교역국과는 양국 통화를 달러로 바꾸지 않고 직접 교환해 무역대금을 지급하는 현지통화 직거래 체계를 확대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수출 대금 결제 중 원화 결제 비중은 3.4%, 수입대금은 6.6%에 그쳤다.
국내 개인의 편의도 높아질 전망이다. 앞으로는 밤에 미국 주식을 살 때 증권사가 정한 임시환율 대신 실시간 시장환율로 달러를 바꿀 수 있다. 해외여행 때도 미리 현지 화폐로 환전할 필요 없이, 국내 금융앱의 QR코드로 결제할 수 있는 국가가 확대된다.
“원화 국제화, 걱정보다 편익 누릴 시점”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의 국내 주식·채권 투자는 대부분 개방됐지만, 실제 투자에 필요한 원화 조달과 결제에는 문턱이 남아 있었다. 정부는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 등으로 외국인의 국내 자본시장 투자 기반이 확대된 만큼, 원화 거래의 문턱도 낮출 시점으로 판단했다. 이형렬 국장은 “원화 국제화에 따른 위험을 걱정해 미루기보다 국제화의 편익을 누리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원화 국제화로 국내 기업도 원화 결제가 늘면 수출대금을 달러에서 원화로 바꾸는 데 드는 환전 비용과 환율 변동 위험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장기적으로는 환율 안정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현재는 원화의 활용 범위가 국내에 머물러 있어 대외 거래가 늘면 달러 수요만 증가하는 구조다. 이승호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해 보고서에서 “원화가 국제적으로 신뢰받는 교환성 통화가 될 경우 글로벌 위기로 갑작스러운 외환 수요가 발생하더라도 원화를 대가로 긴급한 외자 조달 수요에 충당할 수 있다”고 전했다.
실제 원화를 주고받는 실물인도선물환(DF)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역외 차액결제선물환(NDF) 시장에 집중된 원화 거래 일부가 제도권 시장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신현송 한은 총재는 16일 기자간담회에서 “NDF 거래를 DF를 통해 역내로 끌어들여 투명성을 제고하고 원화 접근을 보다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해외의 원화 접근성이 높아지면 글로벌 금융시장 충격이 국내로 전달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자본 유출입과 환율 변동성이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처럼 달러 선호가 급격히 강해지면 외국인이 보유한 원화를 한꺼번에 달러로 바꿀 수 있다.
정부는 이에 대비해 공공부문이 보유한 외화자산을 유사시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양자·다자 간 통화스와프를 확충한다. 24시간 거래에 맞춰 야간 가격 급변과 역외 원화시장 유동성을 실시간으로 점검하는 대응 체계도 구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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