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전
“엄마, 아버지가 죽었어”…가난을 딛고 중식의 전설이 된 소년[미담:味談]
2026.07.19 21:31
음식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안녕하세요. 맛있는 이야기 ‘미담(味談)’입니다. 인간이 불을 집어 든 날, 첫 셰프가 탄생했습니다. 100만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은 음식에 문화를 담았습니다. 미식을 좇는 가장 오래된 예술가, 셰프들의 이야기입니다
[헤럴드경제=채상우 기자]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세 번의 삶을 살아도 얻기 어려운 큰 복이다. 훌륭한 스승에게서 뛰어난 제자가 나온다.” (得遇良師 三生有幸. 名師出高徒)
세계적인 중식의 대가 여경래 셰프가 요리 인생 50년을 돌아보며 가장 소중한 한 가치를 되짚었다. 화려한 경력도, 수상도 아니었다. 그의 답은 ‘스승’이었다.
스승은 단순히 지식과 기술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다. 때로는 부모처럼 삶의 태도를 일깨워주고, 인생의 방향을 비춰주는 등불이 된다. 그렇기에 좋은 스승을 만나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이다.
“제 인생의 ‘천우신조(天佑神助)’는 좋은 스승을 만난 거예요. 제가 요리를 시작한 1970년대에는 중식을 배울 책 한 권 없었어요. 오로지 선배들의 어깨너머로 익힐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좋은 선배,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 셰프로 성장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어요.”
여경래 셰프는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 중식계를 대표하는 원로 셰프들에게 기술과 철학을 배우며 성장했다.
“제 마음속 스승은 세 분 정도 계세요. 왕춘량 셰프께는 중식의 기본 기술을 배웠고, 조창인 선배께는 요리를 대하는 자세를 배웠어요. 또 왕진희 셰프께서는 셰프로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셨죠. 어린 시절 그분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어요. 그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배고픈 소년, 중식 거장이 돼다
“엄마, 아버지가 죽었어.”
1964년 겨울. 다섯 살 여경래는 눈앞에서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희미하지만, 사고 직후 어머니에게 건넨 그 한마디만큼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한다. 그날의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가난은 어린 시절을 지배했다. 쌀밥은 꿈도 꾸기 어려웠고, 나라에서 배급받은 밀가루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열여섯 살, 그는 생계를 위해 종로 회현반점의 문을 두드렸다. 첫 월급 6000원은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모두 집으로 보냈다.
“제 과거를 들으면 안쓰럽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제 삶의 방향이 정해졌던 것 같아요. 돈을 벌어야 했고, 그러려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야 했죠. 특별한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제 앞에 놓인 길을 묵묵히 걸어온 것뿐입니다.”
처음 맡은 일은 청소와 배달이었다. 요리를 배우고 싶었지만 누구도 먼저 알려주지 않았다. 화교였지만 중국어가 서툴러 선배들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주방에서 오가는 동작을 눈으로 익히고, 퇴근 후 노트에 하나하나 적으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잘 곳이 없어 식당 의자를 이어 붙여 잠을 청한 이야기는 이제 한국 중식계에서는 유명한 일화가 됐다.
그 시절의 절박함은 훗날 그를 한국 중식계를 떠받치는 거목으로 성장시켰다. 여경래 셰프는 2010년대부터 세계중식업연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한국 중식계를 대표해 국제 교류와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또 2006년에는 한국식 중화요리 레시피를 담은 『2000원으로 중국요리 만들기』를 펴냈다. 자신처럼 배울 책이 없어 헤매는 후배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스승을 스스로 찾아라”…여경래의 조언
이제 그는 누군가의 제자가 아니라 수많은 셰프들의 스승이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박은영 셰프가 있다. 스승과 제자로 맺어진 인연은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었다. 막내 요리사였던 박은영 셰프는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중식 셰프 가운데 한 명으로 성장했고, 그 과정에는 늘 여경래 셰프가 함께했다.
“은영이는 뭔가 달랐어요. 누가 가르쳐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가르치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었죠. 늘 연습하고,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뛰어났어요. 게으름이 없고 항상 새로운 걸 추구했어요. 막내였을 때 수타를 배우라고 했더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 달 넘게 매일 30분씩 따로 연습하더라고요. 그런 모습이 참 기특했습니다.”
그는 후배들을 향한 몇 가지 조언을 남겼다.
“첫째는 좋은 스승을 찾으라는 겁니다. 기다리지 말고 직접 찾아다녀야 해요. 둘째는 배움에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 가르쳐주기만 기다려서는 성장할 수 없어요. 마지막으로 국제대회에 많이 도전했으면 합니다. 경쟁을 통해 실력을 키우고, 세계 무대를 경험하면서 시야와 인맥을 넓혀야 합니다.”
여경래의 마지막 꿈, 세계가 사랑하는 ‘한중채’
“한국만의 중식 ‘한중채’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싶습니다.”
중국에는 광둥·사천·산둥·강소 등 지역에 따라 뚜렷한 요리 분파가 존재한다. 산둥요리는 짭짤하고 진한 맛, 사천요리는 매운맛, 광둥요리는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섬세함, 강소요리는 달콤한 풍미와 해산물 요리로 잘 알려져 있다.
여경래 셰프는 한국에도 한국만의 중식 문화가 있다고 말한다. 그가 이름 붙인 ‘한중채(韓中菜)’다.
대표적인 음식이 짜장면이다. 한국식 짜장면은 19세기 말 인천으로 건너온 산둥성 화교들이 먹던 자장몐(炸醬麵)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양파를 듬뿍 넣어 단맛을 더하고, 전분으로 농도를 맞춰 비벼 먹기 좋게 바꾸면서 오늘날의 한국식 짜장면으로 발전했다.
짬뽕 역시 한국만의 진화를 거쳤다. 중국 푸젠계 면 문화와 일본 나가사키의 ‘찬폰(ちゃんぽん)’의 영향을 바탕으로, 한국 화교 셰프들이 고운 고춧가루와 강한 불맛을 더하면서 지금의 얼큰한 한국식 짬뽕이 완성됐다.
중식냉면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중국의 량몐(凉面)과 일본의 히야시츄카(冷やし中華)의 영향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차가운 육수와 겨자를 더한 독자적인 중식냉면으로 발전했다. 중국, 일본, 한국의 음식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탄생한 한국식 중화요리인 셈이다.
여경래 셰프는 이제 한중채가 세계적인 요리 장르로 자리 잡기를 꿈꾼다.
“대만이나 홍콩에 가보면 예전과 달리 한국식 중식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아졌다는 걸 느껴요. 한국 문화 자체에 대한 호감도 커졌고요. 한중채는 다른 중식에 비해 담백하고 부담이 적습니다. 건강한 음식이라는 이미지도 충분히 만들 수 있어요. 그런 점이 세계화에 큰 강점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셰프는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좋은 스승이 있었기에 여경래가 있었고, 이제는 그가 또 다른 여경래를 키워내고 있다. 그가 말하는 ‘한중채’의 미래 역시 결국 새로운 제자들의 손끝에서 완성될 것이다. 반세기 동안 주방을 지켜온 그의 마지막 꿈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넘어설 후배들을 남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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