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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인][충청의 인물과 사건(24)] 공주갑부 김갑순 ⑥대전 토지 투기

2026.07.19 17:58

식산은행 거액 대출 토지매입… 충남도청 대전 이전으로 대박
대전시내 땅 40% 소유 엄청난 차익… 거부 등극
땅 부자임에도 농민과 소작·임대료 갈등 흑역사
김윤환 윤치오 이병길 등 권력가문과 사돈 맺어
대전시 중구에 현존하는 조선식산은행 대전지점(국가등록문화재 제19호). 김갑순은 식산은행에서 거액을 대출받은 돈으로 땅을 매입, 거부가 됐다.김재근 선임기자


김갑순이 거부가 된 것은 대전의 성장, 발전과 밀접하다. 잘 알다시피 대전은 1905년 경부선철도가 개통되고 역이 설치되면서 급성장했다. 대전역을 주변으로 거주지와 상가가 들어서고 일제의 각종 기관이 입주하면서 폭발적으로 커졌다. 1914년에는 대전-목포에 이르는 호남선이 개통돼 교통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김갑순이 유성온천(호텔)을 운영한 대전시 유성구 온천공원에 김갑순의 자선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김재근 선임기자


김갑순은 일찌감치 대전의 발전 가능성을 알아차렸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 충남자동차운수를 설립하고, 1921년 대전온천(유성온천)을 인수하면서 사업의 무게 중심을 대전으로 옮겼다. 철도의 중심지인 대전의 빠른 성장을 눈으로 보고 느꼈다. 충남도 토지조사위원과 도참사, 중추원 참의를 맡는 등 정보 취득에도 유리했다. 집과 농지를 담보로 조선식산은행에서 빌린 180만원(90만원이라는 설도 있음)도 대전의 땅을 집중 매입했다.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한 충남도청 건축비가 35만9000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조선인에게 매우 깐깐했던 일제의 식산은행이 그에게 얼마나 큰 돈을 대출해줬는지 알만하다.

1920년대 대전 목척교 주변의 거리 모습. 김갑순은 철도교통의 중심지 대전이 급성장 할 것으로 보고 부동산에 투자했다.


1932년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 대전 이전은 김갑순에게 일생일대의 호기였다. 충남도청 이전론은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처음 등장했다가 10여년이 지난 1924년 본격화됐다. 진주의 있던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도 충남도청과 대전 주민들(주로 일본인)에게 큰 자극이 됐다. 1925년 충남도청 이전 적지로 대전과 조치원 등이 떠올랐고, 1929년에는 대전의 이전운동 단체가 야마나시 한조 총독에게 뇌물을 주고 로비를 벌였다가 적발돼 총독이 경질되는 사건까지 일어난다. 후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1930년 1월 공주의 충남도청 대전 이전을 공식 발표했고, 우여곡절 끝에 1932년 대전으로 이전하게 된다.

변평섭의 <실록 충남 반세기>에는 충남도청 이전과 김갑순의 땅에 얽힌 일화가 전한다.

1932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한 충남도청 청사.


1929년 3월 야마나시 총독이 대전을 순방했을 때 김갑순이 운영하는 유성온천에서 신석린 충남지사, 이케가미 시로 정무총감, 대전에 사는 일본 귀족 시라이시 데쓰지로 등을 만났다. 김갑순도 참석했다. 김갑순은 호텔 대표이자 중추원 참의와 도평의회 의원으로 자격이 충분했다. 이 자리에서 시라이시가 총독에게 "김갑순이 도청부지를 내놓을 테니 땅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건의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갑순이 땅을 기증하여 충남도청을 지었다고 알려졌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이다. 막상 충남도가 청사 부지를 매입하려 하자 김갑순이 팔지 않겠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이에 충남도는 거짓으로 도청 1후보지가 선화초등학교 자리(현재), 2후보지가 현재 농산물관리충남지원 자리(현재)라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김갑순이 당황하여 땅을 팔겠다고 나왔고, 충남도는 1931년 6월 평당 4원에 감사골 일대 1만1596평을 매입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나중에 김갑순이 도청을 짓고 도로를 내는데 일부 땅을 내놓았다고 한다.

충남도청 대전이전 뒤 대전의 김갑순(오른쪽)은 '전선발전지 대전제1위'(전조선 발전하는 곳 중에서 대전이 1위), 공주의 마루야마 도라노스케는 '거화 취실'(화려함은 갔지만 실리를 취했다)라는 휘호를 써서 양 도시의 상반된 정서를 대변했다.
충남도청 이전으로 대전의 땅값이 3배 올랐다는 1932년 8월 4일자 동아일보 기사.


어쨋거나 김갑순은 충남도청 이전으로 대박을 맞았다. 헐값에 사들인 땅이 22만 평으로, 대전시내 전체 토지의 40%에 이르렀다. 땅의 위치도 대전역 주변은 물론 대전역-충남도청에 이르는 현재의 은행, 대흥, 선화, 유천동의 농지를 매입했는데 대전역 서쪽 선화동에 도청이 들어서면서 금싸라기땅이 됐다. 위치에 따라 몇 년 사이 땅값이 수배-수십 배 오른 것이다.

김갑순은 충남도청이 자신이 땅을 사 놓은 대전으로 이전하는 데 적극 나섰다. 대전에 사는 일본인들이 주축이 되어 대전기성회(회장 시라이시 데쓰지로)를 결성하여 도청이전 운동을 벌였는데 김갑순도 여기에 참여했다. 당시 기성회는 야마나시 총독에게 뇌물 4만5000원을 전달하고 부지확보 자금을 마련하는 등 치열하게 유치활동을 벌였다. 사이토 총독이 1930년 1월 충남도청 대전 이전을 발표하자, 공주 주민들이 출근하는 충남지사 유진순에게 흙을 뿌리고, 공주시내 김갑순 소유의 극장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김갑순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향인 공주를 저버리고 대전 편에 붙은 것에 격분했던 것이다.

김갑순의 마름이 도조(소작료)를 받으면서 부정한 저울을 사용하다 적발된 사건을 보도한 1928년 2월 24일자 기사.
김갑순이 소작인에게 지세를 전가하고, 이를 납부하자않으면 소작권을 빼앗았다고 보도한 기사. 1932년 1월 30일 중앙일보.


김갑순이 땅 부자가 됐지만 덕을 베풀거나 선행을 했다는 기록은 별로 없다. 오히려 소작료와 소작권, 임대료 등을 무기로 농민과 약자를 농락하는 흑역사를 연출했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28일자에는 김갑순이 대전역 부근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에게 소작료를 선금으로 내라고 강요했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결국 이 땅의 소작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바람에 농민 50여명이 실업자로 전락, 경찰이 조사를 벌이게 된다.

1928년 2월에는 김갑순의 마름 2명이 소작료를 받을 때 저울에 납을 덧붙이는 수법으로 부정행위를 저지르다 현장에서 적발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검찰이 김갑순의 가택을 수색하여 장부를 압수하고, 3000여 석을 쌓아놓은 창고를 봉쇄하게 된다. 충남 공주 의당에서 모까지 심은 논의 소작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대전에서는 소작인들에게 소작료 외에 지세를 떠넘겨 갈등을 빚기도 한다.

동아일보 1932년6월 14일자 기사로 김갑순이 대지 임대료를 5배나 올렸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1932년은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한 해이다.
김갑순이 소작인과 맺은 정세계약을 제멋대로 해지하고 이를 반대하는 소작인의 논을 차압했다는 기사이다. 1932년 11월 23일자 동아일보


동아일보 1932년 6월 14일자에는 김갑순에 관한 기사가 3건이나 실려 있다. 김갑순은 대전에 소재한 자신의 땅에 집을 짓고 사는 주민 200여 명에게 지대료(땅 임대료)를 5배나 올린 뒤 이에 응하지 않으면 법적 절차를 밟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김갑순의 장남 '호피판사' 김종석.


그가 이 땅의 관리권을 군산의 신탁회사에 위임했으며, 5배의 임대료를 거부한 사람에게 지불명령을 내렸다는 기사가 함께 실려 있다. 이외에도 일정한 양의 소작료를 납부하기로 정세(도조) 계약을 해놓고 풍년이 들자 일방적으로 수확량을 기준으로 나누는 병작제를 강요하기도 했다.

일제는 1910-1918년 토지조사를 실시한 뒤 토지의 소유권만 인정하고 기존의 관습적인 소작권을 폐지, 땅이 없는 다수 농민들이 절대 약자로 전락했다. 김갑순을 "법대로"를 내세워, 힘없는 소작인들을 쥐어짰다. 일제가 든든한 배경이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전국에서 소작쟁의가 벌어졌지만 김갑순처럼 다양하게 많이 물의를 일으킨 지주는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총독부가 재판소의 서기 겸 통역생으로 일하던 김갑순의 장남 김종석을 판사로 발령한 1926년 9월 20일자 관보. 같은 날 일본인 1명도 함께 발령이 났다.


중추원 참의에 충청권 최고 갑부가 됐지만 권력욕은 끝이 없었다. 돈으로 벼슬을 사고, 돈의 후광으로 권력가 집안과 혼사를 맺은 것이다.

김갑순은 장남 종석을 판사로 만들었다. 김종석은 1923년부터 공주지법 대전지청의 통역 겸 서기로 근무하다 4년만에 판사가 됐다. 김갑순이 조선총독부 법무국장(장관)이었던 마츠테라 다케오에게 호피(호랑이 가죽)를 바친 덕분이다. 이 때문에 김종석은 세간에 '호피판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김종석은 1926년 9월 14일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용되고 당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 판사로 발령을 받았다. 김종석은 마산, 인천, 전주, 수원 등에서 판사로 근무했다.

◇김갑순의 자녀와 혼사를 맺은 권력가의 사돈들

내장원경을 지낸 공주의 부자 김윤환. 사진=공주학연구원(왼쪽부터), 함경남도와 강원도 지사를 지낸 이규완. 자료=나무위키, 총독부에서 근무하고 중추원 참의를 지낸 윤치오.


김갑순은 장남 종석을 공주의 갑부이자 고위직을 지낸 김윤환의 딸 학필과 결혼을 시켰다. 김윤환은 한산 정산 만경 등 5곳에서 군수를 지낸 인물로 중앙에서 내장원경을 지낸 뒤 공주에서 살았다. 갑부이자 고위직을 지낸 김윤환은 김갑순의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학필이 사망하자 김종석은 무관 출신 고위 관리 이규완의 딸과 재혼했다. 이규완은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인물로 강원도관찰사와 강원도 및 함경남도 도장관(도지사)을 지냈다.

이완용의 가족사진. 앞줄 가운데 앉은 사람이 이완용, 뒷줄 왼쪽 모자 쓴 사람이 김갑순의 사돈 이병길(이완용의 손자)이다.


김갑순의 장녀 정자는 윤치오의 아들 윤명선과 결혼했다. 아산 출신의 윤치오는 일제 강점기 총독부에서 근무하고, 중추원 참의와 중앙중학교장 등을 지냈다. 윤치호의 사촌 동생이며,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의 큰아버지이다. 사위 윤명선은 도쿄제국대학 출신으로 조선총독부 서기관, 만주국 총무과장을 거쳐 젠다오(間島省) 성 차장을 지냈다.

7남 종소는 이병길의 딸과 결혼했다. 이병길은 이완용의 손자로 일제가 내린 후작 작위를 물려받았으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 등에서 활동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김갑순은 이처럼 국내 내로라하는 권력자와 정략적인 혼인을 통하여 인연을 맺었다. 이완용과도 혼맥으로 연결됐으니 더 말할 게 없다. 자신이 부족한 부분은 '돈의 힘'으로 채우고 메꿔 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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