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투자 압박 비껴가는 최태원의 전략적 모호성 [윤경환 특파원의 브레이킹 뉴욕]
2026.07.19 18:03
트럼프 행정부 추가 대미 투자 압박에
崔, 미국 향해 인프라·당근책 우회 촉구
무리한 요구에 대만 TSMC와 다른 대응
최적 시점 찾아 중간선거까진 인내해야
SK하이닉스는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선도하면서 국부(國富) 증대의 최전선에 섰다. 여기에 ADR을 나스닥 시장에 상장하면서 265억 달러(약 40조 원)의 자금을 조달해 원·달러 환율 안정에도 기여할 수 있게 됐다. 근로자에게는 임금을 늘려주고, 주주에게는 높은 투자 수익을 제공하고, 국가에는 막대한 세수를 쥐어주니 한국인이라면 낯선 뉴욕 땅에서도 충분히 자부심을 느낄 기업이 됐다.
문제는 한국을 먹여 살리는 이 회사를 미국에서도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은 SK하이닉스 ADR 상장 바로 전날인 9일에도 경쟁사인 마이크론의 뉴욕주 클레이타운 팹(생산 공장) 콘크리트 타설 기념식에서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를 미국으로 불러와 생산 시설을 짓게 하고 싶다”며 “질투심을 느낀 경쟁자들이 결국 마이크론을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이크론이 자국 공장을 증설할 때마다 국내 메모리반도체 업체들을 향해 내놓던 압박 발언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또 꺼냈다.
월가에서도 상장 첫날부터 미국 투자에 대한 최 회장의 생각에 관심이 집중됐다. 자칫 잘못 대응하면 한미 양국 정부의 엇갈린 기대 속에 잔칫날 불필요한 잡음을 낼 수도 있는 상황이 됐다.
최 회장은 모호한 입장을 취하며 미국의 대미 투자 압박을 노련하게 비껴갔다. 최 회장은 상장 행사 직후 가진 CNBC 인터뷰에서 미국 반도체 팹을 추가로 건설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전력, 깨끗한 물, 부지, 노동력, 공급망 생태계 등의 조건만 충족된다면 투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면서도 “메모리반도체 공장을 짓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상대로 적정 장소를 물색하고 있다”고 답했다. 미국 추가 공장 건립 가능성을 배제하지도, 단정하지도 않았다.
최 회장은 이어진 특파원 간담회에서도 AI 반도체 공급 시설 증대의 시급성을 강조하면서 “미국 공장 투자를 검토는 할 수 있지만 반드시 하겠다는 입장도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또 “일본에 가면 일본 공장을 검토한다고 하고 미국에 가면 미국 공장을 검토한다고 하는 것”이라며 “메모리반도체 공장은 돈만 있다고 척척 지을 수도 없다”고 덧붙였다. 미국의 반도체 인프라·생태계의 미진함을 우회적으로 지적하면서 당근책을 더 내놓아야 한다고 은근슬쩍 촉구한 것이다. 이는 16일 2분기(4~6월) 실적을 발표하면서 미국 애리조나주에 1000억 달러(약 148조 원)를 추가 투입하기로 했다고 명시한 TSMC의 대미 전략과는 대비되는 대목이었다. TSMC는 올 1월 대만이 미국과 무역협정을 체결할 때도 미국에 공장 5곳을 더 짓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11월 미국 중간선거가 다가올수록 정치적으로 다급해진 백악관이 우리 기업을 향해 투자에 속도를 내라고 재촉하는 상황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올 수 있다. 다만 최 회장이 시사한 전략적 인내 방법은 우리 정부와 다른 기업들도 곱씹어봐야 한다. 한미 협력으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분야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무리한 투자 요구는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서 방어해야 하는 까닭이다. 적어도 트럼프 행정부의 명운이 걸린 중간선거 결과까지는 차분히 지켜봐야 한다. 최 회장 말대로 대미 투자는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AI 시장과 공급망을 고려한 최적 시점·조건 아래에서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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