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시간 전
매점인 줄 알았더니... 전국 최초 학교사회적협동조합 '여물점'
2026.07.18 17:16
| ▲ 쉬는 시간, 여물점에서 간식을 고르는 학생들의 모습. |
| ⓒ 박지원 |
점심시간이 끝나자 여물점 앞 풍경이 달라졌다. 운동장에서 뛰놀던 아이들도, 매점 앞에 서 있던 아이들도 종이 울리자 하나둘 교실로 돌아갔다. 텅 빈 매장에는 잠시 고요함이 감돌았다. 그리고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 아이들은 다시 매점으로 모여들었다.
화창하고 무더운 날씨였다. 아이들에게 여물점은 잠깐이라도 숨을 돌릴 수 있는 쉼터였다. 그러나 이곳은 단순한 매점이 아니다. 학생과 학부모, 교사, 지역 주민이 함께 운영하는 전국 최초 학교사회적협동조합이다.
서울 구로구 영림중학교 안에 있는 여물점은 겉보기엔 평범한 매점이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학교사회적협동조합으로 운영되고 있다. 2013년 전국 최초로 교육부 인가를 받았다.
학교사회적협동조합은 학생과 교사, 학부모, 지역 주민이 함께 학교 운영에 참여하며 교육 활동을 만들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여물점이라는 이름은 '여유 있고 물 좋은 매점'이라는 뜻으로 공모전을 통해 학생 투표로 지어졌다. 그 오랜 시간과 역사는 2020년 교육부장관상 수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학생조합원은 단순히 이름만 올리는 자리가 아니다. 공정무역 물품을 직접 만들어보기도 하고, 캠페인이 열리는 날에는 부스를 함께 운영하며 또래 친구들에게 공정무역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학생 이사는 1학년 교실을 돌며 조합원 가입을 홍보해 왔다. 교사 조합원은 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캠페인과 회의에 참여하며 힘을 보탠다. 지역주민 조합원은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온 이들이 많다.
이들은 학교 안 소식을 지역 사회로 전하고, 여물점을 마을과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다만 중학교는 3년 과정이라, 학생과 학부모조합원은 졸업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바뀐다. 여물점 운영을 맡고 있는 최연숙 사무국장도 처음엔 학부모조합원 중 한 명이었다. 자녀가 졸업한 지 오래됐지만, 그는 여전히 여물점을 지키고 있다. 3년마다 구성원이 달라지다 보니,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처음부터 여물점이 공정무역을 다루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계기는 지역이었다. 구로구청이 마을 단위로 혁신 교육사업을 진행하며 공정무역 캠페인을 시작했고, 여물점도 자연스럽게 이 흐름에 합류했다. 이후 협동조합과 마을 활동가들은 공정무역협의회를 구성했고, 여물점은 협의회 활동을 발판 삼아 공정무역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에게는 무엇을 전달하느냐보다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했다. 최 사무국장은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체험을 하고 공정무역 물품을 나눠주는 캠페인 방식이 가장 효과적이었다"라고 말했다. 여물점 매대에는 마시는 초콜릿과 마스코바도 설탕, 초코 쿠키 등 공정무역 인증을 받은 간식이 나란히 놓여 있다.
매점을 넘어 배움의 공간으로
| ▲ 최연숙 사무국장이 여물점 앞에서 밝게 웃고 있다. |
| ⓒ 박지원 |
학생들은 단순히 제품을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캠페인 준비 과정에서 공정무역의 의미를 배우고, 또래 친구들에게 직접 설명하며 자연스럽게 윤리적 소비를 익혀간다. 여물점을 자주 이용하는 중학교 2학년 한 학생은 공정무역을 이렇게 기억했다.
"공정무역은 생산자에게 이익이 보장되는 것 같아 좋은 것 같아요."
여물점은 매점을 넘어 학생들이 직접 문제를 해결해 보는 공간이기도 하다. '체인지 메이커(Change Maker)'라는 프로그램에서는 학생들이 일상의 작은 불편을 찾아 해결 방법을 고민한다. 손수건 물들이기, 타투 스티커 만들기 등 다양한 창업 프로젝트도 운영됐다. 영림중 학생들은 이런 경험을 살려 탈취제를 만들어 상을 받기도 했고, 그 수익금으로 비 오는 날 우산을 무료로 빌려주는 '미쁘다 우산'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물론 어려움도 있다. 공정무역 캠페인 참가 학생은 2023년 110명에서 2025년 300명 명으로 늘었지만, 학생조합원은 같은 기간 14명에서 9명으로 줄었다. 판매할 수 있는 공정무역 제품 수도 고민거리다. 최근 일부 공급업체가 공정무역 제품에서 제외되면서, 여물점이 취급할 수 있는 제품 수는 오히려 줄고 있다. 최 사무국장은 새로운 공급처를 찾는 방법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최 사무국장은 지난 12년을 돌아보며 가장 뿌듯했던 순간으로 2022년을 꼽았다. 학생들이 직접 무대에 올라 자신이 경험한 공정무역에 관해 이야기했던 날이다. 스스로 찾아 배운 것을 자기 언어로 풀어내는 학생들의 모습에,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매점을 자주 이용한다는 중학교 2학년 백모 학생에게 여물점은 이런 곳이었다.
"저에게 여물점은 자유를 주는 공간, 쉬는 공간이에요. 무엇을 안 해도 되는, 학교에서 제일 편안한 곳이에요."
최 사무국장의 "여물점은 학생들을 웃게 하는 공간이다"라는 말처럼, 여물점은 오늘도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채워지고 있다. 매점을 넘어 마을 사랑방이자 공정무역 배움터가 된 이 작은 공간이 앞으로도 좋은 선례로 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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