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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도, 선녀도, 춤추듯 멈추다…서두르지 않고 머물다 가는 곳, 영동

2026.07.18 10:00

| 영동 | 글·사진 김강수 여행작가

서두르지 않고 걷고, 쉬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여행. 올여름 영동에서는 잠시 멈춰 머무는 시간이 가장 특별한 추억이 된다. 월류봉 광장에서 바라본 월류봉과 월류정.


충북 영동군 황간면에는 이름 자체가 문장인 산이 있다. 월류봉(月留峰). 풀어 쓰면 ‘달이 머물다 가는 봉우리’다. 옛사람들은 능선을 타고 기울어가는 달빛이 마치 걸음을 멈추고 이 봉우리에 잠시 머무는 듯하다 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다. 달조차 서두르지 않고 머무는 곳이라면,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

영동에는 그런 곳이 유독 많다. 기차가 물을 채우기 위해 잠시 멈추던 급수탑, 신선이 내려와 노닐었다는 강가의 정자, 예인이 발길을 멈추고 호를 지은 폭포, 와인이 시간을 머금고 익어가는 지하 저장고까지. 이번 여름, 서두르지 않고 영동에 머물러보자.

기차도 쉬어가던 자리, 추풍령역 급수탑공원

기차도 숨을 고르던 추풍령역 급수탑공원. 지금은 여행자들의 휴식 공간이 됐다.


여행의 첫걸음은 추풍령역 급수탑공원에서 시작한다. 경부선 철로 위, 이름 그대로 ‘가을바람 고개’라는 추풍령은 경부선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다. 오르막을 오르던 옛 증기기관차들은 이 고개 어디쯤에서 반드시 숨을 골라야 했다. 그 숨 고르기를 도운 시설이 바로 급수탑이다. 1939년 세워진 이 급수탑은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현재 남아 있는 철도 급수탑 중 유일하게 몸체가 사각형이다. 둥근 급수탑들 사이에서 이 네모난 형태 하나가 유독 눈에 띈다.

지금은 증기기관차가 서지 않지만 급수탑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옆으로 공원이 조성됐고, 옛 기차를 전시한 공간과 생태연못, 파크골프장까지 들어섰다. 급수탑 아래 벤치에 앉아 있으면, 예전 이곳에서 물을 채우던 기차와 오늘 이곳에서 걸음을 멈춘 나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둘 다, 다음 고개를 넘기 전에 잠시 쉬어가는 중이다.

달이 머물다 가는 봉우리, 월류봉

추풍령에서 황간 방향으로 20여분, 원촌리에 접어들면 월류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천팔경의 제1경으로 꼽히는 이 봉우리는 높이 400.7m, 여섯 개의 봉우리가 동서로 이어진 연봉이다. 조선의 대학자 우암 송시열이 10년간 머물며 후학을 가르쳤다는 한천정사가 봉우리 아래 자리한다. 그가 왜 하필 이 자리를 골랐는지는, 초강천 건너편에서 월류봉을 바라보는 순간 이해가 된다. 깎아지른 절벽과 그 아래를 휘도는 물줄기가 그림처럼 겹친다.

월류정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징검다리를 건넌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초강천이 거친 소리를 내며 흐른다. 다리 한가운데서 모녀가 발을 담그고 잠시 더위를 식힌다. 밤이 되면 이곳은 또 다른 얼굴을 보인다. 음력 보름 전후, 달이 뜨면 수면 위로 비친 달빛이 능선을 따라 흐르듯 진다. 그 광경을 보려고 일부러 밤에 다시 찾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낮에는 물빛을, 밤에는 달빛을 내어주는 봉우리.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곳이다.

신선이 내려와 노닐던, 강선대

월류봉에서 차로 40분 남짓, 양산면 송호리에 이르면 강선대가 나온다. 양산팔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이곳은 금강 상류 양강 물속에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자리한 육각 정자다. 강선대(降仙臺), 이름 그대로 ‘신선이 내려온 자리’라는 뜻이다. 옛 전설에 따르면 하늘의 선녀가 이 강에 내려와 목욕을 하다 물속의 용바위에 놀라 서둘러 하늘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날 이후 이 바위를 강선대라 불렀다.

증기기관차 숨 고르던 추풍령역 급수탑
월류봉 휘감은 초강천 수면엔 달빛 비쳐

옥계폭포 낙수 소리에 매미가 화음 얹고
‘양산팔경 으뜸’ 강선대엔 옛 문인의 묵향

와인터널서 맛보는 한 잔은 기다림의 맛
지친 다리는 레인보우센터에서 풀기로

정자에 오르면 바위와 강물과 소나무가 만든 삼합의 풍경이 펼쳐진다. 강한 양기의 바위와 음기의 물 사이를 노송이 잇는다는 옛말이 그럴듯하게 다가온다. 정자 안에는 조선의 문인 이안눌과 임제의 시가 걸려 있어, 옛 선비들도 이 자리에 앉아 한참을 머물렀음을 짐작하게 한다. 정자 위에서 바라보는 강물은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데, 그 소리가 제법 시원하다. 도보로 1~2분 거리에 있는 카페에 들러 시원한 커피 한 잔을 사서 다시 정자로 돌아온다. 신선이 노닐던 자리에 잠시 앉아, 커피 한 모금과 강바람을 나눠 마신다.

예인의 발길이 멈춘 자리, 옥계폭포

난계 박연 선생과 인연이 깊어 박연폭포라고도 불리는 옥계폭포.


강선대에서 심천면 방향으로 30여분, 고당리 천모산 골짜기로 접어들면 옥계폭포를 만난다. 박연폭포라고도 불리는 이 폭포는 조선 초기 3대 악성 중 한 명인 난계 박연 선생과 인연이 깊다. 이곳에서 피리를 불다 폭포 아래 바위틈에 핀 난초를 보고 매료돼 자신의 호를 난계(蘭溪)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주차장에서 1분 정도 걸으니 30여m 높이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는 폭포가 나타난다.

여름의 옥계폭포는 유독 생기가 돈다.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서늘한 공기가 무더위를 밀어낸다. 폭포수가 만든 작은 소(沼) 주변에는 이끼 낀 바위와 물보라가 어우러져 있다. 폭포 소리에 매미 소리가 섞이니 이 계절만의 화음이 완성된다. 국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박연 선생이 이 물소리와 새소리 속에서 가락을 다듬었을 모습을 그려본다. 아마 이곳에서 그는 서두르지 않고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물소리를 배경 삼아 잠시 앉아 있으면, 그 마음이 어렴풋이 이해된다.

시간이 멈춘 지하, 영동와인터널

영동 와인 터널의 와인 저장고


옥계폭포에서 영동읍 레인보우 힐링관광지로 들어가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420m 길이의 와인터널은 원래 일제강점기에 탄약 저장고로 사용되던 토굴이다. 광복 후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이 굴이 와인터널 공사 중 발견돼 보존됐고, 지금은 수천 병의 와인과 거대한 오크통이 늘어선 저장고로 다시 태어났다. 포도의 고장 영동이 아니었다면 볼 수 없었을 반전이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한여름 더위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터널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몸을 감싼다. 포도밭 여행, 세계 와인관, 영화 속 와인, 거울의 방 등 10개의 테마존이 이어지며 포도와 와인의 역사를 눈과 몸으로 체험하게 한다. 영동은 전국 포도밭의 약 7.5%를 차지하는 대표 산지이자 국내 유일의 포도·와인산업특구다. 30곳이 넘는 와이너리에서 빚은 와인들이 이 저장고 안에서 오랜 시간 숙성을 기다리고 있다. 터널 끝 시음장에서 영동 와인 한 모금을 맛본다. 와인이 어둠 속에서 오래 머무는 동안 맛을 완성해가듯, 이 여행도 서두르지 않아야 제맛이 난다는 생각이 스친다.

빛과 물과 바람이 머무는, 레인보우 힐링센터

와인터널을 나와 500m만 가면 레인보우 힐링센터가 나온다. 이름 그대로 ‘힐링’을 테마로 조성된 공간으로, 영동의 자연 요소인 빛·물·바람·돌을 각각의 공간으로 풀어냈다. 이곳에 들어서면 발걸음이 절로 느려진다. 2층 릴렉스룸에는 영동의 특산 광물인 일라이트 온열베드가 있는데 한 번 누우면 일어날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 든다. M층에는 일라이트, 편백, 참숯을 활용한 개인 힐링스파 존이, 지하에는 족욕을 할 수 있는 힐링풋스파 존이 마련돼 있다. 일라이트볼로 채워진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자 온종일 걸어 뻐근해진 다리가 금세 풀린다. 명상의 연못 앞 해먹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본다. 시간이 멈춘 듯한 오후, 이곳에서만큼은 시계를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여정의 끝에서 내려다보다, 와인전망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자리는 지난 2월 정식 개장한 와인전망대다. 레인보우 힐링관광지 언덕 위에 세워진 이 전망대는 높이 50m, 와인병을 형상화한 독특한 외관으로 개장과 동시에 영동의 새 랜드마크가 됐다. 회오리 형태의 계단과 슬로프를 따라 오르면 3층에는 쉬어가기 좋은 전망 공간이, 4층에는 바닥이 유리로 된 스카이워크가 자리한다. 15인승 엘리베이터도 갖춰 어르신과 걸음이 불편한 이들도 편히 오를 수 있다.

지상 43m 높이의 스카이워크에 올라서면 발아래로 유리 바닥 너머 아찔한 풍경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영동 읍내와 포도밭, 오늘 하루 지나온 레인보우 힐링관광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 질 무렵 이곳에 오르면 노을에 물든 읍내 지붕들이 붉게 빛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 고장이 품은 이야기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모두가 ‘멈춤’이 만들어낸 풍경들이다. 달도 머물다 가는 곳이라면, 우리도 잠시 머물다 가도 좋지 않을까.

>>> 급수탑공원·월류봉은 무료 입장…둘레길도 걸어봐요

추풍령역 급수탑공원과 월류봉은 입장료가 무료다. 월류봉의 매력을 조금 더 느끼고 싶다면 월류봉 광장에서 반야사까지 이어지는 월류봉 둘레길을 추천한다. 굽이치는 초강천을 따라 물소리를 들으며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와인터널과 레인보우 힐링센터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용할 수 있고 매주 월요일은 휴관, 명절 당일 휴무다. 입장은 유료이나 휴대폰으로 디지털관광주민증을 인증하면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와인전망대는 무료이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 운영된다. 매주 월요일 휴관, 정오부터 오후 1시까지는 입장이 제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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