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전에 ‘자금 충당 지속 가능성’부터 따져야
2026.07.18 07:01
● 해외 국부펀드, 석유·가스 수출 수익금으로 자금 충당
● 기본소득 지급 알래스카·마카오, 인구 70만 수준
● 복지 축소하려 기본소득 실험한 핀란드도 실패
● 中 저가 공세 펼치면 韓 반도체산업 어려워질 수도
김용범 정책실장, ‘국민 배당금’ 제도 제안
가장 먼저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었다. 김용범 실장은 지난 5월 11일 자신의 SNS에 “인공지능(AI) 시대에 메모리 기업 주주, 핵심 엔지니어 등 이미 생산 자산에 접근한 계층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매우 큰 수혜를 받을 가능성이 높지만, 상당수 중간층은 원화 강세에 따른 구매력 개선, 제한적 재정 이전, 일부 자산 상승 정도의 간접 효과만 누릴 수 있다”면서 “일부는 전 국민에게 구조적으로 환원돼야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기업의 초과 이익을 사회 전체와 공유하는 이른바 ‘국민 배당금’ 제도를 제안한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에 대해 청와대조차 개인적 의견이라고 선을 그었고, 김 실장 자신도 “기존 세율을 높이는 등 증세를 하겠다는 게 아니라, 초과 세수만 활용하자는 취지”라고 밝혔다.하지만 김 실장이 구상한 구체적 재정 투입 방안에는 농어촌 기본소득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런 기본소득 이외에도 청년 창업 자산, 예술인 지원, 노령연금 강화 등이 포함돼 있다.
기본소득에 대한 언급은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당국자들에 의해서도 꾸준히 거론되고 있다. 6월 10일 이재명 대통령은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와의 인터뷰에서 “초과 이익의 일부를 국민에게 분배하기 위한 기본소득 지원금 같은 새 메커니즘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6월 24일 김민석 당시 총리는 “앞으로 한국이 실험하고 발전시켜 갈 AI 전환의 성과도 그런 기본소득과 연결하는 실험을 하고, 그 성과의 장단점 내지 여러 측면을 국제사회에 제공하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정책적 의무가 아닐까 생각을 해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6월 2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반도체산업 초과 세수 공유제 토론회’가 열렸다. 이 토론회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주장이 제기됐는데, 발제자로 나선 오준호 기본소득정책연구소 소장은 “반도체 경기 호황으로 세수가 급증하고 있지만, 이 호황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닿고 있지 않다”며 “혁신의 이익이 모두에게 흐르도록 국민 배당형 기금을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 소장은 반도체 초과 세수 등 연간 100조 원을 기금에 투입하고, 초기 10년간 수익을 재투자할 경우 국민 1인당 매월 10만 8000원, 20년 뒤에는 매월 29만 원, 30년 뒤에는 62만 원을 지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런 주장에 공감하는 국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노르웨이·호주·싱가포르·아일랜드, 국부펀드 운영
지금 전 세계에는 다양한 국부펀드가 존재한다. 김 실장이 사례로 든 노르웨이 국부펀드 이외에도 호주나 싱가포르, 그리고 아일랜드와 같은 국가들이 국부펀드를 운영하고 있다. 이런 국부펀드들은 그 효과가 어느 정도 입증됐다. 1974년 설립된 싱가포르의 테마섹(Temasek)은 최근 20년간 연평균 수익률이 9%, 50년으로 넓혀보면 연평균 14%에 이르는 수익률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50년 동안 오일 쇼크와 동아시아 외환위기, 그리고 전 세계적 금융위기를 겪었으면서도 이 정도의 수익률을 올렸다는 것은 충분히 평가할 만하다.노르웨이 역시 마찬가지다. 노르웨이 정부연기금, 즉 GPFG는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 펀드의 운용자산은 약 1조70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500조 원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1998년 설립 이후 2023년까지 연평균 수익률은 7.5%에 이른다. 그런데 노르웨이 국부펀드의 경우, 석유와 가스 수출에서 나오는 수익을 펀드의 자금 충당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원 수출을 바탕으로 국부펀드를 만든 또 다른 나라로는 호주가 있다. 그런데 이런 국가들 가운데 펀드의 수익금을 국민에게 기본소득 형태로 직접 지급하는 나라는 없다.
그렇다고 기본소득이라는 제도가 세계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국가 차원에서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경우는 없지만, 그런 제도를 시행하는 ‘지역’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 지역이 미국 알래스카주(州)다. 알래스카는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다. 이런 풍부한 자원, 특히 석유 등을 통해 얻은 소득을 바탕으로 알래스카 정부는 기금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알래스카 영구기금’이다. 이 기금을 바탕으로 알래스카주 정부는 1982년부터 기본소득 형태의 돈을 1년에 한 번씩 전 주민에게 지급하기 시작했다. 그 자격은 알래스카에 6개월 이상 거주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조건을 충족하기만 하면 1년에 한 번 100만 원에서 200만 원 사이의 금액을 받는다. 매년 지급 금액은 기금 운영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알래스카의 거주 인구가 70만 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라는 사실이다. 즉 인구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이런 ‘조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역 주민들에게 매년 돈을 지급하는 ‘지역’은 또 있다. 중국의 마카오다. 마카오는 2008년부터 마카오 거주 주민들에게 매년 170만 원 정도를 지급하고 있다. 마카오 인구 역시 70만 명 정도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기본소득을 전 국민에게 지급하는 나라는 없다. 물론 중앙정부 차원의 실험은 있었다. 핀란드가 그런 사례에 속하는데, 핀란드는 2017년과 2018년 2년 동안 실업자 2000명을 무작위로 선정해 월 560유로를 무조건 지급하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실험에는 조건이 있었다. 실험 대상으로 선정된 이들은 실업급여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 이 실험에 참가한 이들은 실업급여를 포기하는 대신 월 560유로를 받았다.
여기서 당시 핀란드가 왜 기본소득을 실험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핀란드가 기본소득 실험을 할 당시, 핀란드 경제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핀란드의 대표 기업인 노키아가 몰락하기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었고, 다른 경제주체들의 상황도 매우 좋지 않았다. 경제가 이렇듯 흔들리면 당연히 세수는 줄어들 수밖에 없고, 실업자 수는 급증한다. 유럽 국가들의 실업수당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에, 실업자 수의 증가는 곧 정부가 지급해야 하는 실업수당 지출의 폭발적 증가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중앙정부는 세수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실업수당 지출은 엄청나게 증가하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인데,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핀란드 정부가 기본소득 실험을 한 것이다.
실업수당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는 실업자들을 빠른 시간 내 노동시장으로 재편입시켜야 하는데, 이를 위해 기본소득 실험을 한 것이다. 당시 핀란드 정부의 논리는 이러했다. 실업수당보다 적은 기본소득을 받게 된 실업자들은 실업 상태를 탈피하기 위해 적극적 노력을 할 것이고, 구직 과정에서 과거보다 봉급이 낮은 직장을 선택하더라도 기본소득이 이를 보완해 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으므로 더 과감하게 직업을 구할 것이라는 기대였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복지로 나가는 재정을 줄이고 대신 취업을 선택하도록 유도하자는 취지에서 기본소득 실험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은 좌파 정부가 아닌 중도 우파 정부에서 이뤄졌다. 복지 축소를 위해 기본소득의 도입을 검토했다는 차원에서 이는 분명 우파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핀란드의 이 실험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기본소득의 지급이 실업자들의 재취업을 유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실험 결과 기본소득을 받은 이들의 삶의 만족도는 “약간” 높아지는 효과는 있었다.
핀란드 이외에도 인도의 일부 주, 과거 독일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일부 지역, 그리고 캐나다 온타리오주 등에서 1년 혹은 2년 정도의 기간에 기본소득제가 실험된 바 있다. 온타리오주 정부는 3년간 무작위로 선출된 저소득층 4000명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면서 취업, 재교육, 건강 등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시행 1년 만에 이 실험을 폐지했다. 더는 실험을 지속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성과가 미흡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반도체 호황이 앞으로도 가능한가
이처럼 기본소득을 실험한 국가와 지역들의 사례를 보면 복지 혜택과 기본소득을 함께 주는 구조가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국가재정이 화수분이 아닌 이상 복지와 기본소득을 동시에 확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국가재정은 건드리지 않고, 국부펀드를 통해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면 복지와 기본소득을 동시에 누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그것이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 또 현재 우리나라와 같이 반도체 호황에 따른 추가 세수를 미래세대 투자 재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국부펀드 방식의 자산을 조성하는 것도 합리적 대안이 될 수 있다.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한다. 하나는 알래스카 펀드나 호주, 그리고 노르웨이 펀드의 자금원은 특정 산업이 아니라 석유나 광물 자원이라는 점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특정 산업을 기반으로 펀드를 조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 차이가 있다. 광물과 같은 자원으로 펀드를 조성하는 국가들조차 자원이 무한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반도체에 의존해 펀드를 만들고 이를 운용해 미래 대응 펀드를 조성하거나 기본소득을 준비한다면, 그 지속성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지금 산업계에서는 반도체 호황 사이클이 앞으로도 가능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상황을 보더라도 지속성에 대한 의문은 제기될 수밖에 없다.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 논쟁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만큼 반도체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펀드를 만들거나 기본소득을 논하기 이전에 먼저 ‘자금 충당의 지속가능성’부터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이와 관련해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호남 지역 투자는 확정된 현실이라기보다 아직은 ‘계획’으로 바라보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호남 투자에 반대한다는 게 아니라, 반도체 관련 산업이 지금처럼 호황을 계속 누린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7월 4일, 미국 마이크론과 일본 경제산업성이 일본 히로시마현에 위치한 히가시히로시마 공장에서 신규 제조동, 즉 팹 기공식을 치렀다. 대만의 TSMC 역시 일본 구마모토에서 반도체 공장을 가동하는 상황을 봐도 삼성과 SK가 현재와 같은 이익을 계속 창출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또한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개선돼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저가 공세를 펼친다면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은 어려운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국가 채무 구조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줄이며 국채를 상환하는 것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추가 세수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활용할 것인지는 중요한 논의이지만, 그 논의가 지속 가능한 산업 전망과 재정건전성에 대한 냉정한 검토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미래 대응 기금이든 기본소득이든 결국 미래세대에 또 다른 부담을 넘기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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