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전
지역소멸에 맞선 문화 진지…책방 옆 미술관, 이야기가 꽃피다 [.txt]
2026.07.18 07:02
고창 해리, 폐교의 변신…직접 책 펴내는 경험 맛봐
동해 바닷가·제주 고씨책방·금산지구별도 보물창고
책이 지역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청년이 떠나고 인구가 줄어 활력을 잃어가는 지방 소도시를 책이 가진 연결의 힘과 문화의 힘으로 되살려낼 수 있을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생각을 했다. 매력적인 공간을 조성해 도서관과 북카페를 들였다. 북토크와 전시, 체험 프로그램, 문화행사를 마련했다. 지역 주민들에겐 사랑방, 공부방, 자랑거리가 되고, 외지인들에겐 매력적인 여행지가 되고, 청년들에겐 창의적인 활동 공간이자 일자리가 되었다. 올여름, 텍스트를 넘어 삶을 연결하는 책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전국의 책마을로 떠나보면 어떨까.
완주 삼례책마을
드넓은 곡창지대를 배후로 육로와 수로가 교차하는 전북 완주군 삼례읍은 조선시대 교통의 중심지였고, 일제강점기엔 만경평야에서 군산항을 잇는 쌀 수탈 중간집결지였다. 낡고 거대한 창고는 삼례에서 흔하고도 아픈 존재였고, 완주군은 지역의 시민사회·전문가와 손잡고 이를 문화시설로 탈바꿈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2016년 8월 문을 연 삼례책마을은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까지 지어진 양곡창고와 비료창고를 개조한 곳으로 호산방(고서점)·삼례헌책방·책마을카페가 입주한 ‘북하우스’와 ‘책박물관’, ‘북갤러리’ 등 세 동의 건물과 인근에 있는 ‘그림책미술관’으로 구성돼 있다. 정호상 삼례책마을 사무장의 말을 빌리면 “양곡창고가 지식창고로 재탄생한” 셈이다.
호산방은 삼례책마을의 주춧돌과 같다. 고서전문가인 박대헌 삼례책마을 이사장이 2013년 영월책박물관 폐관에 즈음해 진귀한 고서적과 근대 출판자료 수천점을 이곳으로 옮기며 책마을의 첫삽을 떴다. 10만권의 중고서적이 빼곡한 삼례헌책방에선 책을 읽거나 살 수 있는데, 새 책 한권 값에 2~3권을 살 수 있고 운 좋게 희귀본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책박물관엔 작고한 디제이 김광한씨가 수집한 수만장의 엘피(LP)와 카세트테이프, 스피커, 각종 음향기기가 전시돼 있고, 근현대 북디자인의 흐름을 짚는 ‘책의 얼굴, 북디자인’ 전시와 올여름 기획전인 ‘만경강 유리물고기’ 전시도 볼 수 있다. ‘유아, 예술, 책꽂이’ 전시가 한창인 그림책미술관에선 매주 수요일마다 구연동화(이야기가 싹트는 시간)와 그리기(그림으로 완성하는 이야기)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정호상 사무장은 개관 초기, 자전거를 타고 매일 등교하듯 책마을을 찾던 할아버지 한분을 기억한다. “어릴 적 가난해서 학교를 못 다녔는데 마을에 정말 좋은 곳이 생겼다”며 책 읽기 삼매경에 빠졌던 할아버지를 이젠 볼 수 없지만, 마을 주민들은 손님이 찾아오면 책마을에 함께 와 ‘삼례의 문화적 자부심’을 뽐내는 데 익숙하다.
연간 2만~3만명의 관광객이 책마을을 찾고, 근처에 또 다른 창고를 개조해 조성한 ‘삼례문화예술촌’이 들어선 것을 계기로 타지 문화예술가들이 이주하면서 삼례는 한결 활기차졌다. 책마을 건너편에 문을 연 한식뷔페식당 ‘새참수레’는 완주군 직영사업체인데, 싱싱한 지역농산물을 사용하는데다 이곳에서 일하는 마을 할머니들의 손맛이 소문나 점심시간엔 줄을 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다.
고창 책마을
해리 전북 고창군 책마을해리는 책을 읽고, 쓰고, 펴내는 마을이다. 2006년 당시 출판편집자로 일하던 이대건 책마을해리 촌장은 증조부가 1930년대에 설립해 희사한 해리초등학교 나성분교가 폐교 뒤 방치되다 도축장으로 바뀐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둘러 부지를 인수하고, 학교를 조금씩 책마을로 가꿔나갔다.
“1기 졸업생들이 3학년 때 꽂아놓은 플라타너스가 80년 묵은 거목이 되어 나무위도서관(동학평화도서관)이 됐어요. 생태도서관, 사진책방, 만화책방, 고전책방, 필사할 수 있는 공간들, 한권을 다 읽지 못하면 나올 수 없는 ‘책감옥’…, 책이 테마인 공간이 곳곳에 있는 큰 마을을 만들었죠.”
2012년 문을 연 책마을해리가 보유한 책은 무려 20만권. 책 읽는 공간 외에 쓰고 그리고 만드는 공방을 갖췄고, 좀 더 머물길 원하는 여행자를 위한 북스테이 시설도 있다.
책마을해리에선 누구나 책을 만든다. ‘마을학교’에선 해리면 할머니들이 들꽃그림책을 펴내고, 출판학교에선 전국에서 찾아온 어린이와 청소년, 어른들이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쓰고 엮는다. 책마을해리 공식출판사인 ‘기역’에선 지역의 작가와 문화예술가들이 지역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지역의 시각에서 해석한 책을 출판한다. 2025년까지 책마을해리에서 책을 펴낸 사람은 6389명, 총 546종의 책이 탄생했다. 이 가운데 국제표준도서번호를 발급받아 정식출판한 책은 231종(1937명), 마을학교와 출판학교 참여자 등이 경험 출판한 책은 318종(4452명)이다.
이대건 촌장은 왜 책을 ‘펴내는 경험’에 방점을 둘까. “펴냄을 전제로 글을 쓰면 글이 달라져요. 자신도 모르게 독자를 의식하고 배려하죠. 이렇게 펴낸 책은 개인의 기록을 넘어 공적인 생명력을 갖게 되고요.” 출판학교에선 대개 여럿이 함께 책을 펴내는데, 이는 차이를 인지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똑같은 것을 바라보고 비슷한 경험을 기록했는데 시각과 태도, 방점이 전혀 다르다는 걸 짧은 시간 강렬하게 체득하기 때문”이다. 이토록 짜릿한 경험을 선사하는 출판학교가 올여름엔 세차례 열린다. 빠르게 마감되니 관심 있으면 서둘러야 한다.
동해 바닷가책방
마을과 연필뮤지엄 1970년대 책방과 출판사, 인쇄소가 밀집한 지역문화의 중심지였던 강원도 동해시 동호동은 1980년대부터 어획량이 줄고 저출생, 청년인구 감소, 고령화의 모진 풍화를 겪으며 쇠락을 거듭했다. 동해시는 2017년 묵호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마을을 되살릴 ‘문화의 진지’를 구축하기로 했고, 바닷가책방마을과 연필뮤지엄이 나란히 문을 열었다.
동해시가 운영하는 바닷가책방마을은 “묵호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만화책과 무협지를 읽던 추억을 모티브로”(정유창 동해시 주무관) 조성된 복합문화공간이다. 1층엔 만화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벙커형 독서공간과 북카페가 있다. 지치고 무기력한 날엔 ‘도라에몽’을,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날에는 ‘무빙’을 추천하는 등 방문객의 기분과 상태에 따라 책을 추천하는 ‘감정 테마 북큐레이션 코너’도 마련돼 있어 초심자도 부담 없이 만화책을 즐길 수 있다. 2층에는 네컷만화를 그리거나 마음에 남는 문장을 엽서에 옮겨 적는 필사 체험 공간이 있고, 나만의 웹툰 그리기나 책갈피 만들기 등 만화책과 관련된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바닷가책방마을과 함께 들어선 연필뮤지엄은 박현택 관장이 40여년간 수집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연필과 연필깎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디자이너인 박 관장은 “육각형 연필을 펼치면 가로 3센티미터, 세로 18센티미터의 작은 도화지가 되는데 디자이너마다 다른 색감과 모양, 캐릭터를 그려넣어 개성적인 작품을 완성한다”며 “지나치기 쉬운 그 작은 디자인의 세계에 매료돼 연필을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박물관엔 그가 소장품 1만여점 가운데 엄선한 3천여점이 전시돼 있다. 박 관장은 관람객들이 “작고 정교한 전시물들을 시간을 갖고 찬찬히 둘러보기를” 간곡히 당부했는데, 그래야만 디자인과 기능을 중심으로 각각 연필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세계적인 필기구 전문회사(디자이너)들이 만든 연필의 서로 다른 특징을 알아채는 묘미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7월 중순부터는 ‘정도전’, ‘폭싹 속았수다’ 등 200여편의 국내 드라마·영화 제목을 쓴 강병인·전은선 캘리그래피 작가의 특별전도 열릴 예정이다.
박 관장은 “바닷가책방마을과 연필뮤지엄이 문을 연 뒤 작은 독립서점들이 하나둘 생겨나 지금은 서로 교류하며 새로운 지역문화를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6월에는 바닷가책방마을과 독립서점들이 함께하는 북페어를 열어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박 관장은 “언덕 위 책방과 박물관을 본 뒤 천천히 걸으며 인근 독립서점을 돌아보면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동해시 독립서점 지도는 동네서점 사이트(www.bookshopmap.com)를 참고하면 된다.
제주 고씨주택 책방·사랑방
제주시 원도심 산지천변에 자리한 고씨주택(제주책방·제주사랑방)은 1949년에 지어진 고택으로 일식건축과 제주의 전통가옥이 혼합돼 독특한 매력을 자랑한다. 탐라문화광장 조성사업이 추진되면서 철거 위기에 놓인 집을 지역 주민과 시민단체가 뜻을 모아 살려냈고, 리모델링을 거쳐 2017년 문을 열었다.
바깥채인 ‘책방’에 꽂힌 3500여권은 대부분 제주 관련 책으로, 인명사전부터 제주의 무속신앙, 4·3항쟁 자료까지 다양하다. 구하기 힘든 절판 도서도 많아 제주를 연구하는 이들에겐 보물창고로 불린다. 안채인 ‘사랑방’은 마을 주민들의 소통 공간이자 다양한 소모임과 문화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고씨주택 책방은 지난 6월부터 매월 주제를 달리해 제주의 독립서점들과 함께하는 북큐레이션 ‘X의 어떤 시선’을 진행 중이다. 7월에는 비건책방과 ‘함께 먹는 식탁’을, 8월에는 ‘여름나기’를 주제로 북큐레이션을 이어갈 예정이다. 고씨책방을 운영하는 제주 도시재생지원센터 김지연 연구원은 “2025년 한해에만 지역 주민과 관광객 1만6천명이 다녀갔다”며 “원도심 소풍과 아트페스타 등 다양한 행사가 연중 계속되면서 마을 주민들의 모임이 활발해지고 원도심에 활력이 생겼다”고 전했다.
금산지구별그림책마을
충남 금산 대둔산 숲속에 자리한 금산지구별그림책마을은 어린이·청소년 심리상담전문가 장길석씨가 만든 민간도서관이다. 대안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던 그는 그림책에 마음을 밝고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여기고, 자연과 벗하며 그림책을 마음껏 볼 수 있는 도서관을 설립했다.
6천여권의 그림책을 소장 중인 금산지구별그림책마을은 산림청이 지정한 민간정원으로 선정될 만큼 세심하게 가꾼 3만평 규모의 정원이 큰 자랑거리다. 정원 곳곳에 크고 작은 도서관과 ‘그림책 읽는 길’, ‘책 읽는 버스’ 등이 배치돼 마치 그림책 속에서 그림책을 보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서점과 갤러리, 레스토랑, 북스테이, 고택스테이 등의 시설도 갖추고 있어, 그림책 세상에 며칠 머물며 한가로운 여름을 만끽할 수도 있다.
이미경 객원기자 nanazaraz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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