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전
주저앉았다가도 결국 일어나... 우리 헌정사 닮은 남중생들의 '제헌절런'
2026.07.17 10:46
마라톤 대회에서 배번은 저마다 다르다. 그 숫자 하나로 기록이 남고, 순위가 갈리고, 한 사람의 레이스가 증명된다. 7년째 크고 작은 대회를 뛰어 온 러너로서, 나는 완주하면 가장 먼저 배번부터 떼어 사진으로 남긴다. 그 번호 안에는 그날의 내 고통과 환희가 고스란히 박혀 있으니까. 그런데 이날 우리 아이들의 배번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0717. 나만의 번호가 아니라 우리의 번호였다. 순위를 가르는 숫자가 아니라, 한마음으로 묶이는 숫자. 아이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각자의 기록을 겨루는 날이 아니라, 우리가 같은 방향을 향해 함께 달리는 날이다."
역사를 달리는 아이들
| ▲ 헌법을 달리는 아이들의 배번(AI 활용) 이날 아이들이 가슴에 단 배번은 저마다 다른 번호가 아니라 모두 같은 번호, 0717이었다. |
| ⓒ 이종관 |
<피스메이커스>는 이름 그대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우리 동아리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날을 골라, 그 의미를 공부하고 또 몸으로 달리며 되새긴다. 4월 3일에는 제주 4·3 사건을 기억하며 4.3km를 달렸고, 5월 18일에는 5·18 민주화운동을 기억하는 교내 캠페인을 열었으며, 6·10 민주항쟁 기념일에는 민주화운동기념관을 찾아 역사체험을 했다. 그리고 제헌절, 우리는 헌법을 달리기로 했다. 거리는 7.17km. 제헌절의 날짜를 그대로 달리는 거리로 옮겨 왔다.
달리기 전, 아이들과 제헌절이 어떤 날인지부터 찬찬히 짚었다. 제헌절은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처음 세상에 공포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제헌 국회가 이 날짜를 고른 데에는 뜻이 담겨 있다고 전해진다. 조선왕조가 문을 연 날이 음력 7월 17일이었는데, 새 공화국의 헌법을 옛 왕조의 건국일에 맞춰 양력 7월 17일에 공포했다는 것이다. 개천절이 그렇듯, 음력의 날짜를 양력으로 옮겨 역사의 연속성을 날짜에 새긴 셈이다.
그런데 이 뜻깊은 날은 오랫동안 우리 곁에서 조용히 잊혀 갔다. 3·1절·광복절·개천절·한글날과 함께 5대 국경일에 속하면서도, 2008년 주 5일제가 자리 잡으며 제헌절만 공휴일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나라의 뼈대인 헌법을 기리는 날이, 정작 달력에서는 검은 숫자로 남아 여느 평일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올해, 제헌절은 열여덟 해 만에 다시 '빨간 날'로 돌아왔다. 헌법의 가치와 국민주권의 정신을 되새기자는 취지에서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헌법을 달린 이 아침은, 되찾은 첫 제헌절을 바로 하루 앞둔 날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헌법 제1조를 소리 내어 함께 읽게 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짧은 두 문장이지만, 우리가 오늘 왜 달리는지가 그 안에 다 들어 있었다.
"초반에 다 쓰면 멈춘다" 페이스가 완주를 만든다
준비 운동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시작했다. 쿵쿵대는 비트에 몸이 풀리자, 아이들은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체육관을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열은 오래가지 않았다. 몇 바퀴 지나자 한 줄이 두 줄이 되고, 두 줄이 세 줄로 흐트러졌다. 숨이 턱까지 차 뒤처지는 아이가 생겼고, 급기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어깨를 들썩이는 아이도 나왔다.
나는 출발 전부터 몇 번이나 당부했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달리지 마라. 초반에 힘을 다 써 버리면 금세 지쳐서 멈추게 된다." 7년을 달리며 몸으로 익힌, 러닝의 가장 기본적인 진실이다. 페이스를 지키는 사람만이 끝까지 간다. 하지만 열다섯의 혈기는 '페이스'라는 말을 좀처럼 듣지 않는다. 출발과 함께 몇몇은 있는 힘껏 앞으로 튀어 나갔고, 예상대로 몇 바퀴를 못 버티고 벽에 부딪혀 뒤로 처졌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오랜 세월 달리며 되뇌어 온 러너들의 오래된 격언 하나를 소개한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그 아픔에 무너질지 아닐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달리기란 결국 그 선택을 몸으로 연습하는 일이다. 다리가 무거워지고 숨이 가빠 오는 순간, 여기서 멈출 것인가 한 발을 더 내디딜 것인가를 매 순간 고르는 일. 나는 지친 아이 곁으로 다가가 나란히 속도를 늦추며 말했다.
"천천히. 멈추지만 않으면 돼."
우리 헌정사도 오버페이스와 회복의 반복이었다
| ▲ '7.17 데모크러시RUN' 을 완주한 학생들 제헌절을 하루 앞둔 16일 아침, 체육관 청람관에 모인 〈피스메이커스〉 학생들이 '헌법을 달리다 |
| ⓒ 이종관 |
체육관을 도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자꾸만 우리 헌정사가 겹쳐 보였다. 헌법을 만들고 민주주의를 지켜 온 길은 결코 곧고 평탄한 트랙이 아니었다. 그 길은 때로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앞으로 내달렸고, 때로는 초반에 오버페이스한 러너처럼 지쳐 쓰러졌다.
1948년 제헌헌법 이후 우리 헌법은 아홉 차례나 고쳐졌다. 그 개헌의 상당 부분은 권력을 쥔 이들이 제 임기를 늘리고 자리를 지키려 헌법을 제 몸에 맞춰 주물렀던 후퇴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시민들은 지친 몸을 다시 일으켜 헌법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지금 우리가 쓰는 헌법은, 아이들이 얼마 전 기념관에서 마주했던 바로 그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피땀으로 되찾아 온 결실이다.
민주주의는 결승선을 한 번 통과하면 끝나는 100m 경주가 아니다. 뒤로 밀리는 듯 아프고 속상한 구간을 몇 번이고 지나면서도, 결국 다시 일어나 역사의 정방향으로 나아가는 긴 마라톤이다.
그 사실을 우리 아이들은 교과서가 아니라 삶으로 배웠다. 2024년 12월 3일 밤, 아이들은 헌법이 유린되는 현장을 생중계 화면으로 목격했다. 태어나 처음 겪는 계엄이었다. 교실에서 헌법이 얼마나 소중한지, 민주주의를 왜 지켜야 하는지 아무리 가르쳐도 잘 와닿지 않던 이야기가, 그 밤 아이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새겨졌다. 교사로서 나는 그 상처가 아팠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아이들은 그날 밤 어떤 수업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배웠다. 헌법이 왜 소중한지, 민주주의가 왜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하는 것인지를,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아침에 소리 내 읽었던 헌법 제1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그 한 문장이 왜 목숨처럼 지켜야 할 약속인지도.
13년간 교단에 서면서 내가 붙들게 된 믿음이 하나 있다. 배움은 교실과 교과서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고 없이 닥친 삶의 한복판에서 더 깊고 오래가는 배움이 일어난다. 교실에서 백 마디로 설명해도 넘지 못하던 벽을, 단 한 번의 현실이 훌쩍 넘어서게 만드는 장면을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그래서 나는 배움이 삶이 되고, 삶이 배움이 되는 교육을 하고 싶었다. <피스메이커스>를 만들고 운영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헌법을 지킨다는 것은 멀리 있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우리 곁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지키는 일이다. 그러니 2024년 12·3 비상계엄은 대한민국 모든 보통 사람들의 하루하루 평화를 깨뜨린 사건이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헌법이 만들어진 연도나 조항 번호를 외우게 하는 대신, 이렇게 묻고 싶었다. 헌법을 지키는 일이 '나의 하루'와 '나의 평화'를 어떻게 지켜 주는가. 그리고 그 물음의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아이들이 함께 달리던 트랙 위에 있었다.
결국, 아무도 걷지 않았다
뒤처졌던 아이들, 주저앉아 숨을 고르던 아이들은 오래 멈춰 있지 않았다. 곁의 친구가 손을 내밀고, 지나가던 친구가 "같이 가자"고 소리치자, 아이들은 이내 다시 일어나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우리는 끝내 7.17km의 결승선을 함께 통과했다. 빨랐던 아이도, 느렸던 아이도, 중간에 주저앉았던 아이도 모두 함께.
무라카미 하루키는 언젠가 자신의 묘비에 새기고 싶은 문장이 있다고 적었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나는 이날 우리 아이들에게서 꼭 그 문장을 보았다. 저마다 속도는 달랐지만, 결국 아무도 걸어서 들어오지 않았다. 넘어졌던 아이도 다시 뛰어 결승선을 넘었다.
하루키의 달리기가 철저히 혼자만의 고독한 기록이라면, 이날 우리의 달리기는 '함께'의 기록이었다. 우리 헌법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우리 민주주의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더 나은 헌법과 더 단단한 민주주의를 향해, 우리는 저마다 속도가 다른 시민들과 발을 맞추며 나아가야 한다. 빠른 사람은 잠시 기다리고, 처진 사람은 다시 일어나고, 그렇게 서로를 챙기며 끝내 함께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 그것이 바로 평화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아이들이 제 두 다리로 써 내려간 방식이었다. 우리 동아리 이름이 왜 '피스메이커스'인지, 아이들은 7.17km를 달리며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18년 만에 제헌절이 다시 '빨간 날'로 돌아온 올해, 우리가 함께 달린 7.17km는 짧은 거리다. 그러나 나는 이 짧은 거리가, 앞으로 이 아이들이 시민으로서 평생 달려갈 헌법의 길에 부어진 한 바가지 마중물이 되리라 믿는다. 나는 그 믿음을 안고 아이들과 함께 교실로 들어갔다.
* 경기도 성남시 영성중학교 역사동아리 〈피스메이커스〉는 4·3, 5·18, 6·10, 제헌절 등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날을 공부하고 달리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는 평화·민주시민 교육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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