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깟 노인회장 자리가 뭐라고"… 도둑 취급 받은 어르신에게 묻고 싶은 말 [한창수의 마음정비소]
2026.07.16 04:32
편집자주
30년 경력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270편 넘는 국제 의학 논문을 발표한 의학자, 다양한 채널로 대중과 소통하는 명강사인 한창수 고려대구로병원 교수가 4주에 한 번 '마음정비소'를 열어 한국인이 흔히 겪는 마음의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해드립니다.일흔셋의 어르신이 진료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한참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선생님, 그깟 노인회장 자리가 뭐라고 내가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회비가 모자란다고 온 동네가 나를 도둑으로 몰아요."
동네 노인회장을 맡으신 지 이태 남짓. 평생 농사를 지으며 정직 하나로 버텨온 분이었다. 후배와 겨뤄 연임까지 한 터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회비 장부에 빈자리가 났고, 그게 회장 탓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실이든 모함이든, 어르신은 몇 주째 가슴이 벌렁거려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물었다. 그깟 자리가 무엇이길래 평생 쌓은 명예가 소문 한 줄에 흔들리는가. 한 질문이 뒤따라 올라왔다. 어르신은 애초에 왜 그 자리를 맡으셨을까. 그렇게도 그게 하고 싶으셨을까.
열등감 만회하려 명함에 집착... 이루고 나면 공감 회로 둔해져
진료실에서는 자리 때문에 무너지는 사람을 심심찮게 본다. 회사 임원, 학회장, 아파트 동대표, 학부모회 임원, 그리고 동네 노인회장까지. 규모는 제각각인데 표정은 판박이다. 못 가지면 분하고, 가지면 더 가지고 싶고, 빼앗기거나 의심받으면 밤잠을 잃는다. 나이 들수록 그 자리는 더 절실해진다. 정년이 코앞이고 자녀마저 품을 떠나면, 작은 모임의 회장 자리 하나가 문득 자기 존재의 증명서처럼 느껴진다. 권력은 인간의 뇌가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극 가운데 하나다. 문제는 그 매달림이 정말 권력 자체 때문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무엇 때문인지를 우리가 자주 헷갈린다는 데 있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100년 전 흥미로운 진단을 내렸다. 인간의 깊은 동기 하나는 열등감을 만회하려는 '힘을 향한 의지'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 키 작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사장님' 명함에 집착하는 식이다. 권력은 손에 쥐는 순간 안도를 준다. 내가 부족하지 않다는 증거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도는 오래가지 않는다. 더 큰 자리로 갈아타야 또 잠시 안심한다. 권력이 마약처럼 작동하는 이유다.
뇌과학은 이 직관에 살을 붙여준다. 신경심리학자 이언 로버트슨은 '승자의 뇌'에서 작은 승리 하나가 테스토스테론과 도파민을 끌어올려 자신감을 키우고 더 큰 승리를 부른다고 했다. 그런데 같은 회로가 오래 자극되면 공감과 자기성찰을 담당하는 뇌 부위는 슬그머니 둔해진다. 심리학자 대커 켈트너는 이를 '권력의 역설'이라 불렀다. 권력을 쥐게 해준 바로 그 자질, 곧 공감과 경청과 협력이 권력을 쥔 뒤 가장 먼저 자취를 감춘다는 것이다. 진료실에서 임원들이 종종 하소연한다. 아랫사람 표정이 도무지 안 읽힌다고. 흐려진 것은 그들의 표정이 아니라, 이쪽의 공감 회로다.
'권력 좇다 패가망신', 예술 작품 단골 소재... 정도 지킨 위인들도
문학은 이 역설을 일찌감치 꿰뚫어 보았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마녀의 예언 한마디에 왕좌를 탐한다. 아내의 부추김에 왕을 시해하고, 왕좌에 앉은 뒤엔 그 자리를 지키느라 친구를 죽이고, 또 죽이고, 끝내 제 영혼마저 잃는다. 정작 그 욕망에 불을 지핀 레이디 맥베스가 먼저 무너져, 손에 묻은 보이지 않는 핏자국을 밤새 문지르며 몽유(夢遊) 속을 헤맨다. "내일, 또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라는 맥베스의 마지막 독백은 권력의 정점에서 마주한 공허의 풍경이다. 그가 진짜 원한 것은 왕관이 아니라 두려움 없는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그 두려움을 없애주기는커녕 더 깊이 파묻을 뿐이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는 한결 노골적인 비유가 있다. 손에 끼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절대반지. 그러나 이 반지는 가장 선한 이의 마음마저 야금야금 잠식한다. 요정 여왕 갈라드리엘은 그 유혹을 뿌리치며 말한다. "나는 위대해지는 대신, 작아지는 쪽을 택하겠다." 영국의 역사학자 액턴 경이 남긴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격언의 문학적 압축판인 셈이다.
그렇다고 권력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누가, 무엇을 위해, 어떤 마음으로 쥐느냐다. 고대 로마의 농부 킨키나투스는 좋은 본보기다. 외적이 쳐들어오자 원로원이 그에게 절대 권력을 맡겼고, 열엿새 만에 적을 물리친 뒤 미련 없이 권력을 반납하고 밭으로 돌아갔다. 훗날 워싱턴이 미국 초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스스로 물러난 것도 이 옛 농부를 흠모한 까닭이다. 권력은 소유하는 힘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 잠시 맡아 두는 권한임을, 두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줬다. 노자도 일찍이 일렀다. 가장 위대한 통치자는 백성이 그가 있는지조차 모르게 다스린다고. 요란하게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조용히 일이 되게 하는 자다.
우리 역사에서 그 본질을 몸으로 보여준 한 사람을 꼽자면 퇴계 이황이 있다. 조정이 벼슬을 내릴 때마다 그는 사직 상소로 답했다. 물러나기를 청한 것이 일흔아홉 번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다. 남들이 목숨 걸고 다투는 자리를 그는 목숨 걸고 사양한 셈이다. 예순여덟 노학자는 열일곱 임금 선조를 위해 필생의 학문을 열 폭 그림에 담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바치고서야 고향으로 돌아갔다. 도산서당에서 제자를 기르던 그가 세상을 뜨는 날 남긴 마지막 말은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였다. 평생 자리를 사양한 사람이 정작 역사에 가장 큰 자리를 남겼으니, 권세와 존경이 다른 물건임을 이보다 또렷이 보여주는 삶도 드물다.
떡고물 연연 말고 내 역량부터 정비해야
진료실의 그 어르신에게 나는 속으로 물었다. 어르신은 처음에 왜 그 자리를 맡으셨을까. 은퇴 뒤에도 쓸모 있는 사람이고 싶었던 마음, 동네 어른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 혹은 한평생이 옳았다고 한 번 더 확인받고 싶었던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자리는 그 갈증을 잠깐 축여주는 듯하지만, 매달릴수록 사람을 더 심하게 흔든다. 진짜 채움은 늘 다른 곳에서 온다. 어르신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회장 자리가 아니라, 평생 정직했다는 그 한 문장이었을 것이다.
자리에 앉은 사람이 스스로에게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뜻밖에 단순하다. 그렇게도 그게 하고 싶은가. 그 자리를 얻으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그 자리를 내려놓는 날에도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 하나. 그 일을 하면서 그 조직과 사회에 기여하고, 또 남기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나의 대의명분은 과연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다면 자리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고, 답이 궁하다면 그 자리는 이미 채움이 아니라 갈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거들먹거릴 수 있는 자리도, 사람들이 조아리는 모습도, 명예라 불리는 박수도, 그 자체는 권력의 본체가 아니다. 봉사와 기여를 하다 보면 곁에 슬쩍 따라붙는 떡고물 같은 것이다. 떡고물을 본체로 착각하고 매달리는 순간, 정작 본질인 책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진정한 권력은 사람을 두렵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좋은 상사 밑에서 일해 본 사람은 안다. 그가 자리에 있을 때 회의실 공기가 한결 부드럽게 흐른다는 것을. 그것이 권력의 가장 높은 단계다.
권력은 가진 사람의 그릇을 키워주지 않는다. 다만 이미 가진 그릇의 모양을 더 또렷이 드러낼 뿐이다. 좁은 그릇에 담기면 넘쳐흘러 주변을 적시고, 깊은 그릇에 담기면 비로소 사람을 살린다. 자리를 욕망하기 전에, 먼저 그 그릇부터 빚을 일이다. 내가 하던 일은 좋은 후배가 맡아 완성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하는 동안 내가 빚은 그릇은, 끝내 나의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한창수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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