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예산은 넘치는데, 성범죄 피해자를 위한 기술 연구는 왜 없나
2026.07.15 06:53
AI는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누군가는 ‘두 번째 산업혁명’에 가까운 변화를 예고하기도 한다. 흐름을 바꿀 수 없다면 무엇이 옳은 방향인지 서로에게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과정을 생략해서는 안 된다. 인터넷·스마트폰의 등장과 비교해 AI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이 기술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또 내 일상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꾸는가. 오늘날 우리가 AI에 던지는 질문은 어떤 미래를 만들고자 하는지 보여주는 밑그림이기도 하다.
AI에 대해 궁리하다 보면 결국 ‘인간다움’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윤리·책임·신뢰 같은 사회의 핵심 가치가 그 안에 포함된다. 법과 제도는 기술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기술이 인간 앞에 서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끌려가지 않고 함께 갈 수 있을까. 그 어느 때보다 상상력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경제 논리와 효율 너머 AI가 남긴 질문들을 점검할 때다. 기술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조정하고, 상호작용의 방식을 다시 쓰고, 방향을 제시하며 기준을 합의해야 할 숙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인간 없는 전쟁〉을 쓴 최재운 광운대 교수(경영학부 빅데이터경영), 교육 현장에 AI 기술이 활용될 가능성을 탐구하는 조수현 계명대 교수(교육학과), 피해자 지원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조경숙 도토리랩스 대표, 국가AI전략위원회 공공AX분과 위원장을 맡아 공공부문의 AI 전환을 이끄는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에게 AI 시대를 지혜롭게 건너가기 위한 방법을 물었다. ‘정직한 비관’으로 쌓아 올린 〈시사IN〉의 질문이다.
■ 조경숙 도토리랩스 대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만화평론가, 한국여성의전화 이사, 〈AI 블루〉 공동 저자
조경숙은 직함이 많은 사람이다. 개발자이자 기술 활동가이고 만화평론가이자 대학원생이다. 맡고 있는 역할 중 가장 좋아하는 정체성은 대학원생이다. 조경숙은 현재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피해자 중심 기술’을 주제로 박사 논문도 준비 중이다. 지도교수와 동갑이지만 학생으로서의 위치를 만끽하고 있다. 세부 전공은 디지털 포렌식이다. 개발 업무를 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시야가 생겼다.
개발자는 현실 세계의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다. 해당 영역의 규칙이나 프로세스를 깊이 이해할수록 구현하는 기술의 범위도 넓고 깊어진다. 조경숙은 자신에게 최적화된 도메인이 ‘비영리’라고 말했다. “가장 좋아하고, 애정이 있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구조를 알기 때문이다.” IT 에이전시 ‘도토리랩스’는 2023년 ‘도토리 제작실’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홈페이지 개발, 데이터 정리, 데이터베이스 구축, 관리자 페이지 개발 등 비영리 영역에서 실무자들을 도울 수 있는 기술 전반 프로젝트를 ‘다’ 한다. 기술을 지원하면서 발생한 이슈 중 필요한 것은 연구로 이어간다. ‘현장 기술 연구’가 도토리랩스의 기본 콘셉트다.
도토리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제자리를 지킨 도토리가 참나무가 된다는 의미다. 두 번째는 실무적 의미를 담았는데, 시민단체나 비영리 단체 실무진이 필요해서 하려는 일을 보면 예산이 정말 도토리만 했다. 너무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있어서 간신히 마련한 프로젝트인 경우가 많았다. 도토리만 한 예산이어도, 도토리만 한 프로젝트여도 우리는 같이 연구한다는 의미를 담아 ‘랩’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AI 대중화 이후 달라진 업무가 있다면.
활동가들도 AI를 실제로 많이 쓴다. 제가 어느 정도 틀을 잡으면 그 안에서 AI로 웹페이지 유지 보수를 직접 하는 경우도 있다. 예전에는 추후에도 관리하기 쉽게 초급자용 툴을 만들었다면, 지금은 중급자 이상의 툴도 활용할 수 있어서 제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범위가 넓어졌다. 기술이 발전하니 오히려 과로한다. 다른 개발자들도 마찬가지 어려움을 토로하는데 생산성이 좋아지니 끊임없이 생산하게 된다.
대학원 진학은 ‘활동’의 연장선인가.
2018년에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를 만나서 처음 디지털 성착취 문제를 알게 됐다. 여성 개발자들이 모여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궁리하게 됐고, 3년 정도 스터디도 했다. 그러던 중에 n번방이 터졌다. 여성단체 활동가들 문의가 많았다. 일개 개발자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이어졌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겠다 싶었다. n번방 연구를 하면서 관련 판결문 64건을 다 읽었다. 조주빈이 미성년자를 포함한 영상과 사진을 올리며 성 착취로 제작한 영상임을 알렸을 때 대화방에 있던 사람들이 ‘환호하였다’라고 판결문에 적혀 있었다. ‘환호하였다.’ 그 문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피해자 중심 기술을 박사 논문 주제로 정했다.
한국에는 피해자 중심 기술 연구(Survivor-Centered Technology)라는 분야가 없다. 다행히 현재 학교에서 연구를 지원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서 개척하는 마음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코넬 테크나 뉴욕 대학(NYU)을 중심으로 해외에서는 활발하게 연구되는 분야다. 아예 기술 오용 종식을 위한 테크 클리닉이 대학 안에 있다. 피해자가 고통스러운 증거를 직접 분류하지 않도록 디지털 증거 수집을 자동화하거나, 가해자가 몰래 설치한 스파이웨어 등을 찾아내는 보안 기술을 연구한다. 유출된 데이터에 관한 리포트도 작성해준다. 가해자가 기술을 무기로 쓴다면, 피해자의 트라우마 관점에서 이를 돕고 방어하는 일도 기술의 몫이어야 한다.
미국에서 ‘764 네트워크 사건’이라는 게 있었다. 디스코드와 텔레그램을 기반으로 한 미국판 n번방 사건이다. 〈로블록스〉 〈마인크래프트〉 등 어린이들이 모이는 게임을 통해 정서적 유대를 쌓고 사소한 약점을 잡아 성적·신체적으로 착취했다. FBI가 전담반을 꾸리고 ‘1급 국가 안보 위협’이자 테러조직으로 공식 지정할 정도로 그 과정이 잔혹했다. 핵심 가해자는 청소년이었음에도 최대 징역 80년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 주동자는 잡혔지만, 조직은 점조직 형태로 계속 복제되고 있다.
기술을 무기로 괴롭힘을 일삼는 행위를 보안 차원에서 연구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기술적으로 완벽해도 사람을 해친다면 실패한 보안 시스템이다. 세계 4대 정보 보안 톱티어 학회인 ‘유제닉스 보안 심포지엄’은 ‘온라인 증오 및 괴롭힘’과 ‘기술 오용’을 정식 연구 트랙으로 개설하고 있다. ‘764 네트워크 사건’과 비슷한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연구와 법제화 활동도 유제닉스를 중심으로 활발하다. 스토킹을 정밀하게 탐지하는 알고리즘을 연구하거나, 피해자가 조사 과정에서 겪는 트라우마를 완화할 수 있는 보안 인터페이스 구축 연구도 이뤄진다.
스마트폰 정보를 가로채는 스토킹웨어 애플리케이션 문제가 심각하다고.
앱을 깔면 누구랑 통화하고 문자를 나누는지 다 받아볼 수 있다. 위치도 감시할 수 있다. 지난 2월에 스토킹웨어 산업의 실체가 드러난 사건이 있었다. 한 해커가 유명한 스토킹웨어 애플리케이션 회사의 고객사를 하나 해킹해서 통째로 공개했다. 10개 주요 업체 중 한 곳만 털었는데 구매자가 약 54만명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이 타인을 불법 감시하고 있다는 의미다. 높은 스마트폰 보급률과 IT 인프라를 가진 한국은 어떨까? AI가 발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단계의 AI를 잘 활용해 범죄 피해를 효과적으로 지원하면 좋겠다. 완전히 새로운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일상의 문제를 해결해줄 적정 기술이 필요하다.
AI를 연구하는 동안 달라진 생각이 있다면.
삶의 지축을 흔드는 기술은 확실하다. 막을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기술에 대한 전망은 소질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기술을 사용하는 마음에는 관심이 있다. 미래보다는 지금이 중요하고 현장에서 느끼는 구체적인 감정을 알고 싶었다. AI 기술도 여느 기술과 마찬가지인데 그걸 결정하는 과정이 민주적인지 여부가 저한테는 좀 더 큰 관심사다. 이건 거버넌스의 문제다. 예산을 결정할 때 젠더 관점이 반영되면 좋겠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AI와 관련해 막대한 예산을 쥐고 있는데, 의사결정 과정에서 다양성은 확보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싶다. 젠더 관점으로 보면 이 모든 과정이 여전히 불평등하다. 경찰청을 비롯해 여러 공공기관이 다 AI 만든다며 발주하고 챗봇을 둔다. 돌봄이나 노동 현장, 성범죄 피해 관련해 AI를 어떻게 쓸지에 관한 논의나 예산은 찾아보기 어렵다. 불법 촬영 모니터링하고 탐지하는 정도에 AI 예산이 들어간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AI 기술이든 어떤 기술이든 그냥 평등해지지 않는다. 기존에도 젠더 관점이 부재하고 관련 예산이 없으니 AI 관련 투자도 그렇게 이어지는 거다. 학계에서 연구과제를 발주하는 공공 주도의 돈이 중요한 이유가, 연구가 시작돼야 담론도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연구과제를 받으면 ‘이런 주제도 있구나’ 하면서 살펴보게 된다. 그러다 논문을 쓰면 그게 자기의 경력이 되는 거다. 젠더 관점의 연구자를 양성하려면 관련 과제와 투자가 필요한 거다. 과제를 따기 어려운 게 아니라 과제 자체가 없다. 피해자 관점에서 AI 기술을 적용하는 연구나 공모가 없으면 당연히 그런 연구자도 양성할 수 없다. 담론도 만들 수 없다. 관련 연구를 하고 싶은 사람은 출발선을 찾지 못해 헤맨다. AI 관련 연구에 젠더 관점이 담긴 주제를 넣으면서 포션을 만들어야 한다.
“기술은 누가 주도하는지에 따라 지극히 정치적이며 다분히 불평등하다”라고 했다. 이 불평등을 완화할 방법이 있을까.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저항 중 하나가 ‘내 데이터 쓰지 마’가 아닐까. 내 데이터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는지를 자세히 확인할 수 있어야 하고, 거부권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금융 데이터가 특히 기업 편향적인데, 디지털정의네트워크가 가명 정보 활용을 정지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가명 처리하더라도 내 데이터를 활용 대상에서 제외해달라’고 했는데 ‘그런 사례가 없어서 안 된다’고 하니까, 이 문제를 법원으로 가져간 거다.
AI를 ‘잘’ 사용하는 방법을 조언한다면.
인류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형태의 도구다. 의미를 축소할 필요도, 과장할 이유도 없다. 컴퓨터 과학자인 최예진 교수의 말마따나 AI는 ‘불’이다. 잘 쓰면 엄청난 도구지만 제대로 통제하지 않으면 모든 걸 파괴할 수 있다.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는 모두가 계속 알아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기술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또 나의 구체적인 무엇을 바꾸고 있는지 이런 부분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해보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경험을 개인화하지 말고 주위 사람과 나눠보면 어떨까. ‘나는 이런데, 너는 어때?’ 정답은 없다.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높은 시절에는 우리가 서로에게 레퍼런스가 되어주어야 한다.
※8월4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페럼타워 페럼홀에서 2026 〈시사IN〉 인공지능 콘퍼런스가 열립니다. 조경숙 대표는 ‘피해자 중심 기술, AI 시대의 새로운 보안’이라는 주제로 발표합니다. 참가 신청: saic.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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