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국가의 역할, 산업정책의 귀환
2026.07.15 06:53
철강, 자동차, 반도체는 각각 당대의 최첨단 산업이었다.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으로 불리던 한국엔 ‘주제넘은’ 업종들이었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한국에 허용된 기능은 수입해서 쓰거나(철강 등) 조립(자동차, 반도체)하는 것이었다. 이는 저개발국은 자기 나라에서 가장 싸게 생산할 수 있는 제품(값싼 노동력, 농산물, 가발)을 만들어 해외의 공산품(철강, 자동차, 반도체)과 교환하면 된다는, ‘시장주의’ 원리에도 걸맞았다.
그러나 당대의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철강 수입업자와 자동차·반도체 조립 하청업체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장원리를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리한’ 투자를 퍼부으며 최첨단 제품들의 독자 생산에 뛰어들었다. 실패도 했지만 더 많이 성공한 그들은 ‘신화’로 불리게 되었다. 이 신화 뒤에 ‘산업정책’이 있었다. 정부가 ‘유망 산업’을 선정해서 그 부문의 기업에 금융·행정 지원을 쏟아부었다.
한국형 산업정책은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경제정책의 전면에서 퇴각했다. IMF 등 국제기구와 한국 내부의 개혁 담론은 산업정책으로 중화학공업 부문에 지나치게 많은 투자가 이루어진 것이 외환위기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이후 한국 경제정책을 지배한 언어는 시장개혁, 규제완화, 혁신, 산업생태계 등이었다. 국가의 역할은 직접 생산능력을 조직하기보다 시장 실패 보완이나 민간의 혁신을 돕는 것으로 한정되었다. 김대중 정부의 ‘IT·벤처 육성’,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금융허브’,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문재인 정부의 ‘한국판 뉴딜’ 등은 대체로 ‘방향성’을 제시하거나 예산에서 일부를 쪼개 지원하는 정도에 그쳤다. ‘정부가 시장보다 똑똑할 수 없다’는 데다 대기업 특혜 시비에 휩싸일 우려도 컸기 때문이다.
왜 ‘3대 메가’인가
그로부터 29년이 흐른 2026년 6월29일, 이재명 정부의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발표는 국가와 산업의 관계가 다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이 프로젝트의 기조는, 정부가 3대 신성장 동력으로 제시한 반도체, AI 데이터센터(AIDC), 피지컬 AI 분야에 10여 년에 걸쳐 수천조 원 규모의 민간자본(삼성, SK 등)을 유치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3대 산업의 발전에 필요한 전력·용수·입지·산업도시 같은 기반 인프라를 정부가 책임지고 조속히 공급하기로 했다. 이렇게 외환위기 이후 정당성을 잃은 산업정책의 언어들이 화려하게 귀환했다.
산업정책의 시발점은 ‘어떤 산업을 선택해 발전시키느냐’다. 다른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이재명 정부는 AI(인공지능)를 선택했다. AI에도 여러 부문이 있다. 일반적으로 AI라고 하면 거의 모든 시민은 챗지피티, 제미나이, 클로드 같은 ‘AI 모델’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는 AI 모델이 아니라 반도체, AIDC, 피지컬 AI 등 물리적 실체를 뚜렷하게 가진 부문들(이하 ‘3대 메가’)을 골라 ‘3대 메가프로젝트’로 명명했다. AI 모델이 ‘가상 두뇌’라면, ‘3대 메가’는 그 두뇌의 작동에 필요한 물질적 실체들이다.
이재명 정부는 왜 ‘화려한’ AI 모델 대신 ‘3대 메가’를 선택한 것일까? 프로젝트 발표회 전후의 보도자료들에 따르면, 이재명 정부는 AI를 하나의 기술(새로운 소프트웨어)이라기보다 “글로벌 경제·산업 지도의 판”을 흔드는 대변혁으로 평가한다. 18세기 후반의 증기기관, 19세기 후반의 내연기관과 전기, 20세기 중후반의 컴퓨터와 인터넷처럼, AI를 경제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거대한 구조적 변화를 불러올 ‘범용 기술’로 본다는 의미다.
AI가 범용 기술로 미래를 지배하는 것은 ‘연산력(compute)’이 산업과 사회의 기반이 된다는 말과 같다. 연산력은 ‘컴퓨터가 계산을 얼마나 많이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가’를 나타내는 지표다. 1초당 푸는 문제(단순한 사칙연산이지만)가 수천억~수조 개인지 수백경(京) 개인지에 따라 AI의 성능이 달라진다. 증기기관 시대의 마력(기계를 돌리는 물리적 동력의 단위), 내연기관 시대의 석유, 전기 시대의 전력량이 그러했듯, AI 시대에는 연산력이 곧 생산력의 기본 자원이자 척도다.
이 연산력의 물질적인 기본 단위가 바로 반도체다. 수많은 반도체가 집적된 데이터센터(AIDC)는 현실 세계의 데이터들로 ‘AI 모델’을 학습(머신러닝)시켜 더 정확한 판단과 추론이 가능한 ‘지능(intelligence)’을 생산한다. 이 지능이 현실 세계로 확장되면 ‘피지컬 AI(physical AI)’가 된다. 로봇, 드론, 가전제품, 자동차(자율주행), 산업기계 등이 친숙한 사례다. 그리고 피지컬 AI는 현실 세계와 부딪치며 얻은 새로운 지식(데이터)을 다시 데이터센터로 보낸다. 이는 AI 모델의 학습 자료로 활용되어 더욱 정교한 ‘지능’으로 이어진다. 처리할 데이터가 계속 많이 늘어난다는 것은 ‘더 크고 효율적인 연산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는 다시 반도체 수요의 증가로 연결된다. 이른바 ‘AI 선순환’이다.
이 관점으로 보면 반도체에 대한 글로벌 수요는 장기적으로 꾸준히 늘어날 전망이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6월29일 발표회 직후 기자들과 만남에서 이렇게 말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산업에 뛰어든 1980년대 중반부터 2025년까지 40여 년 동안 총수익이 295조원이다. 그런데 올해의 (예상) 수익은 350조원이다.”
AI 이전의 반도체와 이후 반도체는 경제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상품이다. 반도체가 PC, 스마트폰, 서버의 주요 부품에 그쳤을 때 이 산업은 ‘경기 사이클’에 지극히 민감했다. 호황기에 대규모 투자로 반도체 공급을 늘리면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반도체 업체가 증산하면 가격 폭락이 필연적이고, 업체들은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감산과 대규모 손실 정도면 다행이고 폐업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산업과 사회가 AI를 점점 더 생산 및 운영의 기본 인프라로 채택하면 필요 연산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이 경향은 최근까지 지표로도 명확히 확인된다. 그렇지 않다면 삼성전자의 2026년 수익이 이전 40년의 총합보다 클 수 있을까? 물론 반도체산업에서 경기 사이클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상당 기간 반도체 수요의 바닥과 평균이 ‘AI 이전’보다 훨씬 높을 것이라는 기대가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다. 더욱이 자율주행, 스마트 공장, 금융, 행정 등 아직 AI가 본격적으로 적용되지 않은 사회·경제적 영역이 광범위하게 남아 있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기업은 앞으로 다가올 수요 증가에 대비해 생산능력을 필사적으로 확충할 유인을 갖는다. 외형상 공격적이지만 사실은 ‘방어 전략’에 가깝다. 전 세계가 ‘거대한 AI 군비경쟁(Arms Race)’의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이유다. AI라는 범용 기술을 선점하지 못하면 영구적으로 도태된다는 글로벌 공감대가 구축되어 있다.
다시 ‘반도체→ AIDC→ 피지컬 AI→ 데이터 수집→ 더 큰 반도체 수요’의 선순환으로 돌아가자. 미국의 ‘AI 모델’은 이 선순환 없이 고도화될 수 없다. 이재명 정부의 야심은, AI 산업이 발전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병목’인 ‘3대 메가’를 틀어쥐는 것이다. 김용범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은 지난 6월11일 자신의 페이스북 홈페이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AI 시대의 전략적 가치는 AI 모델 그 자체보다 모델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기반을 제공하는 데서 나온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기반들이 서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반도체는 데이터센터를 가능하게 하고, 데이터센터는 피지컬 AI를 움직이며, 피지컬 AI는 다시 새로운 데이터를 만든다. 이 순환이 시작되면 산업은 각각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플라이휠(상호가속 메커니즘)처럼 가속된다.”
글로벌 AI 공급망 핵심 거점의 꿈
그러나 ‘3대 메가’ 가운데 한국이 글로벌 시장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한 영역은 메모리 반도체, 특히 HBM을 포함한 고성능 메모리 정도다. 피지컬 AI 부문에서는 양대 강자인 미국과 중국을 멀찍이서 추격하고 있다. 특히 데이터센터 산업을 키우려면 넓은 부지와 용수, 저렴하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망이 필요하다. 더욱이 글로벌 빅테크와 주요 고객사들이 데이터센터에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라고 요구하는 흐름이 지속적으로 강해지고 있다.
한국은 반도체 영역에서는 기술과 생산능력에서 추적자들을 멀찍이 따돌려야 한다. 반대로 데이터센터와 피지컬 AI 부문에서는 맹추격을 감행해야 한다. 국가 차원의 산업정책으로 민간자본을 ‘3대 메가’로 유도하는 한편 이에 필요한 전력망, 용수, 입지, 산업생태계(도시), 교통 인프라 등을 빠르고 적극적으로 공급해야 한다.
이 프로젝트의 또 다른 야망의 축은 한국 경제, 나아가 한국이라는 국가의 장기적 하락 추세를 뒤집는 것이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00년대 후반의 3%대에서 최근 1%대 후반까지 떨어졌다. 고령화와 낮은 출산율로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고 있으며 그나마 수도권으로 유출되면서 이외 지역들은 피폐화하고 있다. 박근혜의 창조경제도, 문재인의 소득주도성장도, 윤석열의 시장주도성장도 이 추세를 멈추지 못했다. 이를 AI 혁명이란 거대한 파도를 타고 반전시키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거시적 구상들을 지역별 투자계획으로 구체화한 것이 6월29일 발표된 3대 메가프로젝트다.
요점만 간추리면 평택은 3~4년, 용인의 두 산단은 각각 7년, 12년 완공 시점을 앞당겨 5년 내 메모리(D램) 생산능력을 두 배로 확대할 계획이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에 반도체 팹(공장) 4기를 구축해 제2의 생산 거점으로 삼는다. 충청권과 영남권은 각각 반도체 패키징 및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거점으로 육성한다. 피지컬 AI 부문에선 ‘글로벌 3강 도약’을 목표로 전북 새만금과 대구·경북권을 양대 축으로 전환시킨다. 데이터센터는 울산(SK), 동해(GS), 세종(네이버)을 중심으로 550조원을 투자해 1단계 8.4GW, 이후 2035년까지 10GW를 추가(합치면 18.4GW)한다. 국가의 몫은, 이런 시설들이 들어서는 데 필수적인 전력·용수·입지 등 기본 인프라를 적기에 공급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전기국가 비전’ 및 산업생태계 구축을 위한 ‘기업형 첨단도시 조성’을 약속했다. 주로 수도권 이외 지역을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방향보다 실행이다. 반도체 팹과 데이터센터의 완공에 뒤지지 않는 속도로 그 기반인 전력망, 용수, 폐수처리 등의 인프라를 국가가 제공할 수 있을까. 특히 전력망 건설은 주민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로 자칫 한없이 지체되다 투자 타이밍과 어긋날 수 있다.
또 하나의 변수는 이 프로젝트가 국가 재정뿐 아니라 민간기업의 대규모 투자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AI 투자 붐이 꺾여 빅테크들의 반도체 주문이 줄거나, 민간기업들의 ‘장기 투자’로 줄어드는 배분 몫 때문에 소속 노동자 및 주주들이 반발하면 프로젝트 진행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특히 지난해와 올해의 상법 개정으로 기업 이사들은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를 새롭게 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한 법적 시비에 노출되어 있다. 포항제철 방식의 국가 재정 프로젝트와 다른 지점이다.
그러나 이런 리스크들에도 한국이 AI 전환이라는 글로벌 추세를 거부하긴 어렵다. 이번 프로젝트를 단순히 지역균형 정책이나 선거공학적 이벤트로 보기엔 매우 규모가 크고 설계도 그리 허술해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AI 모델 왕좌’를 찬탈하겠다는 식의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인 제조업 역량과 국가의 산업 조직력을 결합해 ‘AI 산업의 병목’ 부문들을 장악하겠다는 철저한 실리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한때 산업정책은 시장을 왜곡하는 구시대적 관행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미·중 기술 패권 경쟁, 팬데믹 이후 공급망 재편, 기후위기, AI의 범용 기술화 등을 거치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난 몇 년 동안엔 주요국 가운데 어떤 나라도 AI를 그냥 ‘시장에 맡겨두면 알아서 발전하는 기술’로 보지 않는다. 자국 상황에 맞는 산업정책을 동원해 천문학적 돈을 퍼부으며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3대 메가프로젝트는 외환위기 이후 희미해졌던 한국의 국가 주도 산업정책, 특히 국가가 생산 인프라와 산업입지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산업정책의 귀환에 가깝다. 이는 과거 개발독재의 복원이 아니라, AI 시대의 생산능력과 그 과실의 사회적 환류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를 묻는 새로운 산업국가의 시험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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