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광장] 경찰의 신뢰는 선언이 아니라 설계다
2026.07.15 00:05
19세기 영국의 역사가 존 액턴 경이 1887년 성공회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남긴 말이다. 권력을 가진 자를 반드시 감시해야 한다는 이 경고는 백오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아니, 최근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 오히려 더 절실하게 들린다.
광주에서 한 여고생이 세상을 떠났다. 꽃다운 나이의 이채원 양은 낯선 이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분노와 슬픔 앞에 섰다. 그러나 이 사건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범인 처벌로 끝나지 않는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드러난 것은 범행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덮으려 했던 또 다른 손이었다. 한 아이의 죽음보다 더 깊은 곳에서 또 다른 진실이 지워지고 있었다.
피의자의 아버지는 현직 경찰 경감이었다. 사건 발생 사흘 만에 아들의 자취방을 찾아가 핵심 증거물을 불태웠다. 수사팀장은 피의자 아버지에게 수사 정보를 넘겼고, 피의자가 휴대전화를 버린 정확한 위치까지 알려줬다.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는 수거되지 않은 채 방치됐고, DNA 감식 결과는 한참이 지나서야 검찰에 전달됐다. 수사팀 전원이 업무에서 배제되고 수사팀장이 긴급체포되기까지, 진실은 여러 겹의 손에 가려져 있었다. 조직의 그늘 안에서 조용히 사라질 뻔했다.
이 사건의 핵심은 한 경찰관의 일탈이 아니다. 조직이 그 일탈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수사팀장은 피의자 아버지와 오랜 시간 같은 조직에서 일했다. 그 인연이 법과 원칙 앞에서 무너졌다. 문제는 그 인연을 끊어낼 구조가 없었다는 점이다. 경찰이 나쁜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경찰관이 오늘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시민의 곁에 서 있는지 우리는 안다. 그러나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가진 개인도, 잘못된 구조 안에 놓이면 흔들린다. 조직 내부의 위계와 동료 의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한다. 그것은 때로 법보다 강하게 작동한다.
경찰 조직을 경찰 스스로만 감시할 때 생기는 구조적 맹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같은 제복을 입고, 같은 위계 안에서 자라온 사람들이 서로를 들여다볼 때 놓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다. 어느 나라든 권력기관의 자체 감찰만으로 부패를 막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역사는 반복해서 증명해 왔다. 내부 감찰은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외부의 눈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시스템은 완성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조직 바깥의 눈이다. 경찰 출신이 아닌, 법조·교육·기업·외교 등 다양한 삶의 현장을 살아온 사람들이 치안 정책을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 이들은 경찰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경찰이 스스로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짚어주는 역할을 한다. 내부의 논리가 아닌 시민의 언어로 경찰 행정을 바라보는 눈, 그것이 경찰을 더 강하게 만든다. 민간 감시의 본질은 불신이 아니라 신뢰의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조직 문화를 바꾸고, 바뀐 문화가 다음 사건을 막는다.
오래된 질문이 있다. 권력은 누가 감시하는가. 입법이 행정을 견제하고, 사법이 그 둘을 들여다보는 구조. 삼권분립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인류의 오랜 답이다. 그런데 치안 권력에 대해서는 그 답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 내부 감찰은 있지만, 조직 바깥에서 시민의 언어로 경찰을 들여다보는 눈은 여전히 약하다. 이번 사건은 그 빈자리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줬다. 그 자리를 채우는 일, 그것이 지금 이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다.
이채원 양이 떠난 자리에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분노와 처벌만이 아니다. 진실을 덮으려 했던 구조를 바꾸는 일,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를 단단히 세우는 일, 그것이 우리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약속이다. 여명주 가톨릭관동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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