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고 야구부 응원 논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가르쳐야 한다
2026.07.11 19:16
짧게 머리를 깎은 건장한 학생 70여 명이 교복 차림으로 줄지어 섰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자 학생들은 서서히 발걸음을 뗐다. 이들 뒤로 검은 정장 차림의 성인 수십 명이 따랐다. 대부분이 고개 숙인 채 침묵하며 걸었다. 32도의 무더위 속, 발걸음을 옮기는 학생들과 어른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행렬은 국립5·18민주묘지 추모탑 앞에서 멈췄다.
2026년 7월6일 오후 4시30분께, 배재고 야구부 학생과 학부모, 광주제일고(광주일고) 야구부 학생, 두 학교 관계자와 정근식 서울시교육감, 김대중 전남광주통합시교육감, 교육청 관계자 등 140여 명이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았다. 앞선 6월29일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제81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이 광주일고를 상대로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데이” 등 구호를 외쳐 논란이 된 지 일주일 만이었다. 2026년 5월 스타벅스코리아가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에 맞춰 진행한 행사를 ‘5·18 탱크데이’ 등으로 홍보했다가 비판받은 사건과 맞물린, 명백한 혐오표현이다.
이날 배재고 야구부원 36명은 무거운 표정으로 추모탑 앞에 서서 참배를 기다렸다. 이들은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국화를 헌화하고 묵념했다. 학생들 뒤에서 헌화 순서를 기다리던 배재고 학부모들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참배식이 끝난 뒤 김대중 교육감은 “(배재고와 광주일고의) 공동참배는 사과를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교육의 과정”이라며 “잘못을 돌아보고 서로 이해하며 미래의 민주 시민으로 성장하는 새 출발을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근식 교육감도 “광주일고 학생 선수들과 관계자, 광주시민, 국민께 사과드린다”며 “부끄러움을 아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배움과 성장이 시작된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이날 참배식에 앞서 배재고 야구부와 관계자들은 광주일고를 찾아 사과했다. 배재고 방문단은 오후 3시께 광주일고에서 광주일고 야구부 학생과 교직원, 학부모, 동문 등에게 사과문을 전달하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배재고 야구부 감독은 “학생 선수들의 지역 비하 응원은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잘못”이라며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과오를 인정하며 지도자로서 져야 할 책임을 겸허히 감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재고 야구부 선수단은 “꿈과 희망이 담겨야 하는 야구장에서 배재고 선수들의 부적절한 발언과 행동들로 인해 마음의 큰 상처를 입은 광주제일고 선수들과 학부모님, 광주 시민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학생과 학부모 일부는 사과의 뜻을 표하며 흐느끼기도 했다.
이규연 광주일고 교장은 배재고 방문단이 사과하자 “어머님들이 들어오실 때부터 눈물을 흘리고 계셔서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학생들도 울먹이고 있어 원래 하려던 말이 순간 사라졌다”며 “배재고 학생들, 고개 드세요. 어깨 펴세요. 여러분의 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진정으로 사과하려면 마음으로 사과하는 것도 중요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더 잘 사는 것”이라며 “이 일을 계기로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는 용기를 주고, 어른들은 어른들의 몫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배재고 방문단의 사과 이튿날인 7월7일, 광주일고 교직원과 야구부 학생, 총동문회 쪽은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고 학생 선수들의 선처를 요청했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스포츠공정위원회는 앞서 7월1일 배재고에 8월 개최되는 봉황대기 대회 등을 포함해 6개월간 대회 출전 정지 징계를 내린 바 있다. 이 교장은 “어제의 용서와 화해의 모습을 고려해서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이 경기장 내에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가능한 행정적 역량과 지혜를 모아주시기 바란다”고 했다. 스포츠공정위원회의 징계를 두고 배재고 쪽은 7월8일 재심을 청구했다.
배재고 사건이 불거진 지 8일 만에 가해자 쪽의 사과와 용서, 그리고 피해자 쪽의 선처 요청까지 이어지면서 이번 사건이 남긴 사회적 의미가 작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혐오표현을 한 잘못을 사과하고 피해자 쪽이 이를 받아들인 일이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기 때문이다.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장은 “가해자가 사과하고, 피해자가 이를 받아들이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용서하고 선처를 요청하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바람직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장을 지낸 김현수 체육시민연대 집행위원장은 “학교끼리 중재가 잘 일어났다. 사과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모두 진지했다”며 “이번 일을 통해 다른 학교 학생들도 ‘이런 표현을 하면 큰일 난다’는 것을 배웠을 수 있다. 역사 인식을 바로잡는 계기가 됐다면 그 자체로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고 했다.
다만 사과와 용서가 곧바로 사건의 종결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지학 소장은 “광주일고가 용서해서 될 일만은 아닐 수 있다”며 “국가폭력이 시민에게 총을 쏜 일은 광주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시민 모두에게 가해진 폭력이다. 그것을 농담하고 놀린 것은 희생자와 유족에게도 충격이지만, 우리 모두의 슬픔이고 아픔”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계기로 이런 혐오표현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 전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학생들이 사과와 용서의 절차를 밟는 동안 사건을 진영 논리와 정치적 도구로 소비한 ‘어른들’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갈등을 조정하기는커녕 극한 대립을 조장했다는 지적이다. 논란 이후 배재고 등굣길에는 근조화환과 응원화환이 뒤섞여 놓였다. 이 가운데 이진숙 국민의힘 의원이 배재고에 응원화환을 보내면서 논란이 일었다. 배재고와 광주일고가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할 때도 20~30대 남성으로 보이는 이들이 배재고 선수단을 향해 “파이팅”을 외쳤다. 학생들의 사과와 참배가 진행되는 자리에서 나온 응원 구호였다.
김지학 소장은 “남초 커뮤니티나 극우 커뮤니티, 스타벅스 광고, 대기업 오너의 ‘멸공’ 발언, 정치권의 언어 등 사회 전체의 문화가 학생들에게 영향을 줬다”며 “근조화환을 보내거나, 반대로 ‘스타벅스 가야지’를 응원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국회의원이 응원화환을 보내는 것은 청소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홍경표 광주일고 총동창회장은 “지금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오직 자신의 존재만 드러내기 위하여 이 비극적 사건에 억지스러운 정치적 의미를 덧씌우고, 편을 가르고, 대중의 분노를 자극해 사회를 혼란시키는 시도들”이라고 비판했다. 김현준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도 “어른들은 조용히 지켜보면서 피해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경청하고, 피해자를 도와 가해 학생과 학교가 이 문제를 어떻게 교육으로 해결할지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배재고 사건을 계기로 청소년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진 역사적 사건이나 재난 참사, 국가폭력 피해자를 조롱하는 표현이 온라인과 또래 문화 안에서 소비되는 현실에 우려도 다시 제기되고 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2026년 7월2~6일 전국 초중고교 교사 110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혐오·역사왜곡 표현 인식 설문조사’에서도 이런 실태가 드러났다. 응답 교사의 89.3%는 최근 1년간 학교에서 학생들의 혐오·차별·역사왜곡 표현을 접했다고 답했다.
‘혐오, 교실에 들어오다’ 공저자 이신애 교사는 “예전에는 ‘나는 이런 말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혐오표현을 과시적으로 쓰는 경우가 있었다면, 최근에는 혐오의 맥락을 어렴풋이 알고 그 말을 쓰는 것 자체를 재미있어하는 문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김현준 연구원은 “최근 여러 연구와 조사를 보면 청소년들도 여러 경로를 통해 정치를 진지하게 인식하고 있다”며 “학교가 정치 문제를 토론과 논쟁의 대상으로 다루기보다 회피해온 탓에 학생들의 정치적 욕망이 놀이의 형태로 발산되는 측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교실에서 민주시민 교육, 역사 교육이 실질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현준 연구원은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되 해서는 안 되는 차별과 혐오 발언이 있다는 기준을 배워야 한다”며 “우리는 무엇이 혐오표현인지 정의하고 교육하는 과정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김지학 소장은 “(민주시민 교육 등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없어지거나 축소되지 않도록 해서 우리 사회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공동체 가치로 자리 잡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교사 개인의 자질이나 능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사들이 민원에 시달리지 않고 역사와 인권, 성평등, 차별 문제를 가르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신애 교사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수업 역시 학생들에게 더 설득력 있고 매력적으로 다가갈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며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논쟁을 넘어,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이고 인권적인 방식인지에 대한 전략이 더 많이 논의돼야 한다”고 말했다.
학교 스포츠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현수 집행위원장은 학교 야구의 이른바 ‘야지’ 문화를 짚었다. 그는 “학원 스포츠에서는 벤치에서 쉬지 않고 떠들고, 양 팀이 경쟁적으로 상대를 흔드는 말을 한다. 선배 선수나 코치들이 ‘기세가 죽었다’며 눈치를 주기도 한다”며 “이제는 학교 스포츠 안의 혐오표현을 중단할 때가 됐다”고 했다. 그는 이어 “운동부 학생들도 특별한 집단이 아니라 학생이다. 스포츠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또래 시민이라면 의무교육 안에서 받아야 할 민주시민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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