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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성장론' 그 서사의 소유권이 넘어가고 있다 [하헌기의 콘텍스트]

2026.07.11 16:00

[하헌기 새로운소통연구소장 sisa@sisajournal.com]

'메가 프로젝트'의 진짜 의미…국가가 '산업 밑그림' 직접 그린다
'탈원전' 접고 '분배' 대신 '생산' 강조…보수엔 무엇이 남았나


산업혁명은 인류 문명을 바꿨다. 1차 산업혁명의 동력은 증기기관이었고, 그 연료는 석탄이었다. 2차 산업혁명의 핵심 동력은 전동기와 내연기관이었다. 내연기관은 석유로, 전동기는 전기로 움직였지만 당시 전력 대부분도 화석연료로 생산됐다. 화석연료 확보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었다. 

한국이 20세기를 망국과 식민지로 시작해야만 했던 이유도 이 흐름에서 완전히 배제됐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와 이승만 정부 시기에 형성되고 성장한 기업인들의 노력이 수출 주도 공업화의 물꼬를 텄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시작되자마자 수출이 증가하기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다. 국가 주도 산업정책으로 산업혁명을 따라잡기 시작한 시조는 박정희였다. 그의 중화학공업 정책은 2차 산업혁명 추격 정책이었다. 그 유산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있기에, 그를 존경하는 이가 많은 것도 자연스럽다. 

이재명 대통령이 6월29일 청와대에서 열린 3대 메가 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이 대통령, 최태원 SK그룹 회장 ⓒ연합뉴스


'호남 퍼주기·기업 팔 비틀기'라는 빈곤한 해석

짚을 것은 짚자. 1인당 국내총생산(GDP) 1만 달러까지 이 나라를 끌어올린 엔진이 박정희 시대의 중화학공업이었다는 데 필자는 이견이 없다(그가 사망할 때까지 국민소득은 채 2000달러가 되지 않았지만, 그가 설계한 엔진이 대한민국을 그 위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한국이 1인당 GDP 3만 달러까지 전진한 데엔 김대중과 노무현의 공로가 컸다. 김대중은 3차 산업혁명인 정보화 혁명의 인프라를 깔았고, 노무현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시장의 울타리를 넓혔다. 박정희가 브레턴우즈 체제와 미국· 일본을 잘 활용했다면, 김대중과 노무현은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편입과 성장 국면을 잘 활용했다. 보수와 진보는 이 점을 상호 공평하게 인정하며 '대한민국 성공사례'의 공통분모를 넓혀 나가야 한다. 

그들의 선견지명, 결정적으로 한반도 거주민들의 지난 100년의 노력 덕분에 지금 우리의 입지는 100년 전과 다르다. 4차 산업혁명의 증기기관이 인공지능(AI)이라면 그 연료는 반도체다. 한국은 그 반도체의 주요 생산국이다. 반도체는 '산업의 쌀'을 넘어 'AI 시대의 석유'가 됐다.

6월29일 정부가 내놓은 '3대 메가 프로젝트'는 이 맥락 위에서 읽어야 한다. 반도체, 피지컬 AI, AI 데이터센터. 서남권에 팹(Fab·제조공장) 4기를 포함한 800조원 규모의 제2 생산 거점을 세우고, 충청은 패키징, 영남은 소부장과 피지컬 AI를 맡는다. 18.4기가와트(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도 짓는다. 외신들은 1조 달러짜리 계획이라고 썼다.

발표가 나오자마자 빈곤한 해석들이 조급하게 쏟아졌다. 여당 '당권 경쟁의 아이템'이라느니, '호남 퍼주기'라느니, '기업 팔 비틀기'라느니. 게으른 독해다. 이 구상의 원형은 지난해 12월 발표된 '남부권 반도체 혁신벨트'였다. 지방선거 뒤에 급조한 게 아니라 반 년 넘게 굴려온 설계도다.

필자는 이 발표에서 한국 현대사의 관성을 끊는 두 개의 단절을 본다. 첫째, 국가가 산업의 밑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이는 박정희 사후 전두환 정부가 '공급 과잉'을 구조조정한 이후 두 세대 동안이나 없었던 일이다. 그사이 중국은 국가가 돈·기술·시장을 총동원해 디스플레이를 가져갔고, 조선과 배터리를 따라잡았다. 한국 제조업은 훨씬 더한 위기에 몰릴 수도 있었으나, 미국의 대중 견제 덕에 시간을 벌었다. 이번 발표는 그렇게 번 시간과 반도체 호황으로 생긴 자금의 여력을 활용해 국운의 상승에 베팅하는 것이다. 부처와 총수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천문학적인 금액을 논하며 공장 하나가 아니라 지역의 생태계 전체를 설계한다. 

둘째, 분배의 정부가 생산의 정부로 옷을 갈아입었다. 민주당 계열 정부의 무게중심은 늘 나누는 쪽에 있었다. 복지를 넓히고 격차를 줄이는 일에는 밝았지만, 무엇을 해서 돈을 벌어올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시장을 쳐다봤다. 이번 정부는 그 질문을 정면으로 받았다. AI의 전력 수요에 원전이 필요하다면 어제의 탈원전 노선도 접는다. 잠재성장률이 1%대로 주저앉은 나라에 절실히 요구됐던 생존을 위한 적응이다.

보수의 반발이 유독 신경질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반도체 경쟁력이 무너질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성립하지 않는 걱정이다. 기업을 권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존재로 보는 시각부터가 낡았다. 삼성·SK는 어느 정당보다 정교하게 리스크를 계산하는 조직이다. 수지가 안 맞는 계획이었다면 시늉만 내다 정권 교체를 기다릴 조직들이다. 5년짜리 권력 앞에서 제 명줄을 도려낼 대기업은 2026년 대한민국엔 없다. 그날 청와대에서 대통령은 허리를 숙였고, 두 총수는 천조 단위의 숫자로 화답했다. 등 떠밀린 사람의 표정이 아니라, 주판알을 다 튀겨본 자의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보수는 무엇이 두려운가. 밥그릇이 아니라 보수를 구성하는 토대다. 보수의 서사 말이다. '이 나라를 일으킨 것은 우리'라는 서사. 보수 정치의 밑천은 언제나 그것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경부고속도로를 가로막았다는 사진 한 장으로 반세기 장사를 했다. 사진의 진위보다 중요한 것은 그 한 장이 발휘해온 위력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민주 정부가 무언가를 지으려 하면 길을 막았다. 행정수도가 그랬다. 그 구상의 원조는 유신 말기의 박정희였는데, 노무현이 그 구상을 꺼내들자 유신 시절의 관료들이 반대의 선봉에 섰고, 헌법재판소가 관습헌법이라는 전례 없는 논리로 관 뚜껑에 못을 박았다. 

실패로 끝난 보수의 '대왕고래 프로젝트'

그런데 지금, 그 서사의 소유권이 넘어가고 있다. 이건 인사로 하는 '중도보수 확장'과도 차원이 다르다. 이재명 정부의 기획이 성공하면 산업화의 주어가 바뀐다. 보수가 가슴에 단 훈장은 골동품이 된다. 그래서 보수의 문법 안에서 이 프로젝트가 놓일 자리는 셋뿐이다. '좌초할 계획'이거나, '부풀려진 신기루'이거나, '특정 지역에 베푸는 선심'이거나. 나라에 이로운 일이니 대놓고 막을 수도, 성공하게 도울 수도 없다. 지금의 신경질은 이 진퇴양난에서 새어나오는 단발마의 비명이다. 

이 좁은 국토에 반도체 공장이 반드시 서야만 하는 운명의 땅 같은 건 없다. 입지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투자로 길러내는 것이다. 용인과 평택 역시 전력과 물이 이미 부족했다. 동남방에 있는 원자력발전소가 만든 전기가 수도권과 충청의 공장을 위해 북상해야 한다면, 공간에 대한 다른 상상력도 가능하지 않은가. 물론 샴페인을 따기엔 한참 이르다. 하지만 이 베팅이 성공했을 때의 기대수익이 굉장하다. 해볼 만한 도전이며, 지금이 아니면 다시 못 할 도전이다. 

먼 훗날 한국 경제사의 연표에서 2026년 6월29일이,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던 나라가 첫 유정을 뚫은 날로 읽히기를 바란다. 과거의 연료에 연연한 대왕고래의 사기가 아닌, 문명사를 읽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 도전으로 말이다. 경부고속도를 막는 민주화 정치인들의 사진 한 장으로 반세기를 장사했던 보수는, 과연 이 도전 앞에서 '내로남불'을 멈출 수 있을 것인가. 현재 이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는 보수는 홍준표 전 대구시장밖에 없어 보인다. 

하헌기 새로운소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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