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증금 떼먹고 에르메스 펑펑’…문제는 전세인가 사기인가
2026.07.11 07:00
수천만 원이 넘는 전세금을 한순간에 떼이게 됐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돌려줄 돈이 없다고 했던 집주인이 알고 봤더니 외제차를 타고 다니며 명품 쇼핑에는 지갑을 펑펑 열었다면? 한술 더 떠 빚을 갚으려 노력하기는커녕 오히려 빚을 탕감해달라는 신청을 했다면?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지난 6일 9시 뉴스에서는 임차인 60여 명의 보증금 70억 원을 돌려주지 않으면서도 집주인은 파산 선고에 이어 여전히 배우자 명의 고급 빌라에서 외제차를 이용 중인 모습을 보도해 드렸습니다.
| 사라진 보증금…집주인은 강남 백화점서 에르메스 펑펑(7월6일, 뉴스9)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603506 |
"어떻게 법이 이러느냐"며 화내기엔 이릅니다. 파산 후 면책 결정이 진짜기 때문입니다. 파산은 재산을 정리하는 절차고, 면책이 본격적으로 빚을 탕감해 주는 제도입니다.
집주인 이 씨는 수원회생법원에 면책 허가를 신청해 현재 관련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그렇다면 이 씨는 면책받을 수 있을까요? 파산 회생 실무 변호사들의 도움을 얻어 따져봤습니다.
■ '성실하지만 불운했는가' 따지겠지만...재판부 '재량 면책'의 가능성 있어
파산제도의 주된 목적은 '성실하지만 불운한 자'에게 새로운 출발의 기회를 주는 겁니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어쩔 수 없는 사유로 일시적 곤란을 겪은 자에게는 사회가 도움을 줘서 재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공익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도의 취지를 뒤집어보면 '성실하지 않은 자'에게는 면책을 허가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도 성립합니다. 실제로 우리 법은 이렇게 면책 불허가 사유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 채무자회생법 제564조 ①항 - 과다한 낭비 또는 도박 등을 하여 현저히 재산을 감소시키거나 과대한 채무를 부담하는 행위 - 자기 재산을 숨기거나 부수거나 다른 사람 명의로 바꾸거나 헐값에 팔아버린 행위.... |
이 씨는 '성실하지만 불운한 자'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에르메스·디올 등 명품 매장 '단골'이자 포르쉐·벤츠 등 외제차를 4대나 리스한 '큰 손' 이 씨. 파산 신청 직전 3개월간 신용카드를 1억 원 가까이 쓰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포르쉐 카이엔 리스 계약 차량을 파산 신청 직전 남편 명의로 승계하기도 했죠.
이 씨의 재산 내역 등을 조사한 파산 관재인은 "낭비를 하지 않고 채무자 소유 주택들의 담보대출 변제에 사용했더라면 현재와 같은 지급불능 사태는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면책 불허가 의견을 냈습니다.
하지만 반전은 남아 있습니다. 실무적으로 판사의 '재량 면책'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파산회생 전문 변호사들 중론입니다. 파산면책 재판 특성상 판사에게 넓은 재량권이 보장되는 덕에, '원님 재판'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라는데요. 법원마다 기준이 제각각인 면이 있어 면책률(인용률)이 높은 법원을 찾아가는 게 '성공 파산'의 비결로 꼽힌다고 합니다.
|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제564조 ②항 법원은 제1항 각호의 면책불허가사유가 있는 경우라도 파산에 이르게 된 경위, 그 밖의 사정을 고려하여 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면책을 허가할 수 있다. |
■ 면책 결정 시 '내 돈 달라' 못해... 입법조사처 "임차보증금, 비면책채권으로 명시해야"
파산 임대인에 대한 면책 결정이 나면, 임차인들은 우선변제권조차 인정받지 못합니다. 국회 입법조사처도 지난해 12월, 현행 제도의 한계를 지적하며 "채무자회생법 제566조 및 625조 제2항에 우선변제권이 인정되는 임차보증금반환채권을 비면책채권으로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법원의 면책 허가가 나더라도 전세보증금만은 집주인이 끝까지 갚아야 하는 채권으로 인정해 줘야 한다는 겁니다.
정부는 급한 대로 전세사기피해자법을 통해 허점을 메웠습니다.
국토교통부에서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은 경우, 우선변제권이 인정되는 한도 내의 보증금을 '비면책 채권'으로 분류한 겁니다. 하지만 특별법이라 법의 효력이 내년 5월이면 끝나는 데다,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은 사람들에게만 해당합니다. 지난 6월 기준, 국토부 전세사기 피해자 인정률은 60% 정도입니다.
| 전세사기피해자법 제25조의13 채무자회생법 제566조에도 불구하고 전세사기피해주택에 대한 전세사기피해자등의 임차보증금은 같은 법 제415조제1항에 따라 우선변제권이 인정되는 한도 내에서는 책임이 면제되지 아니하는 청구권으로 본다. |
이제 남은 건 형사 고소입니다.
이 씨에 대한 형사 처벌이 확정되면 '전세 사기' 혐의와 얽힌 빚, 즉 임차인들 보증금 채권은 탕감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습니다. 채무자회생법은 '채무자가 고의로 가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등을 아예 비면책 채권으로 분류하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정리하고 보니, 근본적으로 의문이 들지요.
'내 돈 달라'는 당연한 권리를 찾기까지 이렇게나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니,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는 걸까요?
■ 임대인 394명이 '파산 먹튀' 2천 3백억 원...문제는 전세인가 사기인가?
사기를 막겠다고 다양한 예방 및 구제책이 등장했지만, 효과는 물음표입니다.
지난달에만 전세사기 피해 548건이 또 추가됐습니다. 전세사기피해자법이 제정된 2023년 5월 이후 3년간 '국토부 공식 인증' 피해자만 누적 3만9천여 명이죠.
전세사기 범죄는 오히려 한 번 더 진화했습니다. 이 씨 사례에서 보듯, 파산 제도를 악용하기 시작한 거죠. 새로운 일도 아닙니다. 이미 지난 해 10월 말 기준,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대위변제 후 회수하지 못한 파산 관련 보증금은 2,381억 원 ·임대인 수는 394명에 달합니다.
이쯤 되면 '전세' 자체가 의심스럽습니다. 전세는 '통제받지 않는 거대한 사금융'이란 지적도 이미 수차례 나왔죠. 전세사기 피해 당사자이자,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 공동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철빈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 사실 10년 전에 전세는 없어질 운명이었어요. 그때 전세를 살려준 게 전세대출과 전세보증보험이었습니다. 국가의 정책 개입이 없었다면 전세는 원래 없어질 운명이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수십 년 동안 누려왔으니까, 전세가 마치 미풍양속인 것처럼, 우수한 주거 계약 형태인 것처럼 얘기하면서 살아났죠. 그게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수만 명의 전세 사기 피해자를 발생시켰고 돌아가신 분들도 수십 명이고 사실은 거의 수십조 원에 달하는 그런 돈도 낭비가 되었는데 이제는 좀 끊어야 하는 거 아니냐... 전세가 당장은 달콤하게 보일 수는 있어요. 당장 나가는 월 주거비는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니까. 근데 전세가 살아남아 있으면, 전세를 이제 디딤돌로 해서 매매가는 훨씬 더 가파르게 오르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내가 집을 정작 사려고 봤을 때는 집값이 더 올라가 있는 그런 결과를 낳기 때문에, 전세가 사실은 세입자들에게도 그렇게 유리한 계약 형태가 아닌 거죠. 이철빈/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 공동위원장 |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오래 지켜봐 온 입장에서, 결국 전세와 전세사기는 동전의 양면 같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사회 초년생이나 주거 약자들에게 있어 전세만큼 장점이 있는 주거 제도가 없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효율적이지만 그만큼 치명적인 가시가 달린 셈입니다. 우리는 전세와 사기 사이에서 새로운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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