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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졌던 ‘배냇솜털’, 성인 몸에 다시 자란 이유가…위기 앞둔 인체의 특별한 생존 본능

2026.07.11 07:01

[차 권하는 의사 유영현의 1+1 이야기] 58. 사람 라누고, 차 백호(白毫, trichome)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찻잎의 백호(트리콤, trichome), 신생아 피부의 Lanugo(Healthline), 거식증 환자 피부의 Lanugo(Young Men's Health), 금침백련 표면의 금침. 사진=유영현 제공


차나무의 어린싹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잔털이 빽빽하게 덮여 있다. 식물 표피세포가 변형된 이 미세 털은 식물 용어로는 트리콤(trichome), 한자로는 백호(白毫)라 부른다.

단순한 털처럼 보이지만 그 역할은 중요하다. 백호는 장식이 아니라 생존 장치다. 사람 태아 피부를 덮는 라누고(Lanugo 배냇솜털)처럼 생존 장치 역할을 한다.

어린싹은 식물의 생애에서 가장 취약한 시기의 구조물이다. 세포벽이 얇고 질소 함량이 높아 곤충의 공격이 집중된다. 자외선과 수분 손실에도 취약하다. 그래서 나무는 싹의 표면, 즉 외부와 접하는 경계에 보호 구조를 집중시킨다. 싹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발달시킨 장치가 백호다. 백호는 물리적 장벽으로 기능한다.

작은 침 털이 빽빽하게 나 있는 싹에는 곤충이 달라붙기 어렵다. 물리적 장벽인 이 털로 애벌레의 접근도 막고 자외선도 막고 수분 증발도 줄인다. 백호가 형성되는 시기는 곤충들이 경계하는 쓴맛을 가진 카테킨이나 카페인 농도가 높은 시기와 겹쳐서 싹에 있는 이 물질들은 화학적 장벽 역할도 한다.

맛있는 차의 비결?…사실은 곤충 막으려던 물리·화학 장벽



물리 장벽이자 화학 장벽인 트리콤에는 역설이 숨어있다. 백호는 자외선과 곤충으로부터는 자신을 보호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사람의 채엽 손길은 피할 수 없다. 찻잎이 곤충을 멀리하기 위해 선택한 쓴맛을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트리콤 기저부에는 아미노산과 방향성 물질이 농축되어 있어 차를 우릴 때 풍부한 꽃 향과 과일 향을 낸다. 그리고 차를 우릴 때 백호가 떨어져 나와 찻물에 섞이면서 차의 맛을 부드럽고 풍성하게 만든다. 따라서 곤충과 자외선을 멀리하기 위해 찻잎이 선택한 전략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찻잎의 맛있는 부분이라는 해석을 제공하고 만다.

채엽된 백호는 사람의 손으로 들어와 차의 일부가 된다. 백호는 눈으로 잘 보이지 않을 뿐 대부분 차에 포함되어 있다. 특히 '백호은침(白毫銀針)'과 '금침백련(金針白蓮)' '궁정(宮庭) 보이', 그리고 홍차의 '오렌지 페코'에서 잘 만날 수 있다.

'백호은침'은 봄에 갓 자라난 어린싹을 사용하여 제작한 백차다. 백호은침의 뜻은 하얀 털이 있는 은색 바늘이다. 백호가 빼곡히 덮여 있어 찻잎이 은빛을 띤다.

'금침백련'의 뜻은 금색의 바늘과 흰색 연꽃이다. 보이 숙차에서 금색의 침 모양이 보이고 백련 향이 난다는 뜻이다. 미생물에 의한 발효 공정을 통해 다른 찻잎 부분은 적갈색으로 변하여도 흰털 부분은 황금색으로 보여 금침이란 이름이 붙었다.

'궁정 보이'는 미생물로 발효시킨 보이 숙차를 촘촘한 채로 걸러내어 모은 작은 잎으로 만든 보이차다. 당연히 금빛으로 반짝이는 싹이 많이 포함된다.

홍차 등급 체계에서 흔히 말하는 '오렌지 페코'는 유럽에 차를 가장 먼저 도입한 나라 네덜란드 왕국이 보장하는 어린잎을 의미한다. '오렌지 페코'에는 백호가 남아 있을 확률도 높다.

홍차는 산화 과정을 거친다. 산화된 백호는 황금빛으로 변한다. 다즐링 홍차에서 말하는 "골든 팁"도 백호를 가진 싹을 의미한다.

어린싹이 많이 포함된 위 차종 중 우려낸 찻물에서 백호가 두드러지는 차는 '백호은침'이다. 백호은침을 우리면 찻물 표면에 미세한 흰 부유물이 반짝인다. 단순히 말려 제작하는 백차인 백호은침에는 백호가 거의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린 찻물 표면에서도 미세한 흰 털을 볼 수 있다. 처음 보면 먼지처럼 보인다. 빛을 받은 백호는 반짝이며 찻물 위에 떠 있다.


태아 피부 지키는 비단옷발생 단계에서 잠시 호출되는 '라누고'



찻물 위에 떠 있는 백호를 보면, 차나무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펼친 생존전략이 보인다. 사람의 라누고(배냇솜털)에서도 이와 같은 치열한 생존전략을 발견할 수 있다.

라누고는 태아기의 피부를 덮는 아주 가늘고 부드러운 모발이다. 색소가 거의 없고, 길고, 피부 위에서 비단이 흐르듯 분포한다. 태아기 16주에서 20주 사이에 전신으로 퍼지기 시작해 어깨, 등, 얼굴, 팔다리를 덮는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머리카락이나 눈썹 같은 종말모와는 전혀 다른 구조다. 발생 초기 단계의 모낭에서 만들어지는 라누고는 피질 층이 얇고 수질이 거의 없으며 멜라닌 침착도 미약하다.

라누고는 아직 완성되기 전의 피부를 지키는 생존 장치다. 태아 피부에는 피하지방이 충분하지 않다. 체온 조절 능력도 미숙하다. 태아 피부는 양수 속에서 끊임없이 물리적·화학적 자극에 노출된다.

이때 라누고는 피부 표면에 형성되는 태지를 붙잡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지질과 단백질이 혼합된 태지는 태아 피부를 수분 손실과 감염으로부터 보호한다. 라누고는 동시에 미세한 공기층을 형성하여 단열 효과를 높인다.

라누고는 발생 과정 속에서 잠시 호출되었다가 점차 사라진다. 임신 후반기로 갈수록 태아는 피하지방을 축적하고 체온 유지 능력을 확보한다. 이때 모낭의 분화 단계도 바뀐다.

라누고는 점차 탈락하고 그 자리는 더 짧고 옅은 연모(vellus hair)로 대체된다. 출생 시 만삭아의 피부에서 라누고는 대부분 사라진다. 성숙 단계에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라누고의 목적은 성숙 이전의 생존이다.

거식증 환자에게 다시 솜털이?…원형으로 돌아가는 인체의 신비



성인이 된 몸에서 이미 사라졌던 라누고가 다시 자라나는 흥미로운 현상이 관찰되기도 한다. 음식을 스스로 거부하는 거식증 환자에서 라누고 재등장을 볼 수 있다. 식사 거부가 길어져 극단적인 체중 감소를 보이는 환자의 얼굴, 등, 팔에 가늘고 부드러운 털이 다시 자란다.

마치 태아기의 피부가 돌아온 모습이다. 이것은 단순한 외형 변화가 아니다. 몸 전체의 생리적 재편이 이루어졌다는 피부의 징후다.

거식증에서는 피하지방이 급격히 소실된다. 지방은 단순한 에너지 저장고가 아니라 주요한 단열 장치다. 피하지방이 줄어들면 열 손실이 급격히 증가한다.

동시에 기초대사율이 떨어지고, 체온은 낮아진다. 갑상선호르몬 T3는 감소하고, 시상하부-뇌하수체-성선 축은 억제된다.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이 줄어들고, 월경은 멈추며, 생식 기능은 잠정 중단된다. 코르티솔은 상승하고 IGF-1은 감소한다. 이 모든 변화는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고 생존을 연장하기 위한 선택이다.

피부도 이 신호를 감지한다. 굵고 색소가 풍부한 종말모는 에너지 비용이 든다. 멜라닌 합성, 각질화, 두꺼운 피질 형성은 모두 대사적 부담을 수반한다.

영양이 극단적으로 결핍된 상태에서 피부는 이런 구조를 유지하기 어렵다. 피부는 이전의 발생 단계에서 만들던 더 가늘고, 색소가 적고, 단순한 라누고를 불러와 종말모를 대체하기 위하여 발생 초기 프로그램을 다시 불러온다. 이렇게 재등장한 라누고는 열 손실을 줄이는 미세한 단열층을 형성해 피하지방이 사라진 부위에서 보호막을 만든다.

이렇게 성인 거식증 환자의 피부를 지키게 된 라누고는 아름다움이나 장식과는 무관하다. 라누고 재등장은 생존을 향한 몸의 선택이다. 생식과 성장이라는 고차적 목표를 내려놓고 체온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를 호출한 결과다. 거식증 환자에서 관찰되는 라누고의 재등장은 피부의 기본 모드는 체온 유지라고 말해 준다.

거식증 환자에서 나타나는 라누고 재등장은 생명들에게 성숙은 필수가 아님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에너지가 충분하고 환경이 안정적이어야만 성숙한 구조물이 유지된다. 반면 결핍과 위기 속에서는 성숙을 버리고 에너지를 최소로 소비하는 기본적인 전략으로 생존하여야 한다.

생명의 일차 목적은 생존, 그 자체



라누고 재등장은 생명은 필요하면 언제나 생존의 원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설계해 두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더 놀랍기는 거식증 환자가 치료를 통해 영양을 회복하면 재등장하였던 라누고가 다시 사라지는 현상이다. 라누고의 재등장도 경이롭지만, 재등장한 라누고가 사라지는 현상은 더 경이롭다.

성숙한 생명은 복잡성과 화려함을 추구하지만, 생명의 일차 목적은 생존이다. 백호가 어린 찻잎에서 나타나는 이유도 차나무의 생존 때문이다. 차나무 생존을 돕던 백호는 잎이 충분히 두꺼워지고 광합성 기구가 완성되면 없어진다.

라누고와 백호는 사람과 차나무라는 다른 생태계에 속한, 전혀 다른 맥락의 구조물들이다. 그러나 이 둘은 생존을 위하여 버틴다는 똑같은 전략을 공유한다. 백호도, 라누고도 말한다. "급할 때 장식은 무슨? 우선 살고 봐야지!"

유영현 티클리닉 디렉터(오디오칼럼 1+1이야기 https://www.youtube.com/@yhyoo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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