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면 요법으로 우울증 이겨내고 피아니스트들 미치는 곡을 썼다 [허세민의 클래식 한 스푼]
2026.07.11 06:31
러시아 작곡가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1번 실패 후 슬럼프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재기
손열음 "피아니스트들의 운명의 곡"
다음 달 정명훈 지휘·김세현 협연당신을 클래식 세계로 처음 데려간 '첫사랑' 같은 곡은 무엇인가요? 클래식 애호가들의 대답은 제각각이겠지만, 이 곡만큼은 의심할 여지 없이 걸작으로 평가할 것입니다. 바로 러시아 낭만주의 시대의 거장,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의 피아노 협주곡 2번(c단조, 작품번호 18)입니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라흐마니노프는 미국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총 네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남겼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날까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 피아노 협주곡 2번입니다.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 인생의 가장 어두운 암흑기에 태어났습니다.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던 라흐마니노프는 스물네 살이던 1897년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됩니다. 야심차게 선보인 교향곡 1번이 "지옥에서나 환영받을 곡"이라는 혹평 속에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당시 초연 지휘를 맡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의 만취설, 리허설 부족 문제 등이 제기됐지만 젊은 작곡가의 무너진 명예를 회복시키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사건으로 극심한 우울증을 앓게 됩니다. 곡을 쓸 수 없는 상태가 3년간 지속됐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훗날 이 시기를 두고 "뇌졸중을 겪어 오랫동안 머리와 손을 사용하지 못한 사람과 같았다"고 회고했습니다.
하지만 기나긴 터널에도 끝은 있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의 심리 치료가 통했던 것입니다. 달 박사는 최면 요법을 통해 라흐마니노프의 병든 내면에 긍정의 언어를 심어줬습니다. "당신은 반드시 대작을 쓰게 될 것"이라고요.
달 박사의 말은 결국 현실이 됐습니다. 1901년 라흐마니노프가 완성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직접 연주하며 세상과 다시 마주했고, 이 곡으로 당대 러시아 최고 권위의 음악상 글린카 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해준 달 박사에게 이 곡을 헌정했습니다.
가장 늦게 완성된 1악장은 종소리를 연상케 하는 장엄한 피아노 독주로 시작됩니다. 라흐마니노프의 내면으로 침잠하듯 어두운 선율은 이내 2악장의 평온함과 3악장의 찬란한 희망으로 나아갑니다. 마치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명언처럼 이 곡에는 고통과 환희의 순간이 함께 숨을 쉽니다.
곡 전반에 흐르는 화려하면서도 묵직한 기교는 라흐마니노프의 큰 손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그의 키는 무려 198㎝에 달했다고 하는데요. 손가락도 길어 '도'에서 한 옥타브 위 '라'까지 동시에 짚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세기의 명곡이지만 정작 라흐마니노프와 가까웠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3~1989)는 이 2번 협주곡을 공식 석상에서 단 한 번도 연주하거나 녹음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에 깊은 애정을 보였죠. 그는 2번 협주곡의 3악장 코다(종결부)에서 피아노가 오케스트라의 반주 역할에 그치는 것을 마뜩잖아 했다고 전해집니다.
비록 호로비츠의 해석은 들을 수 없지만, 수많은 연주자가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이 곡에 대해 "피아니스트라면 특별한 신념으로 거부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연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곡"이라고 저서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에 적었을 정도입니다.
올해도 이 곡을 감상할 수 있는 무대가 꾸준히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쇼팽 콩쿠르 본선에 진출한 피아니스트 이관욱은 지난 5월 첫 국내 협연 무대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함께 이 곡을 선보였습니다. 다음 달 2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도 기대를 모읍니다. 지난해 롱 티보 국제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피아니스트 김세현이 정명훈 지휘자가 이끄는 KBS교향악단과 함께 이 곡을 들려줄 예정입니다.
클래식 음악은 감상하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클래식 명곡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 입에 쏙 넣어 드립니다.
허세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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