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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 피해 숨던 게임 속 캐릭터 AI… 산업 현장 로봇 두뇌로 진화

2026.07.11 01:43

[토요기획] 피지컬 AI에 뛰어든 K게임사들
NC AI, 월드 파운데이션 모델 구축… 현실 세계의 행동 시뮬레이션 도와
크래프톤은 휴머노이드 지능 높여… 상황 인지-의도 파악 기술 등 활용
한국, 제조업 로봇 밀도 세계 1위
올해부터는 국산 모델 개발 착수… “실증 환경 확보가 경쟁력 가를 것”
⟪K게임 속 AI, 실제 로봇 두뇌로 진화 중

총알을 피하고, 지형을 읽는 게임 인공지능(AI)이 조선소 용접 로봇과 같은 실제 로봇의 두뇌로 진화하고 있다. 가상세계가 로봇의 훈련장이 되고, 게임 기술이 로봇 개발의 토대가 된 배경을 살펴봤다.⟫

게임을 개발하던 조직이 로봇의 ‘두뇌’와 이를 훈련시킬 ‘가상 훈련장’ 개발에 속속 뛰어들고 있다. 게임사 크래프톤의 대표 게임 배틀 그라운드. 크래프톤 제공 


지난달 7일 서울 강남구 신논현역 인근 PC방에서 “젠슨 황”을 외치는 환호가 터졌다. 크래프톤의 대표작 ‘배틀그라운드’ 인플루언서 초청 행사에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서였다. 황 CEO는 행사를 마친 뒤 인근의 또 다른 PC방으로 이동해 김택진 엔씨(NC) 대표를 만났고, 신작 ‘아이온2’ 라이브 방송에도 깜짝 출연해 게이머들과 어울렸다.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을 이끄는 황 CEO가 빡빡한 방한 일정 중 국내 게임사들을 잇달아 찾자 업계는 이를 예사롭지 않은 신호로 받아들였다. 엔비디아가 한국 게임사를 차세대 피지컬 인공지능(AI) 전장에서의 협력 파트너로 주목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AI 개발 경쟁이 글과 그림을 만들어내는 생성형 AI를 넘어 현실 세계에서 직접 움직이는 로봇과 기계 등을 대상으로 한 피지컬 AI로 옮겨 가고 있기 때문. 마침 국내 게임사들은 최근 로봇의 ‘두뇌’와 이를 훈련시킬 ‘가상 훈련장’ 개발에 속속 뛰어들고 있다. 게임 밖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는 ‘탈(脫)게임’ 행보가 본격화한 것이다.

게임과 로봇은 얼핏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기술적으로는 맞닿은 부분이 적지 않다. 전투 게임 속 캐릭터는 총성이 들리면 바위 뒤로 숨고, 상대가 움직이면 공격 경로를 바꾼다. 조선소의 용접 로봇도 강한 불빛과 분진 속에서 용접 지점을 찾아내고, 작업물 상태에 맞춰 팔의 움직임을 조정한다. 무대가 가상세계에서 현실 공장으로 바뀌었을 뿐 주변을 보고 판단한 뒤 행동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게임사는 오랫동안 이런 판단과 움직임을 가상공간에서 구현해 왔다. 캐릭터가 벽을 통과하지 않게 하고, 물체가 중력에 따라 떨어지게 하며, 이용자의 돌발 행동에 맞춰 비(非)플레이어 캐릭터(NPC)가 반응하도록 만드는 일이 모두 게임 개발의 일부다. 로봇 역시 현실에 투입되기 전 수많은 상황을 겪으며 배워야 한다. 실제 공장에서 로봇을 넘어뜨리고 부딪히게 하며 훈련시키기는 어렵지만, 게임사가 만드는 3차원 가상공간에서는 그런 시행착오를 비교적 안전하고 값싸게 반복할 수 있다. 게임업계가 피지컬 AI에 뛰어드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게임 캐릭터 만들던 손으로 로봇 두뇌 빚는다”

리니지 개발사 엔씨의 AI 전문 자회사 NC AI는 2월 정보통신기획평가원이 주관하는 ‘피지컬 AI 모델 학습을 위한 월드 파운데이션 모델(WFM) 기술 개발’ 과제를 위해 ‘K-피지컬 AI 얼라이언스’ 컨소시엄을 꾸렸다.

WFM은 로봇이 주변 환경을 이해하고 행동의 결과를 예측하도록 돕는 ‘두뇌’ 역할을 하는 AI 모델이다. 사람으로 치면 “이렇게 움직이면 넘어지겠다”거나 “이 물건을 너무 세게 잡으면 부서지겠다”고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능력에 가깝다. 사람이 자전거를 배울 때 여러 차례 넘어지며 균형 감각을 익히듯, 로봇도 가상세계에서 실패를 반복하며 현실세계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게임을 개발하던 조직이 로봇의 ‘두뇌’와 이를 훈련시킬 ‘가상 훈련장’ 개발에 속속 뛰어들고 있다. 엔씨의 자회사 NC AI가 3차원(3D) 생성 AI 서비스로 만든 로봇 이미지. NC AI 제공 
NC AI는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을 개발하며 쌓아 온 가상환경 구축, AI 캐릭터 행동 설계, 강화학습 기술을 WFM 개발에 활용하고 있다. MMORPG에서는 수많은 이용자가 동시에 접속한다. 그만큼 캐릭터는 복잡한 지형과 예측하기 어려운 이용자 행동에 실시간 반응해야 한다. 여러 행동을 시도한 뒤 결과를 보고 더 나은 선택을 찾아가는 강화학습도 게임 AI와 로봇 AI가 함께 쓰는 방법론이다.

장한용 NC AI 피지컬AI랩 실장은 “엔씨에서 게임 캐릭터 AI를 직접 개발했던 인력 4명이 그 경험을 살려 피지컬 AI 개발을 맡고 있다”며 “게임 속 NPC와 캐릭터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만드는 ‘모션 생성 AI’ 등은 피지컬 AI에 필요한 상황 인식, 행동 생성, 시뮬레이션 기반 학습 기술과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배틀그라운드’와 ‘인조이’를 운영하는 크래프톤도 피지컬 AI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키우고 있다. 크래프톤은 지난해 11월 미국에 피지컬 AI·로봇 연구회사 ‘루도 로보틱스’를 세웠고, 김창한 크래프톤 대표가 CEO를 맡았다. 게임사 대표가 로봇 연구회사 경영까지 직접 챙기고 나선 만큼 피지컬 AI를 장기 성장 축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담겼다는 평가다. 루도 로보틱스는 휴머노이드 로봇 지능 개발을 추진하는 곳이다.

로봇으로 실제 수백만 번의 실패를 반복하려면 비용과 위험이 크다. 로봇이 넘어지거나 물건을 떨어뜨리는 훈련을 실제 공간에서 계속하기도 어렵다. 반면 가상공간에서는 이런 상황을 제한 없이 만들 수 있다. 크래프톤 관계자는 “강화학습 등 게임 캐릭터의 시행착오 기반 학습 방법론은 로봇의 움직임 학습이나 환경 적응 연구와 연결된다”며 “배틀그라운드의 AI 동료 캐릭터 ‘펍지 앨라이’를 만들며 축적한 상황 인지, 의도 파악 기술이 로봇 지능 연구로 확장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 빠르게 크는 로봇 시장… 정부도 3조 원 투자

게임업계가 피지컬 AI로 눈을 돌리는 데에는 로봇 산업의 성장세가 영향을 미쳤다. 국제로봇연맹(IFR)에 따르면 전 세계 산업용 로봇 신규 설치 규모는 2016년 30만 대에서 2024년 54만 대로 늘었다. 2028년에는 70만 대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로봇이라는 ‘몸체’가 빠르게 늘어나는 만큼 이를 움직일 ‘두뇌’와 로봇을 훈련시킬 ‘가상 훈련장’의 가치가 함께 커지는 것이다.

한국은 피지컬 AI를 산업 현장에서 시험해 볼 여건이 잘 갖춰진 나라로 꼽힌다. 2024년 한국의 제조업 로봇 밀도는 노동자 1만 명당 1220대로 세계 1위다. 일본 446대, 미국 307대, 중국 166대를 크게 앞선다. 전자, 자동차, 조선, 철강 등 로봇을 투입할 수 있는 제조 현장이 이미 폭넓게 깔려 있다.

정부 역시 관련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올해부터 2년간 340억 원을 투입해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 국산화에 착수했다. 산업통상부는 2030년까지 로봇 산업에 민관 합동으로 3조 원 이상을 투자하고, 전 산업에 로봇 100만 대 이상을 보급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해외에서도 게임과 가상세계는 현실에서 움직일 AI의 훈련장으로 쓰인다. 구글 딥마인드의 AI 에이전트 ‘SIMA’는 여러 비디오게임을 돌아다니며 “사다리를 올라가라”, “빨간 물체를 찾아라” 같은 사람의 지시를 수행한다. 처음 접한 가상세계에서도 스스로 목표를 찾아 움직이는 능력을 기르는 방식이다.

● “가상훈련 검증할 실증 인프라 시급”

다만 게임 기술이 곧바로 로봇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게임에서는 몰입감과 재미가 중요하지만, 로봇 훈련에는 정확한 물리법칙과 안전성이 요구된다. 화면 속 캐릭터가 벽에 조금 겹치거나 물건이 비현실적으로 튀어 오르는 일은 게임에서는 사소한 오류다. 하지만 현실 로봇은 작은 판단 착오만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고가 설비를 망가뜨릴 수 있다. 가상세계에서 성공한 동작이 실제 공장에서도 같은 결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일, 즉 가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일이 피지컬 AI의 난제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피지컬 AI 경쟁이 결국 데이터와 실증 환경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 갈릴 것으로 내다본다. 로봇팔이 물체를 집을 때 필요한 힘, 조선소 용접선의 미세한 흔들림, 공장 바닥의 마찰 같은 물리 데이터는 연구실보다 실제 산업 현장에 훨씬 더 많다. 게임사가 만든 가상세계가 로봇의 예행연습장이 되고, 제조 현장의 데이터가 다시 AI를 고도화하는 선순환을 만들 수 있느냐가 한국형 피지컬 AI 생태계 발전의 관건이 될 것이다.

김태균 KAIST 전산학부 교수는 “한국이 피지컬 AI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기업별로 흩어진 현장 데이터를 안전하게 활용하는 체계와 가상훈련 결과를 실제 현장에서 검증할 실증 인프라를 동시에 키워야 한다”며 “기술 고도화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할 시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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