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사유상·허스트 작품이 내 방에…전시보다 핫한 ‘굿즈’[취향의 발견]
2026.07.08 17:08
유명 작품 소유하는 ‘가치 소비’
2030 관람객 확대…SNS에 경험 인증
올해 굿즈 매출, 지난해 넘어설 듯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지난달 서울 송파구 롯데뮤지엄 앞에는 개관 전부터 수백 명이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일본 출신 그래픽 아티스트 베르디(VERDY)의 첫 개인전 ‘아이 빌리브 인 미(I Believe in Me)’ 개최와 함께 진행한 협업 프로젝트의 ‘굿즈(Goods·상품)’를 사기 위해서였죠. 베르디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는 브랜드 휴먼메이드와 롯데뮤지엄이 손잡고 만든 상품은 공개 당일 조기 소진됐고, 작가의 지인인 지드래곤의 브랜드 피스마이너스원과 협업 상품 역시 판매 당일 완판됐습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상품이 전시 못지않게 뜨겁습니다. 전시가 마음에 들어서 상품을 사는 관람객이 있는가 하면, 뮤지엄숍에 가기 위해 전시를 보거나 전시장에 가지 않고 온라인 뮤지업숍에서 굿즈만 사는 역현상도 일어나고 있는데요. 이번 ‘취향의 발견’에선 전시 관람객들을 홀린 굿즈 열풍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굿즈 열풍 일으킨 국립중앙박물관 ‘뮷즈’
국내 문화예술 굿즈 시장의 판도를 바꾼 것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산하 박물관의 상품 브랜드 ‘뮷즈(MU:DS)’(뮤지엄+굿즈)입니다. 굿즈를 사기 위해 박물관이 문을 열기 전부터 줄을 서는 ‘오픈런’의 원조격인데요.
국립박물관문화재단에 따르면, 2016년 61억원 수준이던 뮷즈 매출은 2022년 116억원, 2023년 149억원, 2024년 212억원 등으로 매년 빠른 속도로 증가했습니다. 특히 2025년에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흥행에 힘입어 역대 최대치인 413억원을 달성했죠. 올해 들어서도 상반기 매출이 벌써 218억원을 기록했는데요. 이는 전년 동기 대비 약 90% 증가한 수치로, 연간 최고치 경신 기대감을 높이고 있습니다.
지난해 ‘까치 호랑이 배지’가 매출을 견인했다면 올해 1등 공신은 ‘반가사유상 미니어처’인데요. 올 상반기에만 약 1만2000개가 판매됐으며, 누적 판매량도 6만1000개에 이릅니다. K-팝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RM이 소장해 유명세를 탄 이 상품은 힐링 오브제로 큰 인기를 끌며 품절 대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베스트셀러 ‘취객선비 3인방 변색잔 세트’인데요. 이 뮷즈는 김홍도의 ‘평안감사향연도’에 등장하는 선비들을 모티브로 한 잔입니다. 차가운 술이나 음료를 부으면 선비들의 얼굴이 붉게 물드는 위트를 더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어요.
재단은 협업 상품도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데요. 하이브와 함께 선보인 BTS 협업 상품은 이틀 만에 4300만원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연예인의 팬덤과 문화적 영향력이 전시장 안으로 이어지는 모습입니다.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뮷즈는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의 시선도 사로잡았죠. 상반기 외국인 고객 매출은 약 1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배 가까이 성장했어요.
유명 작품 소장의 기쁨…미술관 굿즈
미술관의 상품은 박물관의 굿즈와 또 다른 매력으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예술성을 강조한 상품으로 미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죠.
국립현대미술관이 발행하는 전시 도록과 전문 서적은 미술관만큼이나 그 권위를 자랑하며 전시를 깊이 있게 소장하려는 관람객과 미술 전공자들의 필수 구매 품목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가게(MMCA SHOP)에서 판매하는 이들 서적은 비싼 건 8만원이나 되는데도 꾸준히 판매되고 있어요.
거장들의 작품을 옮긴 아트 프린트나 소형 조각, 아트 오브제 등은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경우도 많지만, 컬렉터들 사이에선 인기가 높습니다. 거액의 원작 대신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작품을 소장하는 즐거움을 선사하기 때문이죠. 마치 판화의 에디션처럼 ‘멀티플 아트(Multiple Art·복수로 생산되는 작품)’로 여겨지는 듯 보입니다.
유명 작가들과 협업해 ‘한정판’으로 제작하는 상품은 소장 욕구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시 후 버려지는 폐자재를 활용해 만든 텀블러, 폐도자기로 만든 향합(인센스 홀더) 등 친환경 소품은 젊은 관람객들 사이에서 ‘가치 소비’ 트렌드가 떠오르면서 인기를 얻기도 했어요.
굿즈의 인기에 힘입어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가게의 매출도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문화재단에 따르면, 미술가게 매출액은 2023년 30억2900만원, 2024년 30억3100만원 수준에서 2025년 35억6700만원으로 17.7% 급증했습니다. 올해 상반기 매출액은 23억6300만원으로 이미 지난해 연간 매출액의 66.2%를 돌파했습니다. 국립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연간 최대 매출액을 새로 쓸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특히 최근 역대 최다 관람객을 동원한 데이미언 허스트 개인전과 연계해 선보인 상품이 큰 호응을 얻었는데요. 상반기 판매 1~5위 모두 허스트와 협업한 굿즈가 차지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팔린 것은 ‘데이미언 허스트 마그넷’이었고, 이어 허스트 도록, 허스트 파우치, 허스트 토트백, 허스트 엽서 등의 순으로 파악됐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굿즈를 살까요? 굿즈의 주 구매객은 20~40대였습니다. 성별로 보면 여성이 72.5%로 압도적으로 많았어요.
국공립 미술관뿐 아니라 사립 미술관 역시 굿즈 행렬에 동참하고 있는데요. 주요 사립 미술관은 대량 생산형 문구류 대신, 희소성 높은 작가 협업 상품이나 고가의 프리미엄 오브제로 객단가(고객 1인당 평균 결제액)를 높이고 있습니다.
리움미술관은 김윤신 조각가와 협업한 파우치, 엽서, 메모패드 등을 완판시켰습니다. 전상근 작가와의 협업 상품인 ‘백자 고배’, 이불 작가와 협업한 마그넷, 노트, 키링 등도 품절을 기록했죠. 호암미술관에선 니콜라스 파티 작가와 협업한 ‘부채 손수건 세트’와 겸재 정선 아트 프린트 등이 모두 팔렸어요.
대구간송미술관의 ‘자개 텀블러&보틀’은 전통 자개를 텀블러와 보틀에 적용한 상품으로, 미술관을 대표하는 상품이 됐습니다.
SNS에 경험 인증…‘가치 소비’의 확대
박물관과 미술관의 굿즈는 이제 기념품 수준을 넘어 하나의 대표 상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전시를 ‘관람’하는 것에서 ‘소유’하는 것으로 방문객들의 소비 패턴이 바뀌면서 매출 규모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관람객이 역대 최다를 기록할 정도로 전시를 즐기는 내외국인이 증가했기 때문인데요. 특히 2030 세대를 중심으로 문화 향유 저변이 확대된 것과 궤를 같이합니다.
젊은 층에게 굿즈는 단순히 기념품이 아니라 ‘내가 그곳에 가서 전시를 직접 봤다’는 경험을 인증하는 수단이 됩니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한정된 수량만 판매하는 문화 상품을 소유한다는 만족감과 자부심도 제공하죠.
전통적, 고전적 예술적 자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상품을 소비하는 ‘힙트래디션(Hip+Tradition)’과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예술을 나의 일상으로 가져와서 즐긴다는 ‘가치 소비’의 트렌드도 한 몫을 했습니다.
굿즈를 방에 배치하고 SNS에 인증하는 행위는 나의 예술적 취향을 드러내는 ‘미닝아웃(소비로 신념이나 정체성을 표현하는 성향)’의 일환으로, 소비가 소비를 부르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유리 너머로만 보던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이나 ‘백제금동대향로’ 같은 유물을 비교적 적은 돈으로 내 집에 들여놓을 수 있다는 점은 ‘스몰 럭셔리’ 심리와도 맞아떨어집니다.
더구나 한정판 굿즈는 리셀 시장까지 형성돼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정가의 몇 배에 달하는 웃돈이 붙어 거래될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기도 합니다.
일각에서는 문화예술이 상품으로 ‘소비’되는 것에 대한 우려도 나오지만, 일부 계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문화예술이 대중화하고 있다는 점은 반가운 일입니다. 문화 향유 저변의 확대가 이제 초기 단계인 만큼, 굿즈 열풍도 한동안은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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